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고문은 지난 12월 15일 <현실사회주의 비교와 한국사회 미래 전망, 시리즈 토론회1>에서 제기된 쟁점에 대한 필자의 평가문이다. 기고문은 2회에 나누어 게재하며, 필자의 입장은 민플러스의 견해와 다를 수 있다.

들어가며:

필자는 얼마 전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제출하면서 12/15 토론회에 대한 간략한 소감을 곁들인 바 있다. 그리고 곧 이어 정식 평가문을 제출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토론회에 참석치 못한 분들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남은 두 차례의 토론회를 더욱 성과 있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이 같은 작업이 꼭 필요하리라 보여진다. 본 평가문은 지정토론자인 채만수, 이정구씨의 반론에 대한 회답도 포함한다.

[목차]
1. 토론회의 관심과 열기
2. 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단인가?
3. 왜 중국사회의 성격이 문제가 되는가?
4. 한 사회성격을 판단하는 기준
5. 생산관계(소유제) 측면에서 본 중국사회의 성격
6. 상부구조적 측면—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
7. 중국특색 사회주의가 한국변혁운동에 주는 시사점
8. 다뤄지지 못한 문제

▲ 2018년 3월 3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개막을 하루 앞두고 4일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장예쑤이(張業遂) 외교부 상무 부부장은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시대에 중국의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헌법의 핵심적인 역할을 더욱 도모하기 위해 헌법을 적절하게 수정하는게 필요하다"고 말했다.[사진 : 뉴시스]

5. 생산관계(소유제) 측면에서 본 중국사회의 성격

사회성격을 판단하는 두 가지 기준 중 먼저 생산관계(소유제) 측면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1) 이 측면에서는 국유기업이 국민경제 전반에 확고한 주도성을 갖고 있는 중국사회는 그 사회주의적 성격을 충분히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국유기업의 주도성과 관련한 근거로 발제문에서 상위 50대 기업 명단, 그리고 국유기업이 포진하고 있는 산업과 업종의 전략적 중요성을 들었다.
 물론 여기서 양적측면에서 본다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국유기업의 비중은 절대 다수가 아니며, 대략 1/3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민간기업과 외자가 각각 1/3씩 차지하고 있다. 실제 이날 이정구씨도 그 점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한 사회의 성격판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질적 측면’이지 양적인 것이 아니다. 즉 어떤 생산관계가 우세하며 지배적인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관련한 사회구성체 논쟁 때 대체로 결론이 난 문제이다. 당시 논쟁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진경씨는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하나의 사회는 특정한 본질적 관계에 기초해서 통일적 전체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특히 사회구성체론에서 이 본질적 관계는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토대로서 질적 지배력을 갖는 모순이 전술한 ‘기본모순’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필연성을 획득한,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관철될 수밖에 없는 법칙에 기초하여 그 사회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질적인 지배력을 획득한 생산관계는 그것이 ‘아직’ 정립되지 못한 부분 속으로 침투·확대해 들어가며 그 관계를 재생산하는 제반 재생산영역과 상부구조에까지 확대되어 간다.”(이진경,2008,<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pp.108~109, 그린비출판사. 인용문 중 고딕체부분은 원저자, 밑줄은 필자에 의한 것) 

위의 인용문 중 고딕체인 “필연적으로 관철될 수밖에 없는 법칙에 기초하여 그 사회를 파악하는 것”에 대해 이진경씨는 별도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이는 ‘전개될 수밖에 없는’ 관계이며, ‘(이미) 전개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필연성으로서의 전자는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현실화하며—이것이 발전과정으로 표현된다—그 과정을 통해서 점차(양적으로도) 지배적인 것으로 된다.” (위의 책, p108)

이진경씨의 이상의 서술은 한 사회를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가치 있는 시각을 제공하며, 현재 중국사회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충분히 참고할 만 하다고 보여 진다. 

