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8) - 1950년 7월 26일 영동 노근리

민간인을 학살한 군대가 이 범죄를 적군에게 덮어씌운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영동에서 있었다. 영동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 영동읍 주곡리, 임계리 등에 살던 주민들이 미군에 의해 소개당하는 과정에서 미 전투기의 폭격과 미 1기갑사단 7기갑연대 2대대의 공격으로 경부선 철로와 노근리 쌍굴다리 아래에서 집단희생 당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4백 명 넘는 피란민들이 미군의 조준 사격으로 사망했다.

1997년 생존자와 유족들이 미국에 피해 배상을 신청하자 미군은 한국 검찰에 당시 미 1기병사단 소속 군인들이 노근리 지역에 주둔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답변했다(최상훈 등, 『노근리 다리』, 6쪽, 22쪽).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증명할 거지?’라고 되묻는 오만한 태도였다.

『한국전쟁사』에는 황간면에 진입한 인민군이 전차로 위협하며 피란민을 앞세워 미군의 지뢰지대를 무력화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정작 피란민을 소개한 군대는 미군이었으면서도 가해자였던 미군을 인도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것은 노근리 희생자 유족들에게는 피란민의 존재를 인정한 유일한 증거였다. 이 시기 황간면에는 아직 인민군이 진입하지 않고 있었으니 피란민들의 죽음은 인민군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은 명백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 『한국전쟁사』 제2권 551쪽. 7월 26일 영동 황간면에서 수백 명이 이동한 사례는 노근리가 유일하다. 미군은 26일부터 29일 사이 노근리 쌍굴다리 위와 아래에서 피란민 400여 명을 사살했다.

 

▲ 노근리 평화공원 전경. 1950년 7월 26일 당시 미 1기갑사단 7기갑연대 2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다. 2019년 4월 19일 조사.

1997년 의문이 제기되다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유족회 측은 진정인 대표 정은용 명의로 1997년 9월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이미 노근리 사건에 대한 전쟁사의 왜곡 사실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에 “미 제5기병연대는 그들이 배치되어 있던 영동 동측방에서 7월26일 수백 명의 선량한 피란민을 횡대로 벌려 세우고 전차와 총검으로 위협하여 지뢰지대로 내몰아 지뢰를 폭파시키면서 접근하는 인민군 9연대에 맞서 7월28일까지 완강히 진지를 방어했다”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같은 내용이 일본 육전사 연구 보급회에서 발간한 『한국전쟁』과 미 1기병사단사에서도 확인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진정서는 “미국 측으로부터 자료를 입수하여 기술한 것이 분명한 상기 두 책의 기록들이나 미 제1기병사단사의 기록은, 미군이 우리 피란민들을 살상한 사건을 인민군에 의한 것이라고 잘못 기술한 것으로 사료”된다고 주장했다.

위 진정서는 주장의 근거를 제시했다. 미 1기병사단사의 내용 중에는 26일 영동읍내의 인민군을 미 공군이 폭격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인민군은 당시 아직 영동읍내에 있었으므로 황간면까지 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만약 26일 전투가 있었다면 미 1기병사단 사령부가 29일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니, 따라서 26일 피해를 입은 피란민은 노근리 사건 희생자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최상훈 등, 앞의 책, 377쪽).

이는 노근리 주변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동하던 수백 명의 피란민이 피해를 입은 사실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 주요 목적이었지만, 이를 근거로 미군이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인민군에게 덮어씌우려는 역사 왜곡 행위를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기도 했다.

학살의 합리화, 피란민 속의 유격대

미 1기갑사단에는 5기갑연대와 7기갑연대, 8기갑연대가 속해 있었다. 사단 본부와 5, 8기갑연대는 7월18일 먼저 포항에 상륙한 뒤 7월20일 영동에 도착했지만, 후발 부대였던 7기갑연대는 태풍으로 7월22일에야 포항에 상륙하여 25일 노근리 부근에 배치될 수 있었다. 7기갑연대 1대대는 미 25사단 35연대 1대대의 포항비행장 경비 임무를 이어받았으며, 2대대는 영동을 향하여 출발한 뒤 25일 영동 노근리에 인접한 추풍령에 도달했다.

