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계단 오르기]첫 번째 계단 - 시인 조연희, 詩의 사생활 8

예술가들에게 삶은 그 자체로 원천이다. 어머니의 품 안에 담겨져 있던 몸의 기억들이 순명의 두레박을 타고 한 가득 예술의 영감으로 길어 올려 진다. 그 안에 담긴 기억들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한 단계씩 오르고 올라 예술의 열매를 맺는다. ‘예술로 계단 오르기’는 길어 올리는 과정에서 두레박 밖으로 떨어지는 순명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은 예술가의 퍼즐 맞추기다. 그 첫 번째 계단을 조연희 작가가 오른다. <시의 사생활>로…,

 

기억이란 ‘말단 비대증’ 증세와 비슷하다. 성장을 멈출 줄을 모른다. 30여 년 전의 일이 마치 오늘 일처럼 생생하다. 아니 오히려 그 시절보다 점점 더 또렷해진다. 기억 속에서 만큼은, 그 시절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아버지가 집을 팔아버린 그해 초여름. 예상대로 우리는 산 정상이 가까운 달동네로 집을 옮겼다. 그러다보니 등하교 시간이 길어진 것은 물론이다. 거리가 멀어진 것도 있었지만 나름 새로운 즐거움도 생겼기 때문이다. 당시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오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곱창처럼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 하염없이 계단을 오르는 길과 좀 멀지만 시장을 가로질러 가는 길. 나는 종종 시장을 통과해 집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시장 입구의 대장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날도 대장간에는 얼굴이 하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와 젊은이의 장딴지만한 팔뚝을 가진 사내가 있었다. 누런 러닝셔츠 차림의 사내는 늘 화난 표정이었다. 시뻘건 불길 속에서 시우쇠를 꺼내 모루 위에 올려놓고 연신 메질을 해댔다.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굵은 팔뚝의 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화덕에서 나온 시우쇠는 붉다 못해 끝이 투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시우쇠가 불꽃을 튀며 점점 납작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열기가 식지 않은 시우쇠가 푸쉬쉬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물속에서 급 냉각되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메질과 담금질을 반복하는 사이 시우쇠는 하얀색에서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까지 마치 멍의 빛깔 같은 오색찬란한 온도를 경험하며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어쩌면 사람의 인생도 색으로 표현하면 저렇지 않을까.

오늘은 팔뚝 굵은 사내 대신 옆에서 가끔 시중을 들던 젊은 녀석 혼자 있었다. 녀석은 나를 알고 있다는 듯 씨익 웃어보였다.

“너 이사 왔지?”

그러면서 자기는 대학생이며 곧 입대할 거라고 했다.

“너 부질없다는 말 아냐? 불질 없다는데서 나온 말인데 그 불질이 이 불질이다. 쇠를 불에 달궜다, 물에 담갔다 하는 짓. 이렇게 불질하지 않은 쇠는 쓸모없다고 해서 나온 말이야.”

녀석은 나에게 보란 듯이 화덕에서 집게로 시우쇠를 꺼내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아, 저 쇠 메질소리…. 내가 대장간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저 망치소리 때문이었다는 것을. 강하게 때로는 속삭이듯 울려오는 저 현란한 망치소리는 내 심장 뛰는 소리로 공명되어 왔다.

쇠는 구부러질 때 더욱 아름답다. 구부러지는 그 지점이 차가움과 뜨거움이 단단한 내공으로 매듭짓는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삶의 변증법을 대장간에서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건 늘 무엇인가와 대립하는 것이었고 서로 대립되는 그 기운의 길항작용을 통해 한 걸음 나아간다는 것을.

