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고문은 지난 12월 15일 <현실사회주의 비교와 한국사회 미래 전망, 시리즈 토론회1>에서 제기된 쟁점에 대한 필자의 평가문이다. 기고문은 2회에 나누어 게재하며, 필자의 입장은 민플러스의 견해와 다를 수 있다. 

들어가며: 

필자는 얼마 전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제출하면서 12/15 토론회에 대한 간략한 소감을 곁들인 바 있다. 그리고 곧 이어 정식 평가문을 제출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토론회에 참석치 못한 분들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남은 두 차례의 토론회를 더욱 성과 있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이 같은 작업이 꼭 필요하리라 보여진다. 본 평가문은 지정토론자인 채만수, 이정구씨의 반론에 대한 회답도 포함한다. 

             [목차]
1. 토론회의 관심과 열기
2. 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단인가?
3. 왜 중국사회의 성격이 문제가 되는가?
4. 한 사회성격을 판단하는 기준

5. 생산관계(소유제) 측면에서 본 중국사회의 성격
6. 상부구조적 측면—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
7. 중국특색 사회주의가 한국변혁운동에 주는 시사점
8. 다뤄지지 못한 문제


1. 토론회의 관심과 열기

예상을 뛰어 넘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요즘 같은 때 이 같은 토론회는 참석인원이 20~30 명을 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추세에 비추어 본다면 70명에 달하는 참석자는 기대 이상의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토론회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 최근 들어 보다 확연해진 고양기 정세의 영향이다. 한국사회에서 1990년대 이래 형성된 비정규직에 기초한 후기 축적양식의 상대적 ‘안정기’는 끝났다. 이제는 본격적인 ‘불균형기’에 접어들었으며, 그에 따른 혼란과 동요 그리고 충돌의 시기가 기다리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축적양식을 대체할 새로운 양식이 나타날 때까지 이 같은 혼란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작금의 ‘조국사태’가 보여주듯 제 사회 집단 간의 강한 충돌 역시 계속될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한계는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중요한 정치개혁은 미적거려지며,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재벌개혁, 고속도로톨케이트투쟁에서 드러난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화 약속의 식언, 원위치로 되돌아가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과 누더기가 된 최저임금제 개선, 한미동맹의 굴레에 갇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외교정책 등은 머지않아 다가올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예고한다. 
둘째, 그럼에도 사분오열된 채 제대로 역할을 못하는 변혁진영에 대한 불만과 안타까움이 존재한다. 한국의 변혁진영은 지금처럼 중차대한 시기에 사회대개혁의 임무를 문재인정부와 같은 불철저한 자유주의세력에게 맡겨둔 채 거의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통일된 대오가 없기에 정국에 대한 힘 있는 개입이 어려우며, 자유주의자와 ‘헤게모니’를 다투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금 변혁진영이 단일 대오를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인식상의 차이’이다. 원래 진정한 변혁정당은 사상통일에 입각하여 건설되며 당은 그 물질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변혁진영 내의 전술·강령 상의 차이가 하나의 대오로 결집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이 토론회에 거는 주변의 관심은 한 마디로 하루 빨리 인식의 통일을 이루어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여, 최근 심상치 않은 국내외 정세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2. 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단인가?

현재의 변혁진영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기획토론회가 그 주제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단 문제를 선정한 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 변혁운동의 전망문제 즉 대안사회와 관련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한국 변혁운동과 노동운동은 대안의 부재 속에 시간이 갈수록 경제주의, 조합주의, 대중추수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이 같은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방향과 관련한 강령문제가 일차적으로 해결되어질 필요가 있다. 나아가야 할 목표를 분명히 할 때 한국 변혁운동은 새로운 힘과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방향을 찾기 위해 그동안 일부에서는 맑스주의 원전으로 돌아갔으며, 또 일부는 각종 서구 좌파의 철학과 이론들을 탐구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몬드라곤 공동체’와 같은 다양한 협동조합주의적 실험을 연구하고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현실 운동이 요구하는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한국 변혁운동은 더욱 파편화되어 갔다.

