‘수령제’와 ‘발걸음’

북한 예술로 읽다(16)

2017-01-11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 관현악 '발걸음' [사진출처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남측의 부녀 정권이나 북측의 부자 정권이 대를 이어 정권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앞선 이의 발걸음을 따른다’는 점이다. 그것이 과거형이건 현재형이건 말이다. 박근혜 정권은 아버지의 후광 아래 새마을 운동을 부활하고 박정희 기념사업에 수천억 원의 예산을 편성한 바 있으며, 북측에서는 회고음악회를 내세우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기리고 있다.

그렇지만 남측이 보수세력의 장기집권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북측은 유일지도체제에 따른 수령제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리더쉽의 형성 과정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북한체제의 역동적 동태성을 무시하고 개인숭배와 부자 세습적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한 사고라고 할 수 없다.

북측에서 권력승계는 단순한 권좌의 계승이 아니라, 정치적 수령의 지위와 역할의 승계로 정의된다. 북측은 김정일 위원장이 노동당에서 후계자로 지명되기 전부터 그의 후계지위 구축을 위한 정지작업을 물밑에서 착실히 진행해 왔으며, 혁명위업계승이라는 ‘후계자론’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혁명위업은 수령의 위업”이라는 명제를 논리적 기초로 하는 ‘수령론’에 기인한다. 결국 혁명위업 계승은 수령의 사상, 역사, 조직을 계승하는 것이자,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수령의 위업이 개척되어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대를 이어 계승 완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측에서는 김일성 주석 시절부터 혁명1세대들이 이룩해 놓은 혁명업적이 한 번에 부정당하고 수정주의와 교조주의의 흐름에 매몰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최고지도부는 혁명1세대의 혁명 업적을 공고화하고 이를 계승하는 문제가 단순한 후계자의 선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다. 특히 베트남전의 전면적인 확전은 동북아 지역에서의 새로운 국제전의 위협으로 인식한 북측을 내부 전시체제의 강화로 이끌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북측으로 하여금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유기체적 단결구조를 강화하도록 강제하였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던 1964년에,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에 배속되어 지도원으로 근무를 시작한다. 조직지도부는 북측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부서로 그중에서도 국가기구를 관장하는 중앙지도과에서 근무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내부사업 전반을 파악했다. 1967년 당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에는 김 주석의 캠페인을 주도하면서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관여하였고, 이후 선전선동부 문학예술지도과장으로 옮기면서부터 사상사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혁명전통교양을 당정책교양과 더불어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직접 지도하던 문학예술인들 사이에서는 1969년경부터 그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0년 9월에는 당 문학예술부 부부장에 임명되어, 선전선동의 중요 수단인 문학예술 부문과 출판보도 부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지도력을 행사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문학예술분야에 대한 지도로 변화와 성과를 이룩한 것이 1971년 창작된 혁명가극 <피바다>이다. 이 작품을 본 항일원로 1세대들의 감동은 김 위원장에 대한 신뢰를 한껏 높여주었으며, 후계자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1972년 12월에는 헌법을 개정,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고 ‘주석제’를 신설함으로서 새로운 국가권력구조를 탄생시켰다.

1972년 10월 중앙위원회 제5기 5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고, 1973년 4월 당문학예술부장으로 진급한데 이어, 9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 및 사상담당비서로 선출되었다. 당의 조직과 사상 부문을 한 사람이 전담한 것은 노동당 역사상 전례없는 파격적인 조치로서 향후 당권 장악을 위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게 된 것이다. 김 위원장은 1974년 2월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이때부터 노동신문은 그를 ‘당중앙’으로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1974년 2월 김정일 위원장은 ‘전국당선전일군강습회’에서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고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당의 최고 강령으로 선포하였다. 김일성주의가 완전히 구현된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로 규정함으로서 김일성주의를 “목표문화”로서 순수이데올로기화 한 것이다. “수령 신격화”의 시작으로서, 표면적으로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기보다 수령에 대한 충성을 요구함으로써 ‘수령에 대한 후계자의 충성’을 과시하고, 종국적으로 주민들로부터 ‘후계자에 대한 충성’도 보장받는 일종의 환류(feeback)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지도력은 1974년 이른바 <70일 전투>를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경제건설에 대한 김 위원장의 지도 능력을 입증해보는 기회이자 동시에, 당원들의 충성심을 검열하는 과정이었다. 1974년 10월 하순부터 12월 말까지 70일 간 북한경제 전 분야에서 전개된 <70일 전투>의 특징은 속도전의 방침에 따라 사상 개조를 확고하게 앞세운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상을 앞세운 정치 우위의 경제 건설 방식으로 결국 경제 사업에 대한 당적 지도와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70일 전투>의 성공으로 김 위원장은 1975년 2월 15일 중앙인민위원회로부터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받고, 당내에서 경제관리능력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지도영역은 경제분야로까지 확산되었다. 그리고 속도전은 북측의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전투방식으로 규정되었다. 1975년에는 군 병영에 김 위원장의 초상화가 김 주석과 나란히 부착되었다.

