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 노모 위해 피란 포기하다 결국 희생

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10)

2016-09-05     신기철 소장

이하영(李夏永, 1902년생)은 국군 수복 후 1950년 10월27일 고향인 성주에서 경찰에게 연행된 후 선남면 선원리 낙동강변에서 학살당했다. 당시 선남면에서 강변으로 끌려가 함께 희생된 주민들은 모두 48명이었지만 다른 곳에서 끌려온 희생자까지 합치면 전체 희생자 수는 200여 명에 이른다.

둘째아들 이선근씨(1932년생)는 2013년 타계 직전 필자와 면담 녹취한 자료를 남겼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위령제를 둘러싼 군, 경찰의 방해 경험에 대한 증언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이 노인은 군에 입대한 후 아버지의 복수를 꿈 꿨지만 당시로서는 상대가 국가권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생업에서 은퇴할 때까지도 연좌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이선근씨의 회갑기념 회고록 <성산백의 후예들>에 수록된 이하영 선생의 사진.

한개마을에서 태어나다

이하영은 1902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서 태어났다. 사드(THAAD) 미사일이 배치되면 크게 피해를 볼 마을들 중 하나이다.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선생의 모친은 일본학교 다니면 왜놈 된다며 한학만 가르쳤다고 한다. 성산 이씨가 600여 년 동안 살아 온 한개마을은 봉건 전통을 강조하는 마을 분위기 때문에 진보적인 사상이나 이념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드물었고 이 때문인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주민들도 없었고 따라서 1950년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도 없었다고 한다.

항일운동자금을 대다

일제강점기 선산군 고아면 새올마을에서 1931년부터 술도가를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아들 이씨는 늦은 밤 양조장 뒷방에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을 여러 차례 본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온 집안에 비상이 걸렸고 자신도 낯선 이들이 오는 지 감시해야 했다고 한다. 항일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다녀갔던 것이다.

1938년 이하영은 만주의 광산개발에 투자한다며 양조장을 팔고 집도 구미면 원평리 각산마을로 이사했다. 당시 양조장 매각을 서두른 이유는 일본 경찰이 술도가에서 독립운동자금이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양조장을 처분한 돈은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외조부 의관 심경택의 부하들에게 제공되었다고 한다.

아들 이씨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13세인 1945년 3월 선반공 징용노무자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하던 공장이 미공군의 폭격을 당해 파괴되었고, 할 일이 없어지자 배를 타고 일본을 떠나 원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던 중 일본 근해에서 기뢰에 폭침을 당했는데 그때 문에 손을 끼여 크게 다쳤다. 최근 일제하 강제동원 조사위원회에서 조사한 뒤 부상당한 손 때문에 300만 원을 보상 받았다고 했다.

해방과 한개마을로 이사

아들 이씨가 시모노세키에서 귀국한 때는 1945년 9월 초였다. 귀국해 보니 구미에 살던 가족들은 비산동으로 이사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해방이 된 이듬해 봄 신설학교인 선산읍 오산중학교에 들어갔으며 3학년 때인 1948년 6월 교원검증시험을 쳐서 합격되었다. 불과 열 여섯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1948년 9월20일 대한민국 제1호로 교원 발령을 받았다고 했다. 이하영은 식솔들을 끌고 1950년 1월 고향인 한개마을로 돌아왔다. 당시 교사였던 아들 이 씨는 1950년 1월 전근을 왔다.

