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20) - 1950년 7월 27일 영덕 황장재

피란민 행렬을 헤치고 나가던 국군 3사단 독립기갑연대가 1950년 7월27일 영덕 지품면 황장리 황장재에서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포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609~610쪽). 하지만 국군을 공격한 자들이 누구였는지 분명하지 않았고 이에 대응하여 국군이 공격한 자들 역시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전투가 피란민들의 행렬 속에서 벌어졌다는 객관적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피란하던 민간인들로서는 피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품면 황장리는 전쟁이 나기 전인 1949년 8월 20일 등 빨치산에게 밥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주민들 상당수가 집단학살 당한 곳이기도 했다.

▲ 『한국전쟁사』 제2권 609쪽. 국군 3사단 독립기갑연대가 전투를 벌였다는 곳은 피란민 대열 속이었다.

 

▲ 청송과 영덕의 경계인 황장재에서 영덕 방면을 본 모습. 영덕 지품면 원전리까지 갔던 국군이 인민군을 보고 돌아오다가 공격을 받았다는 곳이다. 당시 피란민들이 가득 차 있었다. 2019년 10월 22일 조사.

먼저 시작된 전쟁, 국민보도연맹 사건

동해안 38선 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8사단이 인민군의 옥계 등 후방 상륙으로 퇴로가 막히자 대관령을 통해 원주 방면으로 후퇴했다. 인민군 5사단이 진입한 울진 등 영덕의 북쪽은 무방비 상태로 남아 있다가 7월10일부터 투입된 국군 3사단 23연대가 방어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아직까지 후방으로 남아 있던 영덕 지역에는 주둔하던 국군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크게 희생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덕 영해면, 창수면 보도연맹원 80여 명이 1950년 7월8일 국군 3사단 23연대에 의해 어티재(울진군 기성면 정명리)에서 집단희생 당했으며, 강구지서에 구금되었던 30여 명의 보도연맹원은 7월14일 강구지서 경찰에 의해 강구 앞바다에서 수장당했고, 영덕경찰서로 이송된 160여 명의 보도연맹원은 7월15일 영덕경찰서 소속 경찰과 국군 3사단 23연대(김종원 부대) 군인에 의해 영덕읍 화개리 뫼골에서 총살당했다. 희생자로 확인된 주민은 모두 120명에 이른다(진실화해위원회, 「경북 영덕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5권, 269쪽).

낙오된 독립기갑연대

인민군 5사단이 영덕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날은 7월12일이었다. 이틀 뒤 이들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인 국군 3사단은 미 8군사령부의 화력지원으로 5일을 버틸 수 있었다. 국군 3사단 23연대는 7월19일 영덕을 내어 준 후 영국과 미국의 해군 함포 사격 지원으로 7월21일 저항 없이 영덕을 탈환했으나 다시 철수했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585쪽). 24일에는 대구에서 대기 중이던 국군 3사단 22연대가 영덕 강구에 증원되었다.

▲ 국군 3사단 산하 독립기갑연대가 주둔했던 진보초등학교 앞인 진보읍내의 모습. 황장재까지 14km, 영덕 지품면 원전리까지 19km 떨어졌다. 2019년 10월 22일 조사.

한편, 같은 시기 국군 3사단에 배속되어 있으면서 산하에 강원도경찰 등 경찰 대대를 두고 청송군 진보면 진보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던 독립기갑연대(연대장 유흥수 대령)는 사단본부와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낙오된 독립기갑연대 연대장은 7월27일 아침 6시 경찰 1개 소대를 장갑중대에 배속시키면서 사단과 연락하여 임무를 받아오라고 명령했다. 당시 3사단 지휘소는 경북 영덕에 있었고 영덕과 청송 사이의 도로는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갑중대의 임무는 보유하고 있는 장갑차를 이용하여 도로를 돌파한 후 영덕을 다녀오는 것이었고, 경찰 1개 소대의 임무는 장갑중대가 영덕을 다녀오는 동안 그 사이에 있는 황장재에서 도로를 경비하며 이들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국군 3사단 23연대가 영덕 이남으로 철수한 날이 7월17일이었으므로, 같은 날 영덕에 인민군이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인민군은 포항에서 이륙한 전폭기와 해상의 함포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8월 초까지 영덕에서 후퇴와 점령을 반복하고 있었다.

독립기갑연대가 피란민 행렬을 공격하다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7월27일 아침 7시 독립기갑연대 장갑차 1대와 경찰 1개 소대가 주둔지를 출발하여 황장재(청송 진보면 괴정리와 영덕 지품면 황장리의 경계)에 도착했다. 오늘날 진보초등학교에서 황장재까지 이어진 34번 국도의 거리는 14km였다. 1개 소대의 경찰이 걸어서 이동했다면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 걸렸을 것이니, 늦어도 오전 10시에는 황장재에 도착했다고 볼 수 있다. 트럭을 이용했다면 도착시간은 훨씬 빨랐을 것이다. 인민군이 진입한 흔적이 없음을 확인한 중대장은 경찰 1개 소대를 배치하고 자신은 1개 분대와 함께 계속 영덕을 향해 나아갔다.