1981년 6월부터는 북측 언론이 ‘영광스러운 당중앙’이라는 호칭 대신에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1982년 김 위원장의 생일이 정식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추대되며 군권 인수를 시작하였다. 1991년에 인민군 최고사령관, 1992년에 공화국 원수칭호, 1993년에 국방위원장을 거쳐, 김 주석 사후 ‘3년상’을 이유로 당총비서 승계를 미루다가 1997년에 비로서 당총비서에 취임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1994년 김일성의 사망 직후인 1995년부터 1997년까지 ‘고난의 행군’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는 북한 체제의 최대한의 위기로 김 위원장은 이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선군(先軍)정치’를 전면화 한다. ‘선군정치’는 북한 사회의 혁명과 건설을 구현해 나가는 데 있어 기본정치방식으로 선언되었다. 군의 역할이 강조되어 당과 사회 전체에 군대가 앞서는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1998년 헌법을 개정하여 국방위원회를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으로 규정하고 지휘통솔권과 국방사업전반에 대한 위상과 권한을 크게 강화하였다. 그 결과 선군정치 하에서 군은 정치적인 역할과 경제건설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되었다.

▲ 사진출처 KBS 갈무리

선군정치의 전면화는 후계자인 김정은 노동당위원장 시대에도 계속 확대되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자신의 삼남인 김정은을 2009년 1월 8일 후계자로 지명하고, 2010년 9월 28일 제3차 당대표자대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직에 추대함으로서, 공식 후계자로 공인한다. 김 위원장 사망 직후인 12월 30일 북측은 김정은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함으로서 김정은 위원장이 김정일 위원장의 선군정치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2012년 4월 제4차 당대표자회를 기점으로 년내 모든 권력 승계를 완료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먼저 군을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고 김정은 시대를 이끌고 나갈 엘리트 구조를 ‘당 우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하였다. 군부에 대한 숙청과 계급 강등이 이어지며 김정일 시기에 제도화 되었던 군부 엘리트의 퇴진과 당 엘리트의 약진이 전통적인 ‘당-군체제’로 회귀된 것이다. 이러한 엘리트의 정책은 체제의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 아울러 세습후계체제의 정당화를 위한 논리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할 때까지 혁명투쟁을 조금도 지체하거나 중도반단하지 않고 그것을 련속적으로 끊임없이 계속해 나가는 것”을 주문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의 리더십은 제도적 리더십에 중점을 둔 김정일 위원장과 달리 만경대와 백두혈통, 개인 우상화에 초점을 맞춘 인격적 리더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외모부터 복장, 파격적인 대민 행보, 육성 연설 등 모든 부분에서 김일성 주석을 모방하며 인민들에게 김 주석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이것을 통해 본인의 약점을 보완해 왔다. ‘인덕정치’를 내세운 김정은 위원장의 이러한 친인민적인 행보는 ‘아래로 부터의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 내며, 민생중심의 개방적인 대중적 리더십으로 체제의 안정화를 도모하고 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의 ‘음악정치’를 계승하여 인민과 지도자 사이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통일, 결속시키며 혁명의 건설과 전진에 있어, 음악에 선도적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백두의 칼바람’을 전면에 내세우며 혁명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발걸음’을 전 인민이 따라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단연 주목을 받고 있는 노래가 바로 <매혹과 흠모>와 <발걸음>이다. <매혹과 흠모> 는 2010년 창작된 대표적인 송가로서 수령과 인민의 관계를 매혹과 흠모의 유기적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윤두근 작사, 안종호 작곡으로 노동신문 2010년 6월 28일자 4면에 게재된 해당 곡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1. 친근한 영상 뵈오면 마음은 정에 쏠리고/ 영명한 말씀들으면 온 넋은뜻에 끌리네/

