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문·조작사건 영역 2 - 서재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에서 공개한 반헌법행위 각 영역별 사건과 내용, 반헌법행위자 선정기준 및 이유를 담은 자료 중 세 번째 영역인 '고문조작사건영역'을 나눠 싣는다. 집중 검토 대상자는 ‘반론권과 인격권을 보장하고 열전이 보다 공정하게 제작될 수 있도록 이의신청을 접수’한다는 열전편찬위의 방침을 존중해 공개하지 않는다.[편집자] 

4) 1차 집중검토 대상 반헌법 사건

2016년 1차 집중검토 대상사건은 김구 암살사건, 1차 인혁당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녹화사업, 송씨일가 간첩단사건, 김근태 고문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사건입니다. 이들 사건의 개요는 아래와 같습니다.

 

<김구 암살사건>

▲ 김구선생 [사진 출처 : 나무위키]

1949년 6월26일 백범 김구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사건. 1945년 8월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1947년 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26일 김구는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달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1949년 6월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 6월20일에서 25일까지 김약수 국회부의장, 노일환 의원 등 소두 7명의 소장파의원들에 대한 체포로 시작된 국회프락치사건에 뒤이은 김구 살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났다고 볼 수 없는 아주 긴밀히 연관된 사건이었다.

7월2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안두희도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오랜 시간에 흘러 1993년 국회는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약 2년 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 를 작성하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 김구 선생 장례행렬 [사진 출처 : 구글]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까지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도 평가된다.

▲ 암살 배후였던 이승만과 김구 선생 [사진 출처 : 구글]

 

<1차 인혁당사건>

인민혁명당 사건은 1964년 8월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수배 중에 있다’고 언론에 발표한 사건이다.

▲ 1차 인혁당사건 [사진 출처 : 구글]

그런데 당시 ‘인민혁명당사건’을 담당한 공안부 검사 3인(이용훈, 김병리, 장원찬)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기소할 수 없다고 서명을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사건담당 공안검사들이 기소를 거부하자 당시 신직수 검찰총장과 서주연 서울지검 검사장은 당직검사 정명래로 하여금 기소케 하였다.

같은 해 9월12일 한국인권옹호협회장 박한상의원이 ‘인민혁명당사건’으로 기소된 도예종 등 26명의 피고인 대부분이 중앙정보부(이용택 5국 대공과장)에서 ‘발가벗긴 채 물과 전기로 참을 수 없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고문 사실을 폭로하였다.

담당검사의 기소 거부(사표)와 고문사실의 폭로 등으로 궁지에 몰린 중앙정보부․검찰 지휘부는 1964년 10월 기소한 26명 중 14명에 대하여 공소를 취하하고 석방하였으며, 그 나머지 12명과 추가로 구속한 양춘우 등 13명에 대해서만 공소장 죄목을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변경하여 기소하였다.

▲ 1차 인혁당사건 공소취하기사 (사진 출처 : 구글)

1965년 1월20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도예종․양춘우 피고에게 ‘반공법’ 제4조 제1항(고무 찬양)을 적용, 3년․2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고, 나머지 11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한옥신 검사는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29일 2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 도예종에게 징역 3년, 양춘우, 박현채, 정도영, 김영광, 김한덕, 박중기에게 징역 1년, 김금수, 이재문, 임창순, 김병태, 김경희, 전무배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하였다. 같은 해 9월 21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005년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가혹행위와 사건의 조작사실 등을 밝혔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수사과정에서 범한 불법구금, 가혹행위, 사건조작에 대하여 사과하고 재심을 권고하였다.

결국 위 두 기관의 조사결과를 인정하여 2013년 서울고등법원의 재심과 2015년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고, 고문조작 사실이 확인되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 납치에서 풀려난 후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구글]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에게 석패하였다. 대통령 선거 전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일련의 사건 사고(사제폭발물,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의 치료차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하고, 1972년 10월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며칠 뒤인 17일 비상계엄령과 동시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으로 망명을 택한다. 1973년 7월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도쿄에서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며칠 앞둔 1973년 8월8일,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팔레스호텔로 간 김대중은 중정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주일공사 김기완은 주일 대사관 일등 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던 중정요원 김동운에게 공작 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김동운의 계획안을 접수한 차장보 이철희와 해외공작국장 하태준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과 함께 계획을 검토했다. 김대중을 납치한 사람들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 주일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일등서기관 홍성채․김동운, 이등서기관 유영복․유충국 등이고 일등서기관 한춘은 현지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납치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육안으로 봐도 뚜렷이 보이는 지문을 남겨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 (사진 출처 : 구글)

이후 선박 용금호에 감금된 채 동해로 강제 압송되었다가, 129시간 만에 8월13일 서울의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청은 납치현장에서 주일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의 신분으로 일본에 머물던 김동운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증거를 확보하여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관련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관련자 출두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에 의한 일본 주권의 침해라는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사건 발생 석 달 후인 11월2일 김종필 총리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유감의 뜻을 담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다나카 일본수상에게 전달하였고, 다나카 수상 역시 납치사건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답신을 전달하였다.

양국 정부 모두 김대중 납치사건을 둘러싼 진상을 은폐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일관계의 갈등 역시 봉합되었다. 그 이후 사건의 배후와 과정은 명확히 밝혀지지 못하다가, 2007년 국정원과거사위의 조사결과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시 아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다음에 계속)

* 당초 고문조작사건을 2회로 나눠 연재하려 했으나 사건의 수가 많아 3회로 연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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