2) 중국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와 관련된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현재 중국에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계급관계가 상당히 존재하기에 당연히 ‘착취’는 객관적 현실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중국이 전반적으로 ‘착취사회’라든지 계급모순이 주요모순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이유는 생산력, 산업의 전략적 위치, 그리고 국가적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은 이미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고하게 그 ‘지배적 지위’를 확립하고 있으며, 그 밖의 나머지 생산관계는 모두 부차적인 지위만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관계 하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나 심지어 외국자본까지도 지배적인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보완하고 그를 위해서 봉사한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사회인 한국에서 한국전력이나 한국가스공사와 같은 공기업들이 재벌을 비롯한 사적자본의 축적운동에 복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중국에서 사적자본(외국자본 포함)은 세수, 고용창출, 기술개발 등에 있어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중국경제의 발전을 위해 복무한다. 그리고 그 같은 사적자본의 존재는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주변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교류하는데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 이점은 화웨이나 알리바바의 역할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이정구, 채만수 두 분은 박정희 시절에도 공기업이 많이 존재하였다는 점을 근거로 공기업 수가 많은 것만 가지고서는 중국을 사회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하지만 앞서 확인한 사회성격을 판단하는 두 가지 기준은 여기서도 유효하다고 보여 진다. 우선, 박정희 정권 시기에 비록 공기업 비중이 상대적으로는 지금보다는 많긴 하였지만, 하지만 당시 한국경제는 “공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한국경제는 현대, 삼성, 대우, LG, 롯데, 쌍용 등 민간 자본이 주도하는 경제였다는 점에서 중국경제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리고  당시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에 있어서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권력이나 사회주의 정권은 절대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의 당시 경제개발의 목적은 사적자본을 육성하는 것이었으며, 이후 그 같은 조건이 어느 정도 마련되자 알짜배기 공기업들을 하나 둘씩 민영화하였다. 

3) 여기서 ‘공황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필자는 발제문에서 중국의 사회주의 성격을 증명하는 보충적 근거로서 ‘공황문제’를 언급하였다. 중국경제는 개혁개방 이래 40년 동안 ‘공황’이라고 불릴만한 심각한 경제위기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사회를 연구함에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공황’은 그 내적인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고도성장을 상당 기간 경험한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1997년 말~1998년 몇 차례의 심각한 경제공황을 경험하였다. 자본주의가 이처럼 경제공황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크게 보면 다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생산의 무정부성이며, 다른 하나는 자본의 끝없는 이윤추구 욕구와 자본 간 경쟁이 상호 작용한 때문이다. 후자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한편에선 생산성 향상과 공급확대를 위한 경향이 강하게 작용함에 반해, 다른 한편에선 최대한 임금을 억제하고 비용을 절감하려는 경향이 작동한다. 이로 인해 공급은 무한히 확대되고 수요는 위축되어 사회 전체적으로는 양자 간의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출현한다. 자본주의는 이 때문에 1825년 영국에서 최초로 경제공황이 발생한 이래 거의 10년에 한 번씩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모두 11차례,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보편화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6차례의 국제적 경제공황을 경험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경제는 40년이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경제위기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론 중국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강력하다는 점 과 함께,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사회에선 치유할 수 없는 수요와 공급 간의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은 국유기업과 같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함에 따라, 그리고 잠시 후 보게 되는 것처럼 국가권력의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한쪽에선 이윤추구 욕구가 적절히 제어되고, 다른 쪽에선 경제성장의 과실이 전 인민에게 적절하게 재분배됨으로 인해 국내수요의 확장이 꾸준히 이루어진다. 