이리하여 우리의 시선은 다시 현실 사회주의로 돌아오게 되었다. 최근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그래도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주의를 통해 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구권 해체 이후에도 나름대로 자기 개혁을 계속한 중국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 동안의 성과를 발판으로 지금 세계무대에 전면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 변혁운동은 ‘대안’과 ‘깃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국가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들에 대한 판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이들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주변에는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거나 스스로 사회주의국가임을 천명하고 있으며,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경제 및 정치구조,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간 이들이 기존 사회주의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였으며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유효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실험이 한국적 현실에 어떠한 시사를 주는지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한국 변혁운동의 대안 모색과 관련하여 이들은 사실 가장 먼저 주목받고 연구되어야 할 대상들이었음에도 약간 때 늦은 감이 있다.

지금 다시 우리가 이 같은 ‘전망문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기존 정파나 단체들이 제기한 이론과 노선이 그간 별반 유효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다. 그 같은 이론의 한끝에는 [노동자연대]와 같은 그룹이 제시하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있다. 이들은 현실 사회주의를 전면 부정할 뿐만 아니라, 기존 소련과 동구의 과거 사회주의 역사를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과 구분되는 다른 끝에는 과거 소련식 사회주의를 그대로 고수하고자 하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가 있다. 이들은 소련과 동구권이 해체된 것은 계획경제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필자가 이 둘을 특별히 꼬집어 말하는 것은, 현재 한국변혁진영의 다른 단체나 정파들은 이 양 극단의 스펙트럼 속에 어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간 실패의 주요한 책임은 [노동자연대]를 비롯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 져야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장은 현재 변혁진영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노동사회과학연구소]와 같은 입장은 매우 소수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 이론들은 단지 대안적 사회주의이론을 제시하는데 있어 실패한 것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지구화시대의 자본주의, 한국적 현실인 비정규직문제와 재벌문제, 그리고 통일과 반외세문제 등 우리 주변의 현실을 규명하는데 있어서도 실패하였다. 그 때문에 이들 이론은 그간 무수한 잘못된 실천을 낳았으며 그로 인해 변혁운동의 발전에 대한 기여도는 매우 적었다. 이제 새로운 이론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재미있게도 이 양 정파를 대표하는 동지들이 이날 현실 사회주의를 토론하는 자리에 ‘지정토론자’로 출현함으로써 발제자인 필자 및 정성희씨와의 날카로운 설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하 글의 서술은 주로 필자의 발제와 관련한 부분에 국한하여 전개한다.

▲ 지난 2017년 10월 24일 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 폐막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집권이념인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당장에 삽입됐다.[사진 : 뉴시스]

3. 왜 중국사회의 성격이 문제가 되는가?

먼저 왜 중국사회의 성격이 이날 토론회의 주요 초점이 되었는지를 밝혀야겠다. 21세기 들어 급격히 부상하면서 국제정세 변화의 핵이 된 중국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중국의 궐기가 사회주의국가의 부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자본주의 신흥 강대국의 부상인가에 대해선 한국 변혁진영 내에 적지 않은 이견이 존재한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자칭하고 있지만, 또 일반적으로는 그것이 국제적으로도 공인되는 바이지만,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모습은 ‘우리가 익숙한 사회주의’와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선뜻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에는 망설여지게 된다. 중국의 거리엔 상품이 넘쳐나지만, 그것들은 모두 화폐가 있어야 구매할 수 있다. 심지어 주택까지도 시장을 통해 구입하여야 하며 부동산투기도 존재한다고 한다. 민간 기업들이 활개를 치고, 외국자본인 다국적기업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사회주의임에도 노동자는 여전히 ‘임노동자’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채 노동시장에서 스스로 직업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 때문에 실업자도 있다. 그밖에 빈부격차, 농민공 문제 등 기존의 사회주의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목격된다. 따라서 중국이 여전히 사회주의인지 아닌지, 즉 중국의 궐기가 사회주의라는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닌지, 그리하여 사회주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인지가 검토될 필요가 있다.
 