2대 국회의원 선거

성주지역의 초대 국회의원 이호석은 같은 집안사람으로 희생자보다 한 살 위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의원총람>에는 1911년생으로 적혀 있으나 <민국인사>의 나이로 보면 1900년생이었다. 아들 이씨에 따르면, 집안의 선산 자리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이호석은 국회의원의 권위를 이용해 헐값에 사려했고 희생자는 이에 굴하지 않아 사이가 나쁘게 되었다고 한다. 이호석은 만주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함께 친일행각을 했던 이화영을 월항지서장에, 친척 이동석을 부면장에 앉히는 등 나쁜 행동으로 여론이 나빠졌고 결국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호석의 재출마를 반대했다니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피난길은 끊어지고

전쟁이 나고 국군과 미군이 인민군의 남하를 막아내지 못하자 성주에서도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눈치 빠르게 재빨리 왜관 다리를 통해 낙동강을 건넜다. 우익계 인사들이 미리 피란하고 얼마 지난 뒤 성주에도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이미 낙동강 다리는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국민들 모르게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들이 피신하고 난 뒤 폭파된 한강 인도교와 같은 성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이하영은 모친이 연로했으므로 피난을 포기했다.

이후 인민군이 성주에 들어오던 모습은 아들 이씨가 직접 목격하고 겪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보다 빨치산 복장의 사람들이 먼저 성주에 들어왔다. 이씨는 큰형 이홍근과 사범학교 출신 이운영과 함께 마을에 진입하는 30여 명의 빨치산에게 끌려가 낙동강가까지 짐을 날라 주게 되었다. 이때 부녀자를 희롱했다며 강가에서 동료 하나를 즉결 처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인민의 이름으로 척결한다”면서 총을 쏜 뒤 근처에 매장했다.

인민위원회

한개마을 인민위원장은 한학자로 인품이 좋았던 이기동이었고 부위원장은 이태영이었다. 같은 집안으로 이들과 가까웠던 이하영은 농촌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교원이었던 아들 이씨는 민주청년동맹에 불려나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라며 노래 교육을 받았다. 이후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기의 폭격을 받아 학교가 크게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민군이 성주에 계속 진주하고 있었으니 가만히 있으면 폭격에 죽을 것 같고 숨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인민위원회에 비판당할 것 같았다고 한다. 할머니를 돌보는 문제도 있고 하여 일단 피신하기로 결정하고 한밤중에 할머니와 함께 외갓집으로 갔다.

이하영은 밤으로 모친에게 문안 인사를 자주 왔는데 이때 마을 인민위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아들과 상의했다. 리 인민위원회의 가장 큰 고민은 마을 청년들을 노무부대와 의용군으로 뽑아가는 문제였는데 그때마다 인민위원장은 인민군측과의 교섭을 이하영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하영은 인민군과 면 인민위원회 간부들에게 “노력동원할 인원도 부족한데 의용군으로 뽑아가면 무기와 탄약, 식량을 나르는 인력에 차질이 생길 것이므로 이곳에서는 의용군을 뽑지 말아 달라”고 설득했다.

큰아들 이홍근은 전쟁 초기 성주에 진입하던 빨치산에게 받은 증명서를 이용하여 마을에서 의용군으로 끌려간 주민을 돌아오게 했다. 그 대신 본인은 치안대에서 보초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국군 수복 후 치안대장이었다는 누명을 덮어쓰게 되었다. 치안대원으로서 병기창을 담당하던 큰아들은 삼륜차를 몰고 온 인민군 장교가 병기를 조사한다며 보관 중인 무기를 모두 내놓으라는 명령에 따라 의심 없이 내주었다. 하지만 인민군 장교는 오히려 병기 관리가 허술하다고 비판하며 무기를 모두 가지고 김천에 있는 사령부로 떠나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돌아온 치안대장이 이 사실을 알고 보초를 보던 두 사람을 총살시킨다고 난리가 났다. 찾아오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은 큰아들은 함께 보초를 섰던 사람과 함께 그길로 김천으로, 대구로 무기를 찾아 다녔다.

