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9) - 1950년 7월 20일 영덕 옥산리

구암산 토벌 작전을 마친 해군육전대가 1950년 7월 20일 영덕 달산면 옥산리를 공격하여 1개 소대를 물리치고 인민위원장과 여성동맹위원장을 납치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848쪽) 
비록 부역 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민위원장과 여성동맹위원장은 민간인이었음은 분명했다. 게다가 시기로 보아 당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는 거짓 조작된 억지 주장임이 명백했다.

▲ 그림1) 『한국전쟁사』 제2권 848쪽

인민위원장 등을 생포했다?

1950년 7월 말 동해바다는 미 해군이 장악했지만 지상의 전투는 여전히 인민군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포항경비사령부는 지상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 7월 20일 용호대와 강호대를 통합하여 전투력이 강화된 새로운 육전대를 조직했다. 새롭게 강화된 해군 육전대는 재편된 날인 1950년 7월 20일 영덕 달산면 옥산리에서 인민군 1개 소대를 포위하여 공격하여 격멸했으며 이후 옥산리 인민위원장과 여성동맹위원장을 생포하여 후퇴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사』는 이 공격에 대해 “7월 20일 구암산 전투를 끝마친 육전대는 옥산동으로 출동하여 적 1개 소대를 완전 포위 격멸하였다. 이곳에서 옥산동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여성동맹 위원장을 생포하여 흥해로 빠져 나왔다. 한편 영덕에 침입한 적들은 100여 명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다수의 가옥을 소각한 다음 창포로 침입하였다.”라고 설명하는데 그쳤다. 여기서 말하는 흥해는 흥해읍, 창포는 영덕읍 창포리를 말하는데, 해군 육전대가 옥산리에서 나와 흥해읍으로 빠져 나왔다면 육로가 아니라 해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 그림2) 해군에 의해 주민들이 납치되었다는 달산면 옥산1리 마을 모습. 주민들은 경비를 섰던 주민들이 좌익 활동을 했다며 큰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했다. 2019년 10월 22일

있지도 않은 인민위원회에 위원장이 있었을까?

『한국전쟁사』는 이 이상의 전과나 노획물 등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는데, 인민군 1개 소대를 공격하여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시 지리적 위치나 전투 상황으로 보아 1개 소대의 인민군이 당시 달산면 옥산리에 주둔하고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라주바예프에 따르면, 인민군 5사단은 7월 19일 오후 7시 영덕을 점령했으나 국군이 7월 20일 강구에 1개 연대 병력을 상륙시키자 7월 21일 영덕을 포기하고 후퇴했다가 7월 23일 영덕을 재점령했다고 한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348쪽) 달산면 옥산리는 영덕읍으로부터 서남쪽으로 10km 가량 떨어져 있었으므로 7월 20일이면 아직 인민군이 들어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해군이 인민위원장 등 주민들은 왜 끌고 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 민간인 납치를 전투 성과라고 생각했다면 끌려나온 이들 민간인들은 결국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해로를 이용했다면 증거인멸을 위해 선상에서 총살했을 수 있다. 이번 해군 육전대의 옥산리 공격은 인민군 점령지를 공격해 민간인을 납치한 첫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건 발생 시기를 따져보면 인민위원회 등이 구성될 시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라주바예프의 주장에 따라 7월 19일 영덕을 인민군이 점령했다면 하루만인 7월 20일 영덕 달산면 옥산리에 인민위원회가 구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민군이 영덕 지역을 안정적으로 점령한 기간은 8월 17일부터 9월 24일까지였으므로 그 전에 인민위원장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마을에서 주민 누군가를 납치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들이 인민위원장과 여성동맹위원장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인민위원장이나 여성동맹위원장의 직책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해군이 적국민으로 인식하여 민간인을 공격, 납치한 행위는 전쟁범죄를 구성하는데 변함이 없다. 더군다나 일반 주민들을 납치하여 인민위원장 등으로 조작하여 합리화시킨 것이었다면 그 죄질은 더욱 나쁘다.

▲ 그림3) 옥산3리 바들기 마을은 전쟁 당시 20여 호가 살던 마을이었지만 토벌 작전 후 3~4호만 남았다고 한다. 최근 주민들은 모두 사라지고 절이 하나 남았지만 그 조차도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2019년 10월 22일.

비슷한 사례

인민군이 점령 직전 또는 직후였으므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지도 않았던 시기에 인민위원장 등을 사살했다는 사례가 충남 보령군 대천에서 있었다. 
『한국전쟁사』 제2권 943쪽에 따르면 1950년 7월 15일 충청남도비상경비사령부(사령관 경무관 이순구) 전투경찰 1대대 대장 윤석열 총경이 “(아침) 10시에 제1중대원 130명을 직접 지휘하여 대천으로 진격하였다. 16:00에 동 중대는 강행군으로 대천 동쪽 능선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식사 중인 적 일단을 포착하고 이를 포위 공격함으로써 불의에 기습공격을 받은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미처 응전도 해보지 못하고 지리멸렬되었다. 이리하여 전경 제1중대는 이곳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2명을 포로로 하는 한편 대천 인민위원장과 자위대 간부 등 지방공비 40명을 사살하였으며 무전기 1대, 소총 8정, 실탄 2상자 그리고 TNT 3상자를 노획하는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주장을 받아들여 7월 15일 인민군이 대천까지 진입했다고 보더라도 벌써 인민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살당한 40여 명의 지방공비는 일반 민간인들일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민간인을 학살한 전쟁범죄가 전투의 성과로 포장된 명백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 사례에서는 적으로부터 노획했다고 주장하는 무기가 무장한 인민군의 수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보아 조작되었거나 과장되었음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한국전쟁사』 서술의 전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지명이 없이 “대천 동쪽 능선”이라고만 적고 있어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된 옥산리 민간인 피해

1960년 국회보고서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던 달산면 옥산리 주민 주홍석, 박수경, 윤봉학 등이 영덕읍 구미리 앞산에서 맹호부대에게 총살당했다. 

▲ 그림4) 영덕읍 구미1리 앞산의 모습.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마을이 도로변과 수직으로 형성되어 있어 저 산이 앞산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전쟁 당시 민간인들이 총살당한 구미리 앞산이 저 산을 말한다고 증언했다. 2019년 10월 22일.

경북대학교 평화문제연구소의 2009년 조사에 따르면, 20여 호가 살던 옥산리 바들기 마을에서 주완석, 주기석, 김해도, 윤봉학, 노흥수, 주재석, 주춘택, 이분학 등 8명이 군경 토벌대에 사살당했는데 전쟁이 끝나자 마을에는 3~4호의 가구만 남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고 한다. 희생자 중 이분학은 바들기 마을에서 소개되어 다른 마을에서 지내던 중 산에서 지내던 아들 주재석을 만나러 가다가 맹호부대에게 잡혀 총살당했다고 알려져 있었다.(『2009년 피해자현황조사 연구용역사업 최종결과보고서(경상북도 영덕군)』, 157쪽)
2019년 10월 22일 필자와 면담한 옥산리 신정희(87세) 씨는 옥산리에도 똑똑한 청년들이 몇 집에 있었는데 전쟁 초기에 빨갱이라며 잡혀가 산에서 희생되었다고 증언했다. 신 할머니는 희생 시기를 명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들이 인민군 진입 전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되었거나 수복 후 부역혐의로 희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해군 육전대에 의해 끌려갔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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