4. 한 사회성격을 판단하는 기준

그렇다면 한 사회의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맑스주의적 전통에 입각한다면, 그것은 생산관계의 핵심인 '소유제'와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 두 가지이다. 이러한 기준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여 지며 당일 토론회에서도 이 기준 자체에 대한 이견이나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기준은 제시되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문제들, 예컨대 ‘빈부격차’와 같은 사회적 현상들은 사회성격 논쟁에서는 잠시 ‘부차화’ 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하지만 당일 토론회에서 지정토론자와 청중은 모두 이 문제를 많이 제기하였다.

1) 먼저 왜 위의 ‘기준’이 성립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사적 유물론’의 기본 관점과 관련이 있다. 사적 유물론은 ’물질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생산방식은 다른 사회생활, 정치생활, 정신생활의 일반적 과정을 결정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 일차적 지상명제는 ‘생존’이라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먹고사는 문제로서의 ‘경제활동’이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실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맑스, <독일이데올로기>). 인간은 이 같은 경제활동을 위해 자연과 상대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한 전제로써 먼저 인간 상호 간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생산관계’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생산관계 중에서도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관계 즉 ’소유관계‘가 핵심이며, 그 소유관계 때문에 바로 ‘계급’이 생겨난다. 이렇듯 생산관계는 소유관계를 통해 ’계급‘ 범주와 연결되며, 따라서 한 사회의 성격은 우선적으로 소유제를 통해 판별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사회 성격을 판별하는데 있어서 아직 이것만 가지고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소유제 외에도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판별이 필요한데, 그것은 기존의 소유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국가권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우리가 역사적 사례를 보게 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흥 계급이 새롭게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기존 통치계급으로부터 국가권력을 탈취하여야 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노동자계급은 국가권력을 탈취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소멸할 수 있었으며, 이후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국유소유, 집체소유)를 수립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1991년 옐친을 앞세운 자본가계급에게 소련의 국가권력이 탈취당하자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급속히 해체되고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부활하였다. 따라서 국가권력을 어떤 계급이 장악하느냐는 한 사회의 성격을 판단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

언뜻 이 두 가지 기준에 참석자들은 별반 이의가 없는 듯 보였는데, 실제 토론회 진행과정에서 지정토론자로 나선 [노사과연]의 채만수 소장과 [노동자연대]의 이정구씨는 모두 사회주의와 계획경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결코 분리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렇게 되면 사회성격 기준으로 앞서 동의한 것 외에도 시장과 계획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올바른 것일까?
채만수 소장이 왜 그 같은 주장을 하였는지 토론회 당시의 발언만 가지고서는 충분히 그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일단 필자가 기억나는 대로 당시 그의 발언을 정리하면,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은 사실상 주주의 기업일 뿐 전체 사회 공동체의 기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국가가 최대 주주일지라도 일단 시장경제 속의 국유기업은 그 목적이 ‘이윤창출’에 두어지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의미에서의 국유기업이 될 수 없다는 논지였던 것 같다. 
필자는 이 같은 견해에 대해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중국과 같은 조건에서는) 일단 국가가 최대주주일 경우에는 여전히 그 기업은 공유제적 성격을 간직한다고 본다. 이에 대한 설명은 필자가 발제문으로 제출한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에서 하였다고 보여지며,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하에서는 (노동자는) 노동시장을 통해 국유기업에 고용될 것이며, 그럴 경우 그는 노동력에 대한 당시의 시장 평균임금 수준에서 고용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경우 분명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라는 ‘노동력상품’에 대한 가치 규정이 관철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착취관계가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관건은 이 경우 그가 국유기업에서 자신의 재생산 비용 이상으로 창조한 가치가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달려있다. 그것은 자본가의 몫으로 전환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가 고용된 직장이 국유기업인 이상, 그 국유기업의 이윤(즉 잉여가치의 전화형태)은 국가의 몫으로 되며, 다시 그것은 최종적으로 본인을 포함한 전 인민에게로 돌아온다. 예컨대 현재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국유기업 → 국유자산관리감독위원회(혹은 재정부) → 전국인민대표자회의 → 인민의 순서를 밟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 같은 이윤의 전 사회적 환원을 통해 그것을 생산한 노동자 자신도 그 혜택을 보게 된다.”