이 점은 객관적인 통계수치에 의해 입증이 가능하다. 최근 들어 중국의 사회보장제도는 급속히 정비되었으며(표1 참조), 실질임금은 GDP 성장률에 조응하는 꾸준한 상승을 보여주고 있다(발제문 참조). 이 때문에 저임금을 노리고 초기에 중국에 진출했던 한국과 일부 외국 자본들이 동남아로 철수하는 현상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내수가 활성화됨으로써 소비가 중국 경제성장에서 차지하는 공헌도는 현재 60%에 달하고 있다. 중국경제의 이 같은 내수 위주 전환은 최근 중미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미국의 전방위적 압력을 이겨내는데 있어 큰 힘이 되었다. 

http://www.stats.gov.cn/tjsj/ndsj/2017/indexch.htm

4) 필자의 발제문에서 중국 노동자 실질임금의 꾸준한 상승을 제시한 통계에 대해 이정구씨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시했다. 중국 공식통계에서 노동자로 분류되는 집단은 6000만~8000만 명밖에 되지 않으며, 농민공이 2억 5000만 명인데 이들까지 다 포함할 경우 평균 임금이 낮아지고 빈부격차는 훨씬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정구씨가 자신의 통계수치를 어디에서 입수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필자가 중국 국가통계국 사이트에 직접 접속해서 조사해본 결과는 중국 통계에서 도시 취업인구와 농촌 취업인구가 모두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의 경우 도시 취업인구는 4억419만 명, 농촌 취업인구는 3억7041만 명이었으며, 이 둘을 합산한 전체 취업인구는 7억7,451만 명이었다(표2 참조). 이 경우 필자가 발제문에서 예시한 임금인상률은 도시취업자 즉 ‘노동자집단’에 대한 통계임이 확인된다. 그 점은 필자가 도시 취업자들의 명목 화폐임금 인상률, 도시 소비자물가 지수,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전자의 실질임금 인상률을 비교한 결과 발제문의 통계수치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되었다. (표3 참조) 

http://data.stats.gov.cn/easyquery.htm?cn=C01 

이렇게 볼 때 필자 발제문의 통계수치는 이정구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협소한 노동자 집단’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그리고 통계상 농촌취업자에 대해선 별도로 처리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들은 농촌에 터를 잡고 농사일을 하는 사람인만큼 도시 노동자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농민공의 경우는 그들이 도시에 나와 취업하는 기간에는 도시취업자로 분류되어 통계에 포함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임금을 받는 순간 그것은 통계에 잡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발제문에서 제시한 임금인상 관련 수치는 농민공을 포함한 통계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필자는 2015년도 이후 2018년까지 도시 노동자의 실질임금 성장률과 GDP 성장률을 비교하여 보았다. 양자는 여전히 발제문에서와 비슷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표3 참조)

http://data.stats.gov.cn/easyquery.htm?cn=C01 

이정구씨는 공황문제와 관련하여서도 중국경제는 1989년 천안문사태와 1997년 동남아시아 IMF 외환위기, 그리고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 때 저성장을 겪었다고 하며 필자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중국경제도 “세계 자본주의와 함께 등락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정구씨의 반론은 상대적 ‘저성장’을 언급한 것일 뿐 ‘공황’과 같은 ‘심각한 경제위기’에 관한 것은 아니다. 지금의 논점은 중국경제에 있어 자본주의적 ‘경제공황’이 존재하는지 여부이며, 여기서 저성장과 경제공황은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개의 개념이다. 참고로 표4에 이정구씨가 언급한 시기의 중국경제 성장률을 제시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http://data.stats.gov.cn/easyquery.htm?cn=C01

