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8)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사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좌익 척결은 실제 1950년 8월이면 모두 마친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만으로도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다. 그럼에도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다시 처단 대상 55만 명을 만들어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실상을 추적해 본다.[편집자]

▲ 일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항일운동가 어수갑 선생. 일제는 1928년

(소화 3년) 2월16일 찍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김포의 저명한 항일운동가 어수갑(魚秀甲. 1896년생)은 국군 수복 후 학살을 피해 하성면에서 고양지역으로 왔으나 고양경찰서에 체포되어 1950년 10월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아직도 선생의 삶은 복원되지 않았으며 항일운동가로서 명예도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김포 하성면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어수갑은 1896년 김포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룡(成龍), 호는 석강(石江), 본관은 함종(咸從)이었다. 힘 있는 가문에다 부유한 환경이었으므로 어린 시절부터 일찍이 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하성면 석탄리는 어씨 집성촌으로 고양 벽제면 성석리 어씨 집성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1908년 서울에 있는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중퇴했으며, 1909년 4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휘문의숙 예비과에서 공부했다. 1911년 4월부터 1913년 3월까지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한 뒤 같은 해 4월 경성전수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졸업했다. 그 뒤 포천 청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15년 3월 그만두었다. 1916년 5월부터 7월까지 철원 사립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조카 어후경씨는 어수갑이 학교 졸업 후 중앙학교 동창 홍남표와 함께 강원도 원주군 문막에 있는 노림의숙에서 교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노림의숙이 도립학교로 승격되고 제1회 졸업식이 열리던 1919년 졸업생 40명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지도했다고 한다.

일제가 3.1운동을 학살로 대응하자 이를 피해 1919년 6월 중국 북경으로 피신하여 준문(准文)학교에 입학했다.

태평양회의서 독립 호소하려다 일제 경찰에 잡히다

어수갑은 중국에 있는 동안 북경과 북간도 등 여러 곳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던 중 1921년 7월 북경에서 이회영을 만났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어수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북경에 살던 집에는 김규식, 신채호, 김창숙, 안창호를 비롯하여 홍남표, 유석현, 어수갑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며 조국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실천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1년 말 태평양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회의의 목적이야 승전국들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재편이었지만 식민지 독립운동세력으로서는 다시 한 번 강대국에게 독립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러시아혁명의 성공에 고무된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 창건을 위해 국내로 활동무대를 옮길 때였다.

이회영과 어수갑 두 사람은 태평양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에 뜻을 함께 했다고 한다. 어수갑은 이 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8월16일 서울에 잠입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1922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감옥생활을 했다.

당시 ‘대정10 형공제 1078호’ 판결문과 1921년 10월21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회영의 지시를 받은 어수갑은 태평양회의에 참가하여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하려는 목적과 자금조달 방법 등을 상의하기 위해 김환규, 노동공제회 간부 조정환, 홍증식, 중앙기독청년회 고문 이상재, 조선연합청년회 위원장 오상근을 만났다. 이들에게 태평양회의 참가를 위한 자금 모집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한 뒤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중 종로경찰서에 체포된 것이라 한다. 체포당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는다.

1921년 11월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판결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22년 2월27일 경성복심법원 심판부에서 열린 2심 판결은 기각되었다. 형량이 1년이었으므로 1922년 말에는 출옥했을 것으로 보인다.

큰사위 조씨는 어수갑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에 들어오면 하성면 고향에서 숨어 지냈다고 했다. 밤에만 오는데 서울에 가지 않을 때는 콩밭 속이나 마루 밑 구멍에서 숨어 있었다. 그렇게 2년에 한 번씩 집에 왔으므로 자식들이 2년 터울이 되었다고 한다.

언론인 활동

출옥 후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시대일보는 1924년 최남선을 주간으로 창간되었지만 1926년 재정난으로 중외일보에 흡수되었다. 일제의 언론, 출판, 집회 탄압이 심해지던 1924년 6월9일 이를 비판하는 ‘언론집회압박 탄핵회’가 조선교육협회에서 출범했다. 여기에 시대일보 등 31개의 단체가 참가했다.

1924년 2월18일과 25일 <동아일보>에 ‘일부일처제의 역사’를 연재했다. 원시인류의 남녀관계에서 시작하여 동족 가족, 푸나루아 가족, 대우 가족, 부장 가족, 일부일처제로 발전하는 가족의 역사를 설명하였다. 그 시대의 표현을 오늘날의 것으로 약간 손보아 일부를 소개한다.

