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회관 745호실 이야기(14) - 국회의원의 권한과 특권 사이②

지난해 11월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국회를 찾았다. 그들의 손에는 1300여 하청노동자와 가족들의 서명 용지가 들려있었다. 500여 가족의 실태조사, 세 번의 토론회, 현장에서 서명운동을 벌여가며 이해당사자와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마련한 입법 청원 기자회견이었다. 10분간의 기자회견을 위해 지난 몇 달간 정성을 쏟은 것이다.

IMF 이후 조선소에도 하청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업 대기업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하청구조를 확대해 왔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하청노동자들의 노조 활동을 관리하기도 하지만, 원청의 입김만으로 문을 닫아야 하는 하청업체에서는 애당초 노동조합을 꿈꾸기조차 어려운 구조다. 하청노동자의 처우개선 이야기가 나오면 늘 노동조합 이야기가 나오고, 하청노동자의 단결권 보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 이야기가 나온다.

입법을 청원하는 노동법 개정안은 하청노동자에 대한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하고, 하청노동조합이 원청회사와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경영계와 이해관계가 첨예한 이런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될 리가 없다.

애초에 국회에서 법안 발의를 하지 않고 하청노동자의 입법 청원으로 준비한 것은 노동자들 속에서 하청노동자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이런 쟁점 법안에 10명 이상 국회의원의 동의를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입법 청원을 한다고 법안이 제대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11월에 진행한 하청노동자들의 입법 청원은 국회 청원 소위에서도 아직 한 번도 다루어지지 못했다. 20대 국회 입법 청원 건수는 196건이었고, 이 법안 중 소위를 거쳐 상임위로 넘어간 법안은 34건이었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4건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162건)은 청원 소위에서 계류 중이다. 이 청원들은 20대 국회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하청노동자들의 청원도 그 처지를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국민청원제도가 실효성이 없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차라리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을 찾는다. 국회도 이런 여론을 알았는지 최근 온라인 국민청원제도를 마련했다. 애초에는 소개의원 없이는 청원조차 못 했는데 이제 국회의원의 소개가 없이도 30일 동안 10만 명의 동의를 얻으면 온라인상에서 바로 입법 청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청원제도는 법을 제안하는 것일 뿐, 법안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여전히 국회의원들의 심의가 필요하다.

20대 국회는 법안처리율이 30%도 안 돼 놀고먹는 국회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촛불 항쟁 이후 사회 대변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는 높은데, 패스트트랙에 오른 법안들 외엔 개혁법안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이쯤 되니 국민들 입장에서는 법을 만드는데 왜 꼭 국회의원의 제가만 기다려야 하는지 속이 터진다. 법안 발의와 제정이 국회의 권한이라고 하지만 국회의원의 권한이 애초에 국민에게 부여받은 것이니 꼭 국회의원만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직접민주주의를 모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스위스에서는 국민 10만 명 이상이 동의하면 헌법 개정안을 국민이 발의할 수 있는 국민발안제를 두고 있다. 국민들이 헌법 개정안을 내면 절차에 따라 국민투표를 시행한다. 1891년 헌법 개정안 국민발안제도가 도입된 이래 209건이 제출되었고, 이 중 22건이 최종 채택되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주 단위에서 법안을 발안할 수 있다. 주 단위별로 자율적 법체계를 가지고 있어 그 권한은 우리의 지방자치 조례 제정과는 다른 수준이다. 핀란드에서도 2012년 국민발안제도를 도입하였다. 6개월간 5만 명의 동의를 얻으면 법안으로 발의되고 의회에서 다루어진다. 이처럼 대의정치의 빈 곳을 메우고 국민들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해 국민발안제, 국민투표제 등의 제도를 두어 국민 스스로 법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나라들이 있다.

물론 모든 법안을 5천만 국민이 함께 만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제도 있다면 국민들의 능동적 정치참여의 길을 열어놓고,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에게 너희들이 하지 않으면 그 권한을 국민들이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지 않을까? 때론 국회의원들이 하지 못하는 과감한 개혁의 조치를 국민의 힘으로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제52조 국회의원과 정부는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다”는 헌법 구절은 국민을 대신해 법을 만들라는 말일 텐데, 법은 국회의원만 만든다는 ‘특권’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민생법안을 볼모로 파업을 벌이는 국회의 모습을 보며 이를 심각하게 의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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