5) 잠시 화제를 바꾸어, ‘물권법’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로 하자. 토론회 당시 청중 질의시간에 이와 관련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질의자는 물권법이 제정(2007년3월)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미지수였지만, 이 법의 제정으로 ‘국가자본주의’로의 방향이 확정되었다는 견해를 제시 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물권법은 중국의 소유관계의 현황을 사후적으로 인정하는 의미를 가질 뿐 그 역관계를 새롭게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러할 때 이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주의적 소유관계는 이 ‘물권법’의 존재로 인해 그 지위가 확고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법으로 인해 사적소유만이 혜택을 입는 것이 아니라 국유기업과 같은 공유제는 더 큰 이득을 본다는 뜻이다. 물론 물권법 제정 이전에도 헌법이라는 최상위법 차원에서 이미 국유 및 집체 소유제의 지배적 지위는 보장받고 있었다(헌법문제는 잠시 뒤에서 다룬다). 물권법은 민법에 속하는 일개 법률로서 그 효력이 결코 최상위법인 헌법을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질문자는 아마도 만약 사적소유가 물권법에 의해 법률로써 고정화(영구화)된다면,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언급한 “사적소유 철폐”라는 궁극적 목표가 자칫 포기되는 것이 아니냐는 뜻을 전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이점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물권법이 존재하더라도 시장경제 법칙인 자본 간의 ‘경쟁’은 작동하며, 이에 따라 취약한 민간자본들은 끊임없이 도태되고 스스로 정리되게끔 한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중국에서 ‘국진민태(國進民退)’라는 말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국유기업이 나아가고 민간 기업은 후퇴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지금 사회주의시장경제 하에서 어느 쪽의 생산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인류가 더 높은 생산력 수준에 도달함에 의해 사적소유는 소멸하게 될 것이다. 지금 진행되는 4차 산업혁명 하의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3D 기술 등의 획기적 발전은 그를 위한 물적 조건을 직접 준비한다. 이 같은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도 ‘물권법’에 의해 당분간 사적자본이 안심하고 경제활동에 종사토록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주의 생산력 발전에 사적자본이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인데, 이 같은 변증법적 역설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6. 상부구조적 측면—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
    
이날 토론회에서 중국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 역시 논란이 되었다. 관련한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토론회장에서는 시간 관계상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하였는데, 여기 지면을 빌려 얼마간 못다 한 얘기를 보충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 국가권력의 주체가 노동자계급이라는 점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지가 난제로 대두 된다. 우리가 통상 ‘국체(國體)’ 라고 부르는 문제가 바로 이것인데, 이는 국가권력의 구체적 조직형식과 관련된 ‘정체(政體)’ 문제와 구별된다. 양자는 마치 내용과 형식처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기에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모두 언급되어야 한다. 예컨대, 삼권분리와 다당제로 상징되는 자본주의국가의 ‘정체’(국가권력의 형식)는 소수집단인 자본가계급에게 유리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돈’과 ‘언론’을 장악함으로써 선거를 통해 집권하기에 유리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비에트나 전국인민대표자대회와 같은 사회 직능별 의석 배분에 입각한 일원적인 권력형식은 노동자계급의 집권에 유리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선 지면 관계상 원래의 토론주제인 ‘중국사회의 성격’과 관련한 ‘국체’(국가권력의 주체) 문제에만 집중토록 한다.

중국 국가권력의 성격과 관련하여 필자는 발제문에서 우선 중국 ‘헌법’을 근거로 들었다. 그것은 가장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중국 국가권력의 계급적 본질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 헌법 제1장 제1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계급이 지도하고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라는 규정이나, 제6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경제제도의 기초는 생산수단의 사회주의공유제, 즉 전 인민소유제와 노동대중의 집체소유제이다."라는 규정이 그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 임을 천명할 뿐만 아니라, 노농동맹에 기초한 정권, 생산관계에 있어서 사회주의적 소유관계의 우위성의 보장을 천명하는 헌법은 지구상에서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토론자들은 그것은 ‘형식’일 수도 있기 때문에 너무 과신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였다. 그 증거로 대한민국도 일찍부터 헌법 제1조에서 “자유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현실은 어느 정도나 그것이 지켜졌는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반론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한국을 포함한 다른 어떤 자본주의국가도 자신을 직접 ‘자본주의’라고 천명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다는 점이다. 또 정권의 주체에 대해서도 노동자계급이니 농민이니 하는 구체적 표현을 쓰지 않고 ‘국민’이라는 표현을 쓴다. 만약 정권의 주체에 대해 계급적 주체를 명확히 하게 될 경우 국회나 행정부 등에서 그들의 대표 혹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실제 어느 정도인지가 쟁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소수 계급이나 집단이 통치세력일 경우에는 당연히 모호한 표현방식을 빌릴 수밖에 없다. 실제 헌법에서 국가권력의 성격과 관련하여 ‘자유민주주의’니 ‘국민’ 운운할 경우 이 같은 국가는 거의 100% 자본주의국가라고 보아도 좋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노농동맹’에 기반 한 다수 ‘인민’의 권력 운운할 경우 그것은 실제 사회주의국가라고 보아도 무방 한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다수자가 권력의 주체이기 때문에 굳이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을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논리적 추론에 문제가 있는가? 

