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마지막편
국가와 도시를 경영하는데서 가장 중점을 둬야할 분야는 바로 인재양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기관의 설치이다. 모든 생각과 훌륭한 계획과 기획은 사람이 하는 것이며 그것을 완성하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알파고 시대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인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진리는 절대 불변이다.
정조의 치적 가운데서 가장 먼저 뽑아야 할 것은 규장각의 설치이다. 정조는 1776년 3월10일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규장각 설치를 명하여 9월25일 창덕궁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규장각은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해갔다. 더 나아가 과거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특히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매월 두 차례씩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따라서 학문의 진작은 물론 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조의 친위세력 확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얼 출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이 검서관으로 등용이 되어 북학과 다양한 선진 과학 문물을 탐구하였다. 이들과 교유한 실학자 이서구가 있었고 다산 정약용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청나라 서적을 참고하여 화성 건설의 기본 설계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특히 정조는 즉위하면서 외국 서적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부국강병과 인문학 진흥을 위해서는 선진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경에 사신으로 간 이은(李溵), 서호수(徐浩修) 등이 정조의 명령에 따라 1977년 2월24일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찾아냈는데 모두 5020권에 502상자였다. 그 값으로 은자(銀子) 2150냥을 지급하고 한양으로 수레에 실어 운반하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의 장서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포함하여 약 8만여 권을 헤아렸다. 다산 정약용은 <고금도서집성> 책에 실린 16세기 유럽에서 고안된 ‘기묘한 기계’들의 제작법 및 작동 원리를 다룬 책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고안해낸 것이다.
자연친화적 자연개조사업
예로부터 치산치수는 천하지대본이며 치산치수를 잘해야 나라가 융성한다. 산과 강하천을 잘 다스려야 홍수피해와 가뭄피해를 막고 자연환경을 잘 보호할 수 있으며 국토를 더욱 아름답게 꾸려 후대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
따라서 산림을 적극 보호하고 조성하는 것은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서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을 잘 꾸리며 나라의 면모를 아름답게 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정조는 화성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성곽 축조는 물론 광교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을 이용하여 농업생산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먼저 만석거는 1795년 3월1일 둑을 쌓기 시작하여 5월18일 완성되었다. 이 지역은 소금기가 있는 땅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황량한 곳이었다. 마침내 진목정 아래에서 시내를 잘라 방죽을 쌓고 물을 채워 갑문(閘門)을 설치하여 물을 대기 이롭게 하였다.
관개할 때에는 널판을 열고 물을 내보낼 때 그 많고 적음을 적당히 하였다. 그 아래에 이익을 받는 논은 모두 고등말 북쪽 벌판이고 장안문 밖에서부터 새로 개간한 곳을 다함께 대유평(大有坪)이라 하였다.
만석거[萬石渠] 남쪽 언덕 위에 정자 하나를 세웠는데 맑고 깨끗한 물을 내려다보고 기름진 들판을 바라볼 수 있으니 이 정자에 올라가 바라보는 경치는 호남을 뒤흔들 만하였다. 1796년 봄에 정조가 명령을 내려 그 정자를 영화정(迎華亭)이라 하고 수원부 유수 조심태가 쓴 편액을 걸었다.
1795년 우리나라 전역에 왕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쳤지만 수원의 만석거를 이용한 대유둔 벌판은 풍년의 기쁨을 만끽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정조는 안녕리에 만년제를, 화성 서쪽에 축만제를 건설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화성 서쪽에 기왕의 만석거보다 3배 정도 큰 축만제가 건설되었다. 축만제는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1799년(정조 23) 내탕금(內帑金) 3만 냥을 들여 축만제둔(祝萬堤屯)의 관개시설로 만들어졌고 수문 2곳을 갖추었다.
몽리 면적은 232석락으로 화성 주변의 인공 저수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뒤이어 축조된 축만제는 천년 만년 만석(萬石)의 생산을 축원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명 서호(西湖)로 불리고 있으며 저수지 한복판에는 인공섬을 만들어 화목을 심고 가꾸어 해질녘 낙조 드리운 서호 ‘서호낙조(西湖落照)’의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현재 서호는 상당 부분이 매립되었으며, 그 주변은 공원으로 개발되었다.
이 서호의 물을 이용하여 서둔(西屯)을 경영하였는데 서둔은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후 수원을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자립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해 운영한 국영농장이었다. 정조는 새도시 수원을 자립 도시로 육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썼다.
특히 화성을 유지하고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의 재원(財源)을 마련하기 위하여 둔전을 운영한 것이다. 수원의 농업 도시의 전통은 이처럼 22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상업과 교통의 중심도시
도시가 부흥하려면 교통이 편리하여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지역에서 많은 물산이 모여들어 상업의 발달로 이어져 사람들이 웅성거리게 된다. 정조가 수원신도시를 반계 유형원이 지적한대로 넓고 평평하고 교통이 편리한 팔달산 동쪽에 자리 잡은 이유도 바로 실학정신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또한 수원으로 오는 행차길을 힘들게 남태령을 넘게 되는 과천로를 버리고 시흥로를 택한 것도 바로 평평하고 이동의 편리성을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 회갑연이 열리는 1795년부터 시흥을 통해 신작로가 건설되어 '1번 국도‘의 원형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정조는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는데 수원부사 조심태는 새 고을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해 본고장 백성들 중에서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이자(利子)가 없는 돈 6만 냥을 떼어내 고을 안에서 부자라고 이름난 사람 중에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 나눠주어 해마다 그 이익 나는 것을 거두게 하되, 3년을 기한으로 정하고 본전과 함께 거두어들일 것을 건의하였다.