수복과 연행

국군 수복 직후부터 농촌위원장이었던 이하영을 모함하는 말들이 돌았다. 인민군이 성주를 점령하자 나서서 “저 집도 내 집이고, 이 집도 내 집이다”라고 했다면서 모함하자 이하영의 처는 쏟아지는 소나기는 피하자며 당분간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완고했던 이하영은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이 있다고 피신하느냐?”고 반문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피난지에서 복귀한 성주경찰서 월항지서는 이하영을 끌어가 아들들의 행방을 추궁했다. 당시 큰아들은 대구에 있었고, 둘째아들은 외가에 있었으므로 아버지가 끌려간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희생자의 처가 친정에 있던 아들 이씨에게 찾아와 이하영이 끌려간 사실과 월항지서에서 아들들의 행방을 추궁하면서 아들이 와야 풀어준다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이 말을 들은 둘째아들은 일단 아버지를 꺼내고 봐야한다고 생각하고 월항지서를 찾아 갔다.

지서장 이화영은 둘째아들을 보자마자 “빨갱이새끼”라며 빰을 때리고 이어 옆에 세워두었던 목총으로 마구 때렸다. 몸보다도 총의 목이 매를 못 견디고 먼저 부러졌다. 지서장은 다른 목총으로 더 심하게 온몸을 때렸다. 인민군 점령시 했던 일을 말하라면서 때렸고 “뭘 했겠습니까? 애들 노래 가르치다가 학교가 폭격에 부서져서 더 이상 학생을 못 가르쳤습니다” 그랬다. 지서장은 “이 새끼 또 대들어?” 그러면서 계속 때렸다. 아들은 이때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던 지서장의 매질로 허리를 심하게 다친 아들은 월항지서의 임시유치장으로 쓰였던 망루대로 끌려갔다. 지서의 망루대는 외부의 공격을 감시하는 곳으로 높은 망루가 설치되어 있었고 밑으로 넓은 방이 있었다. 월항지서는 이곳을 임시유치장으로 쓰고 있었다. 모진 고문을 받은 아들 이씨는 질질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망루에는 이미 20여 명이 갇혀 있었다. 먼저 잡혀간 아버지를 여기에서 만났다. 이하영은 고문당한 아들이 안타까워 붙들고 울었다.

다음 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망루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하영은 아들에게 한약을 사와 다려주었으나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아들은 학교에 다시 나가야 했다. 아픈 몸도 문제였지만 그대로 있으면 더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단 대구로 피신 나가기로 했다.

병을 핑계로 대구로 피한 뒤 영국군 사령부에 노무자로 취직했고 대구에서 만난 큰형도 같은 곳에 취직했다. 둘째아들은 보름 만에 징집영장을 받고 국민방위군 부대로 입대했다가 제1훈련소를 거쳐 원주에 있던 국군 7사단 8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큰아들은 영국군 식당에서 일하던 중 화상을 당해 3년 가까이 치료를 받았다.

다시 연행 그리고 학살

망루에서 풀려나온 이하영은 10월27일 낮 마을 동산에서 밭을 개간하던 중 경찰들에 의해 다시 끌려갔다. 집에 들려 옷을 갈아입고 월항지서 망루대 아래 유치장에 다시 갇혔다. 이날도 망루대 유치장에는 수십 명이 있었으며, 그날 밤 한 사람씩 불려 나가 줄줄이 묶여 두 대의 트럭에 실렸다.

희생자들이 선남면 선원리 날미 강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이들을 매장하기 위해 긴 고랑이 파여 있었다. 설마 죽일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희생자들은 이를 보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으며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발굴 당시 시신의 상태로 보아 밀밭가 고랑에 꿇어앉히고 머리위에서 총을 쏘았다. 강변 학살의 지휘는 성주경찰서 사찰계 형사 정씨가 했다고 한다. 총살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은 깊이 묻히지 않았으므로 바람에 모래가 날리자 노출되었고 들개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이날 월항면에서만 48명이 희생되었는데 시신 발굴 당시 목격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을 포함하여 같은 곳에서 희생된 성주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200여 명에 이르렀다. 희생자들은 성주경찰서 유치장이나 초전지서 등 각 지서에 잡혔던 주민들이었고 따라서 10월 27일 외에도 또 다른 학살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월항지서가 희생자들을 끌고 나가는 모습은 인민군 점령기 성주군 인민위원장이었던 같은 마을 이운영이 모두 목격했다. 학살 현장까지 끌려가진 않았지만 그날 망루 안에 함께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월항지서 망루유치장에 갇혔던 주민들 중 죽일 사람들의 명단을 부른 사람은 성주경찰서 사찰계 정○섭 형사, 경찰 이○대, 초대 국회의원 이호석이었다.