그럼에도 아직 토론자들에게는 이 정도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여전히 겉으로의 헌법 규정과 현실은 다를 수 있다고 반박한다. 원래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이다. 그렇지만 헌법과 법률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식적인 법적 규정을 모두 ‘허위’나 ‘선전’이라고 치부할 수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우리가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국가의 헌법과 법률에 비록 허구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로 그것들을 무시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는 노동법개정을 요구하며 싸우고, 또 의회에 진출하기 위해 투쟁하겠는가?

알다시피 헌법은 최상위법으로서 다른 모든 하위 법들을 제약하고 규정한다. 만약 최상위법인 헌법이 자신의 허구성으로 인해 그 하위법인 민법·상법·형법 등과 서로 내용상 불일치가 발생하면 곳곳에서 마찰과 충돌이 생겨 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갖가지 혼란에 휩싸이게 되어 질서유지가 어렵게 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국가의 헌법을 보면 구체적 표현대신 가급적 ‘추상적’ 표현을 많이 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어 스스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도 한편에선 ‘인권’ 조항을 장황하게 열거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헌법해석에 있어서 판단의 기준은 규범적 관점뿐만 아니라 정치성·합목적성도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성낙인,2009, <헌법학>, p30)는 식으로 앞서의 선언을 무력화 할 수 있는 충분한 장치들을 마련해 두고 있다. 이처럼 자본가계급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명확한 규정을 삼가 한다. 하지만 어떻든 현대사회가 ‘법치’라는 기초위에 서 있는 만큼 자본주의국가도 법체계의 일관성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려 애쓴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법치’를 추구하여야만 하는 사정은 사회주의국가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경우 십 수억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사회·경제적 주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시장경제 하에서 복잡한 이해관계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자. 이 같은 사회에서 만약 최상위법인 ‘헌법’ 규정이 허위라고 한다면 그것이 초래할 혼란이 어느 정도 일지를 말이다. 더구나 중국 헌법의 경우 자본주의국가와는 달리 관건적 부분 한 구절 한 구절이 매우 구체적인 표현과 규정성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헌법이 그 하위법인 민법·상법·형법 그리고 정부조직법·선거법 등과 충돌할 경우, 그리하여 수많은 소송과 재판이 벌어지고 불만세력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항의시위를 계속하게 된다면, 이 같은 사회불안은 과연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이렇듯 지금의 중국사회 역시도 법률에 의거한 통치 즉 ‘법치’가 아니면 아무리 강력한 공산당일지라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문화대혁명이라는 큰 소요를 겪은 후 중국은 법치를 계속해서 강조해 왔다.  최근 시진핑 지도부가 들어선 이후 특히 그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중국사회와 시장경제의 발전이 날로 그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한편 사회주의 중국이 과거 권력자의 개인적 명망에 의존하였던 ‘인치(人治)’ 때와는 달리 더욱 성숙한 단계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중국의 헌법 조항을 간단히 ‘허위’나 ‘선전’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현대사회와 법의 관계에 대한, 그리고 지금의 중국 현실에 대한 토론자들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7. 중국특색 사회주의가 한국변혁운동에 주는 시사점