……(전략) 오늘날 문명국의 사회에서는 부권을 기초로 한 일부일처의 결혼제도가 남녀관계의 기초가 되고 그 외에 도덕과 습관이 가장되어 있다. 그리하여 과학적 정신이 결핍하고 편견과 인습으로 두뇌를 무장한 사람 중에는 일부일처가 흡사히 하늘이 정한 신성한 남녀관계로 사고하여 그를 기준으로서 고대사회의 남녀관계를 규정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최근 과학연구의 결과 남녀관계는 사회조직과 함께 변화되며 따라서 일정한 남녀관계를 표현한 성도덕 역시 남녀관계의 변화와 함께 변화된다. 그리고 오늘날의 일부일처의 남녀관계는 장기간의 남녀관계가 진화한 결과이며 또 진화의 일단계에 불과한 사실이 판명되었다. 오늘날의 이 단계까지 도달함에는 잡혼시대, 군혼시대, 근친결혼시대, 일부다처시대 등 다수한 계단이 가로 놓인 것은 인류의 고고적 연구와 현존하는 미개인의 습관연구의 결과로 지금에는 변통치 못할 확설이 되었다. (후략)…… (<동아일보> 1924. 2.18)

6·10만세운동과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17일 아서원에서 일제타도와 조선독립을 목표로 조직되었다. 어수갑은 기자로 활동을 하던 중 1924년 화요회에 가입했으며, 1926년 3월 초 홍남표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에서 화요회를 담당하는 제1구 제7야체이카 책임자로서 언론기관 프락션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3월27일 강달영, 이봉수, 홍남표, 김철수, 이준태 등 5인이 제1회 집회를 열었으며, 1926년 4월25일 순종이 죽고 인산일이 6월10일로 정해지자 국장일을 기점으로 6.10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당일 살포할 전단 5만 매를 인쇄한 사실이 발각되어 6월4일 권오설이 체포되었고, 7월17일 책임비서 강달영이 체포되면서 어수갑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100여명이 검거되었다. 이를 ‘조선공산당사건’으로 부른다. 시대일보사에서는 어수갑 외에도 구창회, 유연하, 구연흠이 체포되었다.

1928년 2월13일 경성지방법원 형사부는 어수갑에 대해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며 징역 2년을 선고하면서 미결구류일수 150일을 산입했다. 재판 전 1년8개월, 재판 후 1년7개월 갇혀 있었으니 이 사건만으로 3년3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식민지 재판부는 이 사건에 대해 ‘일종의 공산주의 운동으로서 조선민족해방의 관념에 공산주의 사상을 섞었다’고 표현함으로서 항일독립운동의 성격을 가진 공산주의운동으로 설명했다.

출옥한 후 고향인 김포군 하성면으로 돌아와 농민의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힘썼다고 한다. 1935년 5월25일자 <동아일보>에는 하성면에서 어수갑이 면협의원으로 당선된 사실을 보도하였으며, 1937년 12월8일자 <동아일보>는 온후독실(溫厚篤實, 온화하고 착실함)한 신사인 면협의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 어수갑 선생의 근황을 소개하고 있는 1937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캡쳐.

해방과 민주주의 민족전선 활동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31일 어수갑을 김포군 초대 하성면장에 임명했다. 어수갑은 면장일을 하면서 11월에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김포군 대표로 참석했다고 한다. 1946년 2월25일 하성면장에서 사직했는데 이는 다음 날인 2월26일 민주주의민족전선 경기지부 서기부장으로 추천된 사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경기 민전 의장은 홍면옥, 박형병이었다.

1947년 3월8일자 <경향신문>은 3월7일 열린 경기도 민전 제2차 대회가 어수갑의 사회로 천도교 강당에서 열렸다고 보도했다. 애국열사들에 대한 묵념 후 270명의 대의원 중 227명이 참석했다는 성원 보고가 있었고, 이어 의장 박형병의 개회사, 민전의장 홍남표와 조선민족혁명당 윤증우, 여성동맹 김암호 등의 축사가 있었다. 본 안건으로 들어간 참석자들은 임시집행부로 박형병 외 4명을 선출했으며, 사회자가 발표한 사업보고를 듣고 심의했다.

1948년 4월에는 북한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김포대표로 참가했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어수갑은 해방 후에도 감옥살이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서울 창천동에 살던 조카 어씨는 삼촌을 면회하려던 부친을 따라 서대문형무소에 찾아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수갑은 1950년 전쟁 발발 직전에 석방되었다고 한다.