장갑중대가 황장재에서 5km 정도 지나 영덕군 지품면 원전리에 이르렀을 때 지프차를 타고 있던 중대장은 멀리 산 중턱에서 참호를 파고 있는 1개 중대 규모의 인민군과 그 옆에 쌓여 있는 보급품을 목격했다. “사단과 연락”이라는 주 임무를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장갑중대장은 갑자기 이들을 기습하겠다며 연대장에게 자신의 의도를 보고했다고 한다. 연대장은 “즉각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엉뚱한 짓 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 지품면사무소 원전리 출장소 앞에서 본 산. 중턱에 인민군이 참호를 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군이 인민군을 봤다면 인민군 역시 국군을 볼 수 있는 지형이었다. 2019년 10월 22일 조사.

지프차와 장갑차까지 동원되어 도로를 달리던 행렬이 산에서 참호를 파던 인민군을 목격했다면 인민군 측에서도 이미 국군 일행을 목격했을 것이다. 장갑중대장은 이를 경계하기는커녕 오히려 “눈앞의 적에게 일격을 가하고 싶었으나 여기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의 피로가 크고, 세칭 30리 고개를 다시 넘어야 할때에 그들의 추격이 있을 경우를 우려치 않을 수 없으므로 절치액완(切齒扼腕) 하면서 귀로에 올랐다”고 한다. “절치액완”, 즉 분해서 이를 갈고 주먹을 꽉 쥐었다는데 이는 연대가 전멸당할 상황을 돌파해야 하는 장교가 가질 태도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심각한 사건이 돌아오던 길에서 발생했다. 오후 4시 황장재에 다시 도착했지만 진보 방향으로 이동하는 수많은 피란민들만 보일 뿐 막상 경계 근무를 서고 있어야 할 경찰 1개 소대가 보이지 않았다. 장갑중대는 어찌된 일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경찰 1개 분대를 앞세워 피란민 행렬을 헤치며 후퇴를 계속하던 중 황장재 뒤쪽에서 누군가로부터 총격을 받게 되었다. 마침 타고 다니던 지프차에서 장갑차로 갈아타고 있었다는 중대장은 장갑차에 설치된 37mm포로 대응사격을 가했다. 총소리가 나던 뒤쪽 어디론가 쐈던 것인데, 이 대포의 포탄은 산탄이었다고 하니 피해의 범위가 넓었을 것이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하지 못한 장갑차는 뒤쪽으로 계속 포를 쏘면서 연대 본부 방향으로 달렸다. 1개 경찰분대도 함께 뛰었을 것이다. 총을 쏜 자들이 피란민을 가장한 인민군이었다고 주장하는 중대장의 증언을 볼 때, 중대장이 포를 쐈던 대상은 피란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때 장갑차는 죽은 소를 밟으면서 미끄러져 길가의 도랑(도로변으로 서시천이 흐른다)에 빠지고 말았다.

▲ 황장재에서 내려가는 길. 급경사에다 곡선 구간은 저렇게 360도 가까이 굽어있어 오늘날도 차량이 지나기 위태롭다. 조금 더 내려가면 서시천이 도로변으로 흐른다. 2019년 10월 22일 조사.

인민군의 쏜 총소리에 대한 설명이 초기에 그쳤으므로 이후 계속 사격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또 함께 있던 1개 경찰분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이로 보아서는 국군에 대한 인민군 측의 공격이 초기에 그쳤을 뿐 계속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직접 살펴본 결과 산의 지형이 험하므로 조금만 움직여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추격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격을 계속 받고 있는지 확인되지 않는 상태에서 도랑에서 빠져나온 장갑차는 전속력으로 1km 정도 내려간 뒤에야 경찰 소대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서시천이 시작되는 곳에서 약 1km 떨어진 거리에는 괴정리 마을이 있었는데 두 부대는 아마 이곳에서 만났을 것이다.

장갑차를 엄호했어야 할 경찰 소대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으며 명령도 없는 상태에서 임의로 철수하는 중이었으니 처벌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을 것이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들과 함께 원 주둔지로 복귀한 장갑중대는 연대장의 뜨거운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질책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 무슨 이유로 격려를 받았는지 알 수 없는데, 이후 증언에서 중대장은 “경찰 소대는 피란민으로 가장한 게릴라에게 기습을 당하여 철수”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피란민과 게릴라를 구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군의 공격이 이루어졌으니 이 주장은 피란민을 공격해놓고 게릴라를 공격한 것이라고 변명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거짓 주장한 것이 아니었을까?

알 수 없는 국군의 피해와 피란민의 피해

이날 피습으로 전사자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중대장 자신은 양 볼에 관통상을 입어 후송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부상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다른 병사들의 피해는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다.

장갑중대의 원래 임무였던 “3사단 본부와 연락”이 실패했음에도 『한국전쟁사』는 연대장이 중대장을 격려했다고 했다. 무엇을 격려했는지 설명이 없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장갑차에서 발사한 포탄이 산탄이었다면 피란민들의 피해도 컸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설명 역시 없다. 소의 사체를 밟은 장갑차가 미끄러졌다는 기술로 보아 소가 죽어 버려져 있을 정도라면 피란민의 피해 역시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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