생산관계(소유제)와 국가권력의 성격을 살펴본 결과 우리는 중국이 사회주의사회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 실시하고 있는 시장경제는 일반 자본주의시장경제와는 다른 사회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주의시장경제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공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라 부를 수 있다. 이 점은 중국경제를 연구하는 서구나 한국의 대부분 경제 분석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그들의 중국경제에 대한 예측은 번번이 빗나가고 만다. 같은 시장경제라 하더라도 중국경제를 관철하는 법칙은 자본주의사회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의 특징과 관련한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앞서 언급한 대로 필자의 발제문에는 중국 노동자들의 2002-2015년 실질임금상승 통계표가 실려 있다. 그 표에서 보면 경제성장률(GDP성장률)과 실질임금상승률이 거의 엇비슷하게 장기간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독자들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정부가 직접 임금인상률을 결정하고 지시하는 계획경제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비밀은 바로 ‘공기업 주도’에 있다. 공기업(국유기업)이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국가의 임금정책을 실행하면 다른 기업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수한 인력들이 국유기업으로 몰리게 되면 결국 인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도 민간 기업이나 외자기업들도 거기에 발맞추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이리하여 전체 평균임금은 상승하게 된다. 이렇듯 공기업이 국민경제를 주도할 경우 그들은 다른 기업들 선두에 서서 경제의 방향을 이끌어 갈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올(2019년) 초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과의 합병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대우조선해양을 명실상부한 공기업으로 만들어 그를 중심으로 한국 조선업계를 새롭게 재편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한국 조선업계가 현재와 같이 재벌주도의 경영체제를 지속할 경우 머지않아 중국의 추격 속에 경쟁력이 한계에 부딪치게 될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기업으로 전환된 대우조선해양을 중심으로 그간 한국 조선업계의 고질적 문제였던 수탈적 하도급체계를 개선하고, 값싼 비정규직이 아닌 숙련노동에 의거한 경쟁력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만이 지금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 속의 한국 조선업계의 대안일 수 있다. 공기업인 대우조선해양이 앞장섬으로써 다른 민간 업체인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역시도 그런 모델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사례를 볼 경우 충분히 가능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이점이야말로 사실 이날의 토론회가 단순히 중국사회의 성격을 밝히는 이론적 토론의 장을 넘어서 실제 한국 노동운동에 어떤 직접적 시사를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보여 진다. 물론 개별 단사차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재벌개혁’ 이라는 전 사회적 과제와 결부될 경우 그 의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간 재벌체제의 병폐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벌해체 이후에 대한 대안부재 때문에 한국 변혁운동은 수십 년 동안 더 이상의 진척을 이루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을 계속하여 왔다. 그러할 때 “공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라는 깃발은 새로운 활로를 뚫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이나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웃나라 중국에서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 덕택에 다 쓰러져가는 후진국에서 일약 ‘G2’라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였는데, 우리도 충분히 참고할 만한 사례가 아닐까?