시신의 발견

한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던 1951년 2월 성주군 학살지 곳곳을 찾아다니던 희생자의 처는 긴 시간의 수소문 끝에 발견한 강변 밀밭고랑에서 거뭇거뭇한 머리카락과 넥타이, 옷이 어린 밀잎과 함께 눈 섞인 모래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시신을 차례로 발굴해 확인하고 다시 그 자리에 묻으면서 시신을 찾아 나갔다. 두 손을 앞으로 묶은 뒤 허리를 돌려 묶고 또 그 뒤 사람의 손을 엮어서 다시 묶은 시신들이 줄줄이 나왔다. 100여 구가 넘는 시신들을 확인했지만 어느 시신이 이하영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낙심하고 포기하면서 “보이소, 나와 천생연분이거든 무슨 증표를 보여주이소”하며 중얼거리는 순간 모래바람이 휙 불면서 한 뼘 크기의 헝겊이 펄럭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하영이 입고 있던 두루마기의 옷고름이었다.

얼굴은 이미 백골이 되었으므로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두루마기와 조끼, 바지저고리는 희생자의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조끼 속에서 회중시계도 나왔다. 양조장 시절부터 희생자가 간직하던 시계였다. 발굴된 유골은 수습되어 한개마을 선산에 안장되었다.

▲ 선남면 선원리 날미강변. 2011년 5월13일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 강변이 파헤쳐지고 있었다.

복수는 하늘이 하고 세월이 한다

아들 이씨는 군에 있는 동안 부친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암호처럼 적혀 있는 형의 편지를 받았다. 병기과에서 서무일을 보면서 부친의 복수를 위해 M2 칼빈 자동소총 한 자루를 분해해 숨겼으며 수류탄도 준비했다.

둘째아들은 상이군인으로 만 1년2개월의 군생활 마치고 1951년 11월 제대하자 숨겨둔 무기를 들고 나와 동생과 함께 부친을 죽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를 준비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들켰다. 이하영의 처는 “나는 너희들을 지키고 기둥 잃은 이 집안을 되세우기 위해 온갖 수모와 곤욕을 다 견디며 살아왔다. 이 짓이 웬일이냐? 복수는 하늘이 하고 세월이 한다. 꼭 하려면 나부터 쏘아라”고 했다. 완강한 만류에 복수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들들은 이후에도 이때 복수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생각할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고 한다.

살 길 찾자

이하영의 희생 당시 성주 농고 2학년 학생이었던 셋째 이삼근은 미군부대 병원에 하우스보이로 취업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부친의 복수에 실패하자 좌절한 동생은 둘째형이 갖고 온 군복을 그대로 입고 미군의 501노무(지게)부대에 입대했다.

미군 노무부대의 일은 탄약을 전선까지 운반하는 것이어서 매우 위험했다.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지원했던 모양인데 하루는 인민군의 포격을 받아 미군들과 함께 참호에 매몰되는 일을 겪었다. 미군들은 모두 죽었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이 일을 겪은 뒤 전선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 중학교 수학 선생을 했으며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 야간을 졸업한 뒤 경상북도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말대로 복수는 하늘이 하는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4.19혁명과 유족회활동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5월31일 모친을 비롯해 홍근, 선근, 삼근 삼형제가 이하영을 비롯해 함께 희생당한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에 몰두했다. 큰아들 이홍근은 대구·경북피학살자유족회 부회장이었고(회장은 대구사범학교 출신 한의사 이원식이었다), 셋째아들 이삼근은 전국피학살자유족회의 사정위원이었다.