 

모든 딱딱한 것들 속에는 물렁한 꿈이 숨어 있다

저 직선 속에는 곡선이 숨어 있다

나는 화덕에서 보았다

뚝뚝 녹아내리고 싶은 마음

안으로 안으로 다잡던 쇠의 굳은 의지를

그 물렁함과 딱딱함의 변증법을

단단한 날일수록

제 안의 뜨거움도 깊어

뼈도 없는 쇳덩어리가

열망 하나로 그렇게 강인해지게 되는 것을

나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열과 오한 속에서 보았다

대장간 모루 위에

물렁물렁한 칼 한 자루

세상의 무뎌진 것들을 향해

시퍼런 날 하나 세우고 있음을

-졸시 ‘대장간에서’ 전문

 

팔뚝이 굵은 사내가 들어오자 나는 대장간에서 나왔다. 대학생이라던 그 젊은 녀석도 같이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도 바싹 따라붙더니 내게 물었다.

“넌 왜 항상 혼자 다니니?”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닭집으로 갔다. 그즈음 시장통에는 자동으로 닭털 뽑는 기계가 도입되었다. 드럼통처럼 생긴 원통형 기계에 닭을 집어넣으면 탈수기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닭털이 모조리 뽑혔다. 한쪽 가판에는 벌거벗은 닭들이 모가지를 늘어뜨린 채 누워 있었고, 그 옆 철망으로 된 닭장 속에는 닭들이 날갯죽지를 움직일 틈도 없이 빽빽이 갇혀 있었다.

한 아줌마가 죽은 닭들을 이리저리 넘겨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닭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통통하게 생긴 놈을 지목하는 것이었다. 저 놈으로 해주세요. 닭장 문이 열리고 닭집 아저씨는 지목된 놈을 꺼냈다. 두 날갯죽지를 한 손으로 잡더니 아저씨는 사정없이 칼로 가슴을 찌른 후 닭털 뽑는 기계에 처넣었다. 기계가 들썩들썩했다. 아주 힘이 센 놈인가 보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들썩들썩하던 틈을 타 놈이 뚜껑을 밀치고 뛰쳐나온 것이었다. 급소를 찔린 것도 모른 채 놈은 털 뽑는 기계에서 탈출해 시장통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때, 아 그때였다. 갑자기 대학생이라던 그 녀석이 나타나 재빨리 닭을 낚아채 껴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 녀석 뒤를 따라 무작정 달렸다.

산 능선에 다다랐을 때는 녀석도 나도 땀범벅이 돼 있었다. 가슴에서 발버둥 치던 닭도 축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제법 우람해 보이는 나무 밑을 깊게 판 후 닭을 묻어주었다. 닭의 목에서 쿨렁쿨렁 흘러나온 것 같은 붉은 석양이 새털구름 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세상은 어쩌면 하나의 커다란 대장간인지도 몰랐다. 태양은 커다란 화덕이고 시우쇠인 우리는 심한 메질과 담금질로 제 모양을 찾아가는. 석양의 붉은 기운이 다시 내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바람 냄새를 비집고 녀석의 땀 냄새가 물신 풍겨왔다. 어이없게도 공범이 된 탓인지 녀석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우리는 동물을 사랑해야 돼. 그건… 동물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지.”

녀석은 닭무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근데 넌 왜 항상 혼자 다니니?”

나는 아버지가 가족 몰래 집을 팔아버렸다는 얘기,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는 얘기, 내 가방 속에 유서가 들어있으며, 헤르만 헤세를 좋아한다는 얘기, 산다는 게 아주 시시해 죽겠다는 얘기 등등 모두 털어놓고 싶어졌다. 또 집시가 되고 싶다는 얘기, 저 석양에 목을 매달고 싶다는 얘기, 미친년처럼 해가 떨어지는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어가고 싶다는 얘기도…. 그러나 이번에도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땀을 흘린 뒤라서 그런지 어둠이 몰려오며 몸에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재채기가 나오며 이마가 조금씩 뜨거워졌다. 순간 난 불 속의 호미처럼 내 몸이 고열 속에서 크게 한번 휘어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쇠 메질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그것은 바로 가까운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 조연희 시인은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영상기획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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