8. 다뤄지지 못한 문제

이번 토론회는 현실 사회주의의 다양한 모습을 논의할 수 있는 모처럼의 귀중한 기회를 제공 함에도, 자칫 잘못하면 그 때문에 오히려 현 시기 현실 사회주의와 관련된 핵심 쟁점이 분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만약 우리가 중국식, 북한식, 쿠바식, 베트남식 등 각각의 특수성에만 매몰된 채 어떤 모델이 우수한가만을 따질 경우 그러한 우려는 현실화 된다. 특수이론은 일반이론에 기초하여서만 성립될 수 있으며 그 역은 아니다. 예컨대 <자본론>이라는 일반이론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우리는 영·미식 자본주의,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식 자본주의, 더 나아가 한국처럼 더욱 특수한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각국의 특수성에 주목하기에 앞서 이들 간의 공통분모가 없는지 그 일반법칙을 발견하는데 우선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지금시기 과거 소련으로 대표되었던 ‘계획경제’ 모델과 구분되는 ‘시장경제’ 모델의 성립 여부라 할 수 있다. 중국이 지금 시기 현실 사회주의 연구에 있어 초점이 되는 이유는 과거 고전적 자본주의 연구에 있어 영국이 그러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이다. 사회주의와 시장경제가 결합하는 문제에 있어 중국은 상대적으로 가장 성숙하고 풍부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지금 시기 일반적 ‘전형(典型)’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시장경제와의 전면적 결합은 현실 사회주의의 공통분모일 수 있는가? 사실 현 시점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과 베트남뿐이며, 쿠바와 북한은 이제 막 시장경제와 결합하기 시작하였을 뿐이다. 아직까지 후자에 있어 시장은 기존의 계획경제를 보충하는 수단일 뿐이며 지배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들 나라에 있어서도 계획과 시장의 비중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점이 먼저 규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그것이 ‘시장경제의 전일성 요구’와 관련되어 진다고 본다. 시장경제는 결코 부분적으로만 도입될 수 없으며, 오직 국민경제 전반에 실행되었을 때만 사회적 생산력을 장기적으로 발전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점이야말로 지난 40년 간 중국 개혁개방의 역사가 제공하는 귀중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약간 보충 설명을 하도록 하자.

중국도 처음에는 부분적으로만 시장경제를 도입하려고 하였다. 계획경제의 주도성을 강조한 ‘계획적 상품경제’ 이론이 초기에 유행하였던 것만 보아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진척에 따라 상품경제가 발전할 수록 이 같은 시장의 ‘부분적 활용’은 한계가 분명해 졌다. 왜냐하면 시장경제는 어중간한 계획과 시장의 결합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이중가격’ 문제이다. 만약 어떤 영역(예컨대 소비재부문)에서는 시장가격이 실행되고 다른 영역(예컨대 생산재부문)에서는 여전히 계획가격이 실행될 경우, 경제전반의 단일한 회계기준 성립은 불가능하게 되어 ‘원가계산’을 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소비재라 할지라도 최종생산물이 나오기까지는 중간에 원료나 중간재 등의 생산재가 포함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이 경우 어떻게 소비재 단계에서만 시장가격으로 계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듯 단일 기준에 입각한 원가계산이 불가능함으로 인해 경제 전반은 사실상 이윤계산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리하여 설령 어떤 기업이 이윤을 남겼다고 한들 그것이 정상적인 이윤인지 아니면 어떤 특혜에 입각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게 됨으로써 결국 기업의 효율성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된다.  
이중가격 문제는 그 뿐만 아니라 갖가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며 장기간 방치될 경우 큰 사회혼란을 초래한다. 계획가격이 실시되는 부문에선 실제 수요와 공급 상황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관계로, 대체로 인위적으로 시장가격보다 싼 가격이 정부에 의해 매겨진다. 이에 따라 수요가 공급보다 커져서 물품이 딸리는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결국 암시장이 형성되어 관료들은 원래 계획가격으로 공급되어야 할 물품을 빼돌려 그 몇 배의 가격으로 암시장에 판매함으로써 거액의 부를 축재한다. 또 중간 거간꾼들이 생겨 이들과의 뒷거래가 횡행하고 권력에 가까울수록 이권을 챙길 수 있어 부정부패가 만연한다. 