위 발제문에서 필자는 분명히 시장 즉 ‘유통과정’에서는 착취가 발생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시장경제 존재유무를 가지고 착취사회인지 아닌지 판단의 표식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생산관계(소유제)와 결합될 때만 가치법칙은 잉여가치법칙으로, 노동자가 지출한 잉여노동은 자본가의 몫으로 전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회의 경제가 국유기업 등 공유제가 주도하는 경제일 경우, 그것이 시장경제를 실시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경제는 분명 사회주의적 성격을 갖게 된다. 예컨대 2018년 삼성전자가 벌어들인 50조원의 이윤 대부분은 당시 57% 지분을 가진 외국인 투자자와 이재용 일가와 같은 ‘사적자본’의 몫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중국 국유기업인 공상은행이 2017년 벌어들인 동일한 50조원의 이윤은 80%의 지분을 가진 국가로 대부분 귀속되며, 그를 통해 결국 사회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결국 채만수씨와 이정구씨의 앞서 사회주의와 계획경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은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시장경제와 잉여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양자의 구분을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생각된다.
 
2) 여기서 <노동자연대>의 이론가인 이정구씨는 한 발 더 나아가 매우 심오한 발언을 하였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가치법칙은 유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물건이 어떠어떠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고, 그 안에 잉여가치가 포함되기 때문에 가치법칙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반면 진정한 사회주의라면 가치법칙이 적용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https://wspaper.org/article/23111)

상품의 가치가 그것의 생산에 지출된 필요노동시간으로 결정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된 상품의 가치 안에 이미 잉여가치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즉 가치법칙은 잉여가치법칙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것은 참으로 심오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가치설’은 맑스의 이론이 아니며 그에 앞서 부르주아경제학자들인 아담 스미스나 리카르도 등도 이미 이 같은 학설에 입각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맑스의 공적은 ‘잉여가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밝힌데 있다. 즉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가치법칙에 따른 등가교환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의 이윤이 도대체 어디서 생성되는지를 최초로 규명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맑스는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시장(즉 유통과정)이 아닌 생산과정에 주목하였다. 자본가는 시장에서 노동자를 구매(사실은 ‘노동력’을 구매)한 후 그 노동자를 공장으로 데려온다. 그 계약을 위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그와 그의 가족이 생존할 수 있는 임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여기까지는 가치법칙에 의한 등가교환이 이루어졌을 뿐이며, 이 모든 과정은 ‘시장’ 즉 ‘유통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교환행위만 가지고서는 우리는 어떠한 ‘착취’ 행위도 발견할 수가 없다. 잉여가치의 비밀은 자본가가 이렇게 고용한 노동자를 공장으로 데려온 후 그의 노동력을 실제 사용케 하는 과정(즉 생산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관찰될 수 있다. 예컨대 노동자는 원래 4시간만 일하는 것으로도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노동을 다한 셈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그것을 초과해 8시간 일을 시키고 나머지 4시간을 자신이 가져가 버린다. 이 지불되지 않은 노동 즉 ‘부불노동(不佛勞動)’이 바로 ‘잉여가치’이며 그것은 자본가의 ‘이윤’의 원천이 된다. 
여기서 분명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이 분리하여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실제 양자는 완전히 서로 다른 개념이다. 맑스의 공적은 바로 가치법칙이 아닌 잉여가치법칙의 발견에 있다. 이점은 정치경제학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정구씨와 같은 분이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일치시키기 위해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 두 범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계속)

김정호 약력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박사 학위 취득,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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