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우 <노예수첩> 필화 5

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2016-11-25     채형복 교수
양성우는 1943년 11월 1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전남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詩人誌(시인지)>에 ‘발상법’, ‘증언’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발상법>(1972), <신하여 신하여>(1974), <겨울공화국>(1977), <북치는 앉은뱅이>(1980),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1982), <넋이라도 있고없고>(1983), <낙화>(1984), <노예수첩>(1985), <부활의 땅>(1988), <꽃날리기>(1991),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1997), <첫마음>(2000), <물고기 한 마리>(2003), <길에서 시를 줍다: 양성우 시화집>(2007),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2012) 등이 있다.

4. 문학으로 법 읽기, 법으로 문학 읽기 2

‘정치인’으로서 양성우는 제13대 국회의원을 거쳐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이명박 정부에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는다. 이 위원회는 “간행물의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구현하고 간행물의 유해성 여부를 심의하기 위하여“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산하에 설치된 공공기관이다(출판문화산업진흥법 제17조 1항).

유신체제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구속·구금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은 그가 ‘간행물의 유해성 여부’를 심의하는 위원회의 수장을 맡은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그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시인’이란 칭호를 듣는 것만으로 희열을 느끼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유신정권에 막혀 세상의 ‘영웅’이 되지 못한 한을 풀고자 했음일까?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후의 양성우의 이력을 살펴보면, 시작(詩作)을 포함한 문학 활동을 접기보다는 ‘외형상으로는’ 오히려 평균 이상의 실적을 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양성우의 시집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실천문학사, 2012)의 발문의 제목으로 “우주에 만연한 그리움의 절정”으로 달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양성우의 시세계를 이렇게 요약하여 평하고 있다.

“그렇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양성우 시인의 시들에는 우리 근현대사를 시심(詩心)으로 수놓은 이 모든 시인들의 단심과 그리움이 들어 있다. 첫 시집 <발상법>에서부터 <겨울공화국>을 거쳐 13번째 시집 <아침 꽃잎>에 이르기까지 시력(詩歷) 40여 년을 꿰고 있는 것이 단심이다. 맨 처음의 순정한 마음이 오늘도 그리움에 사무친 시를 낳고 있다.”

이경철이 평한 대로 양성우가 정치에 입문한 이후 발표 혹은 발간된 시작은 대부분 ‘그리움’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그는 시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에서, “내 가슴의 상처들이 시가 되었다”, “내 모든 슬픔이 시가 되었다”며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고 읊고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듯이 정치에 입문한 이후 양성우는 ‘정치인’으로도, 또 ‘시인’으로도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실패했다.

신경림은 양성우의 시세계를 ‘리듬의 힘, 사랑의 힘’으로 규정하면서 <겨울공화국>, <북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꽃상여 타고>, <노예수첩>, <꽃 꺾어 그대 앞에>, <달뜨고 박꽃 피고> 등 그의 초기 시와 시집에 대해 찬사를 한다. 하지만 곧이어 양성우가 정치의 세계에 뛰어든 일에 대해 완곡한 어조로 비판한다.

“나는 양성우 시인이 일단 시를 젖혀놓고 딴 일에 뛰어들었을 때 그를 아끼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서운해 했다. 시를 떠나서는 그가 결코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예감도 들었다. (...) 내가 좋아하는 시인 양성우는 세상의 더 깊은 곳, 더 험하고 추악한 곳을 두루 겪고 이제 거의 10년 만에 우리의 곁으로 돌아왔다. 위에 든 몇 가지 이유로 나는 그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사실 미흡한 대목도 없지 않았으니, 치열하고 철저한 자신과의 대결이 없는 점이 그것이었다. 다시 돌아온 그가 그 대목까지 채워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가 그의 새 시집을 대하면서 갖는 바람이다.”

신경림의 점잖은 훈계와는 달리 소설가 이문구는 아주 직설적으로 양성우의 시세계를 비판한다.