1989년 천안문사태의 배경에는 이 같은 사회 전반의 혼란이 있었다. 결국 국가는 시장경제를 통해 경제기제를 전일화 하든지, 아니며 다시 계획경제로 되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중국의 경우는 천안문사태를 겪은 후 3년의 ‘정돈기간’을 통해 거국적인 논쟁이 있었다. 1992년 봄 등소평의 남순강화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여행이자, 중국이 ‘전일적 시장경제’를 향해 나아갈 것을 최종 결정케 한 역사적 여행으로 중국인들에게 기억된다. 
되돌아보면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은 그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중도에 멈춰 섬으로써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1950년대 흐루시초프 개혁, 1960년대 브레즈네프 개혁이 그것이며, 중국의 대약진운동 실패 후 그 수습을 위해 실행되었던 개혁 등이 그러하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1992년 이후의 중국은 처음으로 그 선을 넘어선 국가이며, 기존의 ‘계획에 기초한 시장’에서, ‘시장에 기초한 계획’으로 양자 관계를 근본적으로 혁신시킨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다. 이후 중국의 발전은 그 선택이 올바랐음을 입증해준다. 이로써 ‘현대 사회주의’와 ‘구 사회주의’를 가르는 기준이 생겨났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사회에 상품경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소련의 스탈린시대에 이미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품관계가 사회주의경제의 어느 특정 영역과 부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이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볼 때 사회주의경제에 있어 상품관계의 '보편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자원배치 방식에 있어 ‘시장경제’의 ‘계획경제’에 대한 우월적 지위의 인정은 현대 사회주의와 구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쿠바나 북한과 같은 후발주자들도 시장경제와 전면 결합한 선행자들(중국, 베트남)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측면에서 보면 각국이 갖는 특수성은 잠시 무시해도 좋다고 본다. 만약 자국만은 그 같은 시장경제의 ‘과정’을 건너 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과거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발생하였던 레닌과 ‘나로드니끼(인민주의자)’ 간의 논쟁을 상기하게 만든다. 당시 나로드니끼는 가급적 자본주의의 폐해를 피하고 싶다는 주관적 열망에서, 러시아가 전통적 ‘미르’ 공동체에 입각하여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레닌은 그 같은 생각에 반대하였으며, 실제 러시아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겪었다. 이 같은 역사적 사례는 객관 경제법칙이 인간의 주관적 열망만으로는 피할 수 없으며, 그것을 인식한 사람들에 의해 단지 ‘이용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오늘날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 된다.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결합은 역사적 필연이며, 사회주의는 오직 시장경제와 전면적으로 결합함으로써만 자신의 사명인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준비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금번 현실 사회주의 문제를 토론함에 있어 우리는 먼저 지금 시기 현실 사회주의와 관련된 ‘일반법칙’을 찾는데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와 시장경제 결합의 필연성 여부를 확인한 뒤 비로소 각국의 특수성이 논의되는 것이 좋다. 그럴 경우 우리는 일반적 목표를 실현하는데 있어 각국이 갖는 다양한 경로나 경험을 존중할 수 있다. 이 같은 시각에서 보면 중국의 사례 역시 ‘특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중국은 농촌개혁으로부터 시작해서 도시개혁으로 나아갔으며, 동부 연안의 개방으로부터 점차 내륙지역의 개방으로 점진적 확장 방식을 취하였다. 그것은 거대한 국토와 인구를 갖는 중국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전략으로, 일종의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실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비교할 때 베트남은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보다 수출과 외자에 더 많은 의존성을 보여주며, 정치개혁에 있어선 그 진도가 중국보다 빠른 베트남식 사회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과 쿠바의 경우는 국토의 종심이 짧고 강력한 적대세력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같은 국가독점자본주의일지라도 영미식이 다르고 독일·일본식이 다른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보편성 하에서의 차이점이다.

끝으로 본 토론회가 한 가지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해 현장으로부터 온 일선 활동가들이 토론장에는 적지 않다는 점이다. 때문에 사구체 논쟁과 관련한 고도한 추상화와 함께, 가급적 논의의 구체화가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점이야말로 금번 토론회가 갖는 난점이라 할 수 있는데, 앞으로의 남은 두 차례 토론회도 현장의 실천적 요구를 결코 떠나서는 안 될 것이다.(끝)

김정호 약력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박사 학위 취득,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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