더하여 조포사(造泡寺) 중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그들에게도 돈을 빌려주어 종이신〔紙鞋〕을 만드는 본전으로 삼게 하였다.
1800년대 당시 중심 상권은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수동 일대의 상설 점포인 시전상가와 반영구적인 가가(假家)시장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성내 시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규모가 작은 시장이 팔달문 밖에 있었다. 바로 ‘성외 시장’인 것이다.
한편 화성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교통의 중심을 양재역에서 수원의 영화역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하였다.
삼남으로 가는 길은 원래 양재역을 시작으로 광주와 용인을 거처 죽산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1796년 화성성역이 마무리될 즈음에 양재역을 영화역으로 고치고 역참〔郵治〕을 화성 북문 밖에 옮겨 설치하였다 이는 수백 년 이상 삼남지방으로 물자와 사람들이 오가던 ‘길’에 대한 혁명적 변화였다.
이로 인하여 지금 ‘1번 국도’로 불리는 원형이 탄생된 것이다. 이런 변화로 광주지역과 용인지역보다는 수원이 더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는 양재역을 시발로 판교의 낙생역을 거쳐 용인을 통해 죽산, 안성, 평택으로 갈라지는 기존 도로의 개념이 수원을 중심으로 개편된 것을 의미한다.
영화역의 조성으로 수원이 삼남으로 가는 요충지가 됨으로써 행궁 앞 중심에 십자로의 조성되고 창룡문을 통해 광주로 가는 도로가 조성되고 장안사거리는‘T’자형 도로로 이곳에서 화서문을 통해 안산으로 통하는 도로가 되었으며 팔달문을 조금 지나 동쪽으로는 용인으로 향하고 사도세자가 묻힌 안녕리까지는 능행길이, 그 옆으로는 병점을 지나 오산을 거쳐 진위 ․ 평택으로 가는 도로가 조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수원은 삼남은 물론 서울, 광주, 용인, 안산, 남양, 안성 등으로 사방 팔방 뻗어가는 교통의 중심이 되고 물산이 모여드는 상업의 구심점이 되었다.
도시조경과 숲의 도시
‘숲’은 생태환경의 보고이며 인간 생존에 필요한 많은 자원을 제공한다. 숲은 인간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면서 정신적 안정감을 주고 공기 중의 미세먼지 등의 오염물질을 정화하거나 물의 양을 조절하여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줄여준다.
침엽수 등은 살균작용을 하는 물질을 내뿜어 약효도 또한 지니고 있다. 따라서 숲의 조성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지속가능한 도시와 국가를 만드는데서 필수적이고 무엇보다 우선 돼야할 가치이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관청, 도로, 다리, 상가 등의 도시기반 시설은 물론 저수지와 둔전을 만들어 생산기반 시설도 완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조경도 또한 중요시 여겨 도로변에 수많은 나무를 심었다. 버드나무, 뽕나무, 개암나무, 밤나무를 가리지 말고 무조건 나무를 널리 심어 숲을 이루어서 울창하게 경관이 달라지는 효과가 있게 하는 것이 또한 먼저 해야 할 일이라며 고을 소재지와 역마을에 집집마다 나무를 심는 일을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조시 조경의 측면에서 소나무, 뽕나무, 측백나무, 느릅나무, 오동나무, 가래나무, 버드나무, 연, 대나무 등을 심었다.
수원추팔경 중 미로한정에서 국화를 완상하는 ‘한정품국’,‘수원팔경’중 ‘북지상련’ 즉 북지에 곱게 피어난 연꽃 등은 수원의 대표적인 꽃이었다.
소나무는 지금도 ‘노송지대’로 남아있고 옛 그림과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창룡문 지역과 운동장 사거리부터 만석거 사거리까지의 도로는 낮에도 걷기에 무서우리만치 울창한 소나무가 빽빽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도시조경적인 측면에서 남지, 동지, 북지, 용연 등의 인공 연못을 팠다. 이 인공 연못의 조성으로 수문과 배수의 역할 은 물론 각종 꽃과 나무를 심어 도시의 미관을 한층 격조 높게 한 것이다.
미완의 신도시 ‘화성’
정조의 꿈은 49살이 된 1800년에 종기가 악화되어 사망함으로써 ‘미완의 꿈’이 되었다. 1804년에 왕위를 아들 순조에게 물려주고 화성으로 내려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말년을 보내고자 했던 구상도 이루지 못하였다.
정조의 화성 건설은 아버지 사도세자 신원을 이루고자 했던 ‘사적인 염원’에서 출발하였지만 ‘화성’은 18세기 조선의 과학 건축 기술이 집약되고 자연친화적인 도시를 지향하는 ‘공적 공간’으로 남아 있고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됨으로써 우리나라라는 지역적 범위를 넘어선 전 세계 인류가 함께 아끼고 지켜야 할 자랑스러운 유산이 되었다.
* 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 화성신도시 건설이 10회 연재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옥고를 허락해주신 이달호 소장님께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달호 소장은 역사학 박사로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을 맡고 있다. 학위논문으로 <화성 건설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