장군님 한분만 믿고 그 품에 심장을 주는/ 이것이 매혹이런가 이것이 매혹이런가/

2. 베푸는 사랑 고마워 따르며 운명 맡기고/ 이끄는 령도 위대해 받들어 한몸 바치네/

장군님 떠나 못살아 꿈에도 그리워 찾는/ 이것이 흠모이런가 이것이 흠모이런가/

3. 매혹은 흠모를 낳는 마를줄 모르는 샘물/ 흠모는 매혹이 터친 꺼질줄 모르는 불길/

장군님 뜻과 정으로 숨결을 이으며 사는/ 이것이 내 삶이여라 이것이 내 삶이여라

‘매혹’은 인민들이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느끼는 고백으로서, 쉬지 않고 현지지도와 강성국가 건설을 위해 불철주야 애쓴 김 위원장의 고매한 위인적 풍모에 대한 ‘매혹’이자, 그 이의 인민에 대한 뜨거운 인정을 체험한 인민들의 열화와 같은 ‘매혹’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김 위원장을 태양과 같은 영생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흠모’임을 표의하고 있다.

음악적으로는 주제적 내용에 맞게 유순하면서도 풍부한 정서와 우아함이 잘 표현되어 듣는 이들로 하여금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서정적 선율과 시적 운율의 가사가 조화롭게 형상된 이 곡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생활적인 시어들과 마치 이야기를 하듯 다감한 정서를 자아내는 운율 구성”으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군대와 인민의 감정을 진실하면서도 뜻깊게 형상한” 가사가 “형상적 의의”가 있다고 설명한다. 가사가 내포한 사상적 정서가 짙은 그리움의 선율로 부각되어, 이를 통해 “매혹과 흠모의 샘은 마를 길 없는 태양칭송의 노래”로 불려진다.

<발걸음>은 김정은 위원장이 후계자로 공식화되기 전, 2009년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노래로 김정은 후계를 상징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가사에서 김 위원장을 ‘김대장’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척척척 발걸음 소리’를 후계구축의 상징 신호로 활용하며 김정은 위원장의 공식적 등장 전후로 많이 보급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작곡과 작사는 당시에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2014년 출시된 보천보전자악단의 창작가 ‘리종오 작곡집’ 에 1991년 창작, 작사·작곡 리종오로 게재되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요리사로 13년간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의 9세 생일잔치(1992년 1월 8일)를 위해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창작해 생일 때 불렀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공식적으로는 2009년 2월 인민군 제264대연합부대 예술선전대 공연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참관 하에 불려졌다고 알려졌다. 이후 같은 해, 4월 26일 군 창건일 기념 공훈국가합창단의 경축 공연에서 실연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공식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연목으로서 "21세기의 수령 찬가"라고 알려졌다. 특히 지난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 나가게 된 북한 축구 대표팀이 본선진출권을 확정지은 뒤 숙소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 '애국가'와 함께 불러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진 곡이다.

1970년대 김정일 후계 체제의 확립 과정은 곧 북한의 독특한 사회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수령 체제를 제도적으로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수령에서 후계자로 통일 단결의 중심을 계승하고, 후계자를 중심으로 한 당과 대중의 통일 단결을 더욱 심화 발전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에 의해 비로소 북한의 “수령제 사회주의”가 내용적으로 구체화, 체계화, 제도화되었으며, 사상이론적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후 김정일의 유일지도체제는 혁명세대의 교체와 함께 후계체제의 승계로 이어졌다.

그러나 후계체제로의 이행의 긴 여정의 시간이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해서 그 역시 혁명전통의 위업을 계승한 후계자로서의 역할과 지위를 달성하기 위해 새롭게 요구되는 리더십의 제도화와 이론화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이것을 통해 북측의 안정된 체제와 정권을 궁극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북측의 교체된 새로운 세대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남북 소통과 공존의 리더십을 보여주길 기대하며, 동시에 2017년 새롭게 교체될 남측의 정부와 지도자가 한반도에 대해 주체적 평화통일에 대한 리더십을 보여주길 기대해 본다.

바이올린독주와 경음악 <매혹과 흠모> (연주 모란봉악단)

관현악 <발걸음> (연주 조선국립교향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