전쟁과 수복, 그리고 학살

6월25일 전쟁이 났을 때 어수갑은 고향인 하성면에 있었다고 한다. 국민보도연맹사건 등으로 후퇴하던 군이나 경찰에게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인민군 점령기에도 특별한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큰사위 조씨는 인민군 점령 초기 김포군 임시인민위원장을 맡았지만 일주일 뒤 북에서 내정한 사람에게 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포는 인천으로 상륙한 미 해병대에 의해 9월20일경 수복되었는데 이후 수복한 국군 해병대가 부역자라며 주민들을 잡아갔으니 어수갑은 바로 피신해야 했다. 김포에서는 이후 1.4후퇴 직전까지 600명 이상의 주민들이 고촌면 천등고개, 김포면 여우재, 양동면 마곡리 한강변, 양촌면 지서 뒷산, 하성면 태산골짜기 등에서 학살당했다.

큰사위 조씨에 따르면, 아들 어대경이 원효로에 살았는데 미군정에서 농지과장을 하다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전향자라고 잡아가 이북으로 납치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 리 없던 어수갑이 서울에 있던 아들 집으로 피신 왔던 것이라고 한다.

막상 도착하였을 때 아들이 없었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으므로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잠을 자던 중 치안대에 발각되어 포위를 당했으나 이를 미리 눈치 채고 뒷담을 너머 도망쳤다. 조씨는 어수갑이 이후 어디로 도망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어느 날 고양 어씨네 친족인 어한으로부터 장인이 일산 무슨 굴에서 총살당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일산에 있는 굴이었다면 예나 지금이나 금정굴 외에는 없었다.

조카 어후경은 어수갑이 1954년 12월19일 일산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고양 성석리 어씨 집안 목격자들은 어수갑이 서울을 거쳐 성석리로 피신 왔으나 집안에서 숨겨줄 수 없다고 하자 다시 서울로 향하던 중 치안대에 체포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금정굴사건 관련한 ‘형사사건기록’에는 고양경찰서 부임 전 김포경찰서 서장이었던 이무영 경감이 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23일 또는 25일 자기 가족의 원수라면서 김포 출신인 좌익을 직접 자기 권총으로 금정굴에서 살해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 최씨는 10월23일경 밤 12시30분 이북의 예심판사, 전남 민청 선전부장, 인민위원장을 비롯해 김포 보도연맹 간사장 등 모두 5명을 금정굴에서 총살했다고 진술했다. 한편 의용경찰대원 강씨는 “10월25일 20명을 즉결할 때에는 서장 이무영 경감이 직접 그 중 2명을 총살했는데 그 피살자는 동 서장 식구들을 죽이고 집을 점거하고 있던 자라고 하였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의용경찰대원이 말하는 김포의 보도연맹원 간사장 또는 전 김포경찰서장이었던 이무영의 비난 대상이 될 인사로 어수갑 외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상을 정리하면, 어수갑은 서울 아들집에서 탈출하여 고양의 어씨 집성촌으로 왔다가 고양경찰서로 연행되어 10월23일 또는 25일 금정굴에서 희생당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후

어수갑이 서울과 고양으로 피신 생활을 하던 중 김포 하성면에 남아 있던 가족들의 고통도 계속되었다. 처 심씨는 치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집안 살림살이는 물론 집 뒤의 소나무까지 다 베어가는 횡포를 겪었다.

당시 치안대원이었던 이재구씨는 처 심씨가 매일 하성지서에 와서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니냐”고 따졌던 것을 기억했다. 심씨가 남달리 괴벽스러웠다고 묘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가족과 집안을 지키기 위한, 살아 남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큰사위 조씨는 군 장교 생활 중 장인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들보만 한 아름 두께였던 한옥 집은 하성면 청년단장이 점령하고 있었고 장모는 문칸방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장모의 얼굴에는 얻어맞아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어 가슴 아팠던 기억이 있다고 회고했다.

어수갑은 애국지사이며 독립투사이다

어수갑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되는 것을 피해왔던 가족들은 이제 항일운동가로서, 민주주의자로서 명예가 회복되길 바라고 있다. 어후경씨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치하는 것, 민족주의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 어수갑의 정신을 잇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석강은 우리 민족사에서 애국지사이며 독립투사, 민족주의 사상가”라고 했다. 어수갑은 한 평생을 항일운동과 민족의 독립에 바친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제라도 그가 이루고자했던 항일운동의 정신을 인정해야 하고 역사 속 그의 위치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은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를 다닌 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과 고양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또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등 제노사이드의 공통점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멈춘시간 1950>, <전쟁범죄>,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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