희생자의 처는 유족회 조직을 위해 성주군과 경북 곳곳을 뛰어다녔다. 결과 6월7일 80여 명의 유족들이 모여 첫 위령제를 치를 수 있었다. 위령제를 마친 유족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시작하려 했으나 계엄군의 방해로 더 이상 행사를 계속할 수 없었다.

아들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경북도청 건설과 기사로서 의성에 출장 가있는 동안 성주에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유족대회가 열렸지만 계엄군의 방해로 행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본인이 사회를 보는 동안 동생 삼근이 계엄군의 방해를 물리치는 유족들을 이끌었다고 한다.

유족대회 후 출장지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을 정상적으로 마치고 경상북도로 돌아갔다. 그런데 유족대회 때문이었는지 도경찰국에서 불러 감찰계장의 조사를 받았다. 질문 내용은 집회에서 사회를 본 사실과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의 내용이었다.

▲ 1960년 7월28일 대구역 광장. 경북지구피학살자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출처, <가려진 역사 밝혀낸 진실>]

5·16쿠데타로 유족회 활동이 반국가행위가 되다

대구경찰국에서 무사히 풀려났지만 며칠 지나지 않은 1961년 6월 계엄군이 출장지인 문경 산양면까지 잡으러 왔다. 아들 이씨는 끌려가던 중 탈출했고 한 달 가까이 피신생활을 했으나 계엄군이 쫓아다니는 상황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경상북도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사표를 내고 미군부대에 취업했다.

첫째 이홍근은 유족회 간부들이 구속당하기 시작하자 “동지들이 잡혀가는데 나 혼자만 살겠다고 어찌 피하겠느냐”고 했지만 가족들의 만류로 도피생활을 했다. 1962년 자수했다.

셋째 이삼근은 4.19혁명 때 감포에서 교원을 하고 있었다. 이씨와 같은 시기에 경주경찰서에 잡혀갔지만 도중인 토함산 고개에서 탈출했다가 다시 잡혔다. 5.16쿠데타 군검찰은 동생에게 사형을 구형했으며 선고결과는 15년 형이었다. 감형을 받았지만 무려 7년 반 동안 감옥생활을 한 뒤 석방되었다. 당시 유족들이 당한 고통은 감옥살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고문을 당하다 사망한 경우도 있었고, 옥사당한 경우도 있었다. 사월혁명연구소가 인터뷰했던 이복영, 한원석에 따르면, 경북유족회 신석균이 간첩조작 고문으로 사망했으며 동래유족회 문태환은 복역 중 사망했다. 또 다시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 때 아들 이선근은 건설부 장관으로 추천을 받아 신원조회를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6.25때 부 이하영은 인민위원장으로 활약했으므로 처형되었고 장남 이홍근과 차남 이선근, 삼남 이삼근은 치안대장으로 악질 부역하였다”라고 적혀있었다. 처형이라는 용어는 마치 합법적 절차에 의해 처리한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이는 명백한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를 가장 잘 아는 정부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민간인학살의 합리화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하영이 인민위원장을, 아들들이 치안대장을 했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 4.19혁명 후 유족회활동을 폄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죽음의 진실규명에 그치다

성주군 인민위원장이었던 이운영은 살아남았다. 인물이 좋았고 집안이 든든했다고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월항지서장의 사위감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집안 모임이 있을 때마다 이하영이 아무런 부역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이 되어서야 이하영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환갑을 맞은 아들 이선근이 “어두운 시대의 청산사업이 이루어질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고 적은 때가 1992년이었으니 20년이 다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는다. 이하영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시대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손상된 명예도, 상처받은 영혼도.

 

*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은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를 다닌 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과 고양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또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등 제노사이드의 공통점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멈춘시간 1950>, <전쟁범죄>,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