“생각하건데 ‘그대’나 ‘먼 곳에 있는 이’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에 대한 짐작은 읽는 이마다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닥의 미련과 어쩔 수 없는 원망과 허망한 탄식에 대한 기미는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서 그는 “공(이문구의 양성우를 부르는 말)은 자기를 소외시킨 의회에 대하여 아직도 미련이 있는 모양이다”라며 정치권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양성우를 질타한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채호석은 “양성우의 비교적 초기의 시를 읽다 보면 매우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라고 호평했다. 그 호평의 근거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제헌절 특사로 풀려나와 문인동료들과 함께. 앞줄 푸른 남방을 입은 이가 양성우 [사진 출처 :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

첫째, 양성우의 초기 시들은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에 기초한 운율, 이른바 민요조의 가락에 얹혀 있”다. 채호석은 양성우의 시가 갖고 있는 운율을 ‘3음보의 율격을 바탕으로 한다’고 보고, “이 3음보는 자수율(字數律)로 따지면 소위 7·5조라는 것”이라고 평했다. 이에 대해 신경림도 <북치는 앉은뱅이>의 발문에서 “양성우의 경우, 이러한 단순성·단조성·반복성도 민요적인 가락과 일치할 때는 높은 예술성을 보이면서 넋두리의 차원을 멀리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둘째, 양성우의 초기 시들은 “민중적 현실을 다룸에 있어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암시적으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양성우의 시는 외견상으로는 민중시나 저항시로 분류되지만 그 저변을 흐르고 있는 것은 서정 혹은 서정시다. 양성우는 유려한 시적 수사나 은유를 추상적·암시적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직접적으로 민중이 겪고 있는 아픈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이 양성우의 초기 시들이 가지는 장점이고,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의 시가 가지는 현실이 서정을 이끈 것이다.

셋째, 위 두 번째 평가는 그의 대부분의 초기 시에 등장하는 ‘그대’ 또는 ‘임’의 대상 혹은 그 지향점이 구체적이고 뚜렷하다는 것과 관련된다. 이문구는 양성우의 최근 시에서 표현되고 있는 ‘그대’나 ‘먼 곳에 있는 이’의 모호성에 대해 비판한다. 하지만 이에 반해 양성우의 초기 시에 대한 신경림의 평가는 전적으로 다르다.

신경림은 “양성우의 시(<북치는 앉은뱅이>) 거의 전부에 나오는 그대 또는 임이란 누구를 또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대를 어떤 특정인으로 한정 해석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며, 그의 시에 있어 그대나 임은 당연히 이 모든 것, 즉 자유며 민주주의며 새 세상이며 이를 위해 투쟁하는 민중 전체를 총칭하는 것으로 해석됨이 마땅할 것이다.”

신경림이 말한 대로 양성우 자신도 일생을 통해 ‘자유’를 추구한 것은 분명하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쓴 ‘여의도생활 4년의 고백’을 담은 일종의 정치일기 <박수 부대와 빈대떡 신사>에서 양성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유인이다. 그동안 나는 자유인이기를 원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자유롭고, 앞으로도 자유로울 것이다. 이제 나를 구속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작고 하찮은 일상의 조건들을 제외하고는, 나를 구속하려드는 것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아무도 나를 간섭할 수 없고, 나 역시 남들을 간섭할 필요도 없어졌으며,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허리 굽혀 굽신거릴 필요도 없어졌다. 나는 드디어 자유인이 되었다.”

그의 바람대로 양성우는 ‘자유인’이 되었을까? 양성우는 ‘정치인’(국회의원)인 자신을 ‘빈대떡신사’로, 또 국회를 ‘비단옷 입고 밤길 걷기’로 표현한다. 그는 지금 ‘박수부대’를 떠나 자신이 원하는 ‘자유인’의 삶을 살고 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혹은 불행하게도) ‘시인’ 양성우는 ‘정치인’ 양성우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듯하다.

그의 최근작 시집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에 실린 거의 모든 시에는 양성우 자신과 그의 과거와 현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해소되지 않은 채 ‘그리움’으로 포장되어 나타나 있다. 과연 무엇이 “나는 이 시대의 모든 시들이 ‘먹의 글’이 아니라 ‘피의 노래’이기를 고집한다”던 시인 양성우를 이토록 피폐하게 만들었는가? 나는 그가 ‘시인’으로서 그 자신만의 ‘변증법적 완성’을 이룩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서 다시 그가 “우리 ‘못난 것’들을 살리기 위하여 죽어간 이 시대의 ‘피의 사람들’에게 바치는 시를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양성우의 <노예수첩>을 마치고 다음에는 이산하시인의 <한라산>이 연재됩니다)

 

겨울공화국

(실천문학사, 1977, 106-111쪽)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가라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러쳐서 누군가의 발밑에 까무러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 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 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줄 것은 부끄러움뿐/ 잠든 아기의 베개 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 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 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락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 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도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 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 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약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채형복 교수는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 3대학에서 ‘유럽공동체법’을 전공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저승꽃>, <우리는 늘 혼자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