7월20일은 미 24사단이 대전을 내주고 후퇴를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영동 전선을 시찰하던 조병옥은 뜬금없이 인민군 유격대가 피란민을 가장하여 후방으로 침투할 것을 막기 위한다면서 미군에게 한국 경찰을 배속시켜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한국경찰을 미군에 배속시켜 통역을 비롯해 지방공비 색출의 임무를 맡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군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전투 과정에서 피란민 속에 섞여 있는 게릴라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문제는 피란 민간인과 국군 패잔병, 대한청년단, 심지어 인민군조차 구별해 낼 능력이 없는 상황 그 자체에 있었을 것이다.

1950년 7월22일, 미군 지휘부는 인민군이 대전과 무주 두 방면에서 영동으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미 8기갑연대 1대대를 대전에서 영동으로 들어오는 경부국도 약목리에, 2대대를 무주에서 영동으로 들어오는 도로에 있는 유점리 갈령에 배치했다. 미 1기갑사단의 사단 지휘소는 황간면사무소 소재지에 설치되어 있었다.

7월23일, 미 7기갑연대보다 먼저 영동에 주둔했던 미 8기갑연대 2대대가 게릴라에게 습격당해 큰 피해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사』가 설명하는 전투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피해는 인민군 게릴라의 습격 때문이 아니라 금산 또는 무주 방면에서 진입한 인민군 정규군 3사단 7연대와 9연대가 우회하여 가한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날 새벽 인민군 3사단 8연대가 금강을 건너면서 약목리에 주둔하던 미 8기갑연대 1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저지당했다. 반면 미 8기갑연대 2대대를 공격하던 인민군 3사단 7, 9연대는 갈령을 우회하여 후방인 묘동을 점령하면서 미 2대대의 퇴로를 막았던 것이다. 인민군 정규군에게 우회로를 돌파당했던 미군이 마치 게릴라에게 예상하지 못한 기습 공격을 당했던 것처럼 조작해 보고했던 것이다.

임산부가 무전기를 숨겼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피란민 속에 게릴라가 있었다는 주장은 인민군이 미군의 후퇴로를 돌파하는 과정인 7월24일에 등장한다. 위 책 2권 549~550쪽에는 “한 피란민 부부를 검색한 결과 임신부로 보이는 여인의 옷 속에서 소형 무전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 발각되었는데, 이는 그 무전기로 미군의 진지배치 상태와 포진지의 위치 등을 보고키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라고 했다.

▲ 『한국전쟁사』 제2권 549쪽과 550쪽. 한국전쟁 당시 사용되던 무전기는 소형이라고 하더라도 임산부의 옷 속에 숨겨지기 어려워 보이며, 보고했다가 아니라 “보고키로 되어 있었다”는 서술로 보아 이 임산부가 갖고 있었다는 소형 무전기는, 체포 직전 포병대대가 습격당한 피해 사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오직 자백에 의존했던 당시의 조사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인 남성 한 손에 겨우 잡힐, 30cm 길이에 4kg 정도였을 소형 무전기의 실체도 의심스럽지만 이를 임산부의 옷에 숨길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임산부가 입은 옷까지, 실제 속옷이었을 것인데 이를 검색했다는 사실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임산부 부부 게릴라의 임무가 미군 진지의 배치상태를 “보고키로 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어이없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진실이 담겨있다. 즉, 발각될 때까지 무전기를 통해 보고한 적이 없었다는 뜻이므로 이 무전기가 체포 직전에 미군 포병대대들이 당한 습격과 무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서술만으로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당사자가 강력히 부인하는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여튼 인민군의 우회 차단에 실패한 것이 가장 큰 패전 요인이었음에도 이를 한 임산부가 숨겼다는 무전기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있었고, 이 사건을 빌미로 이전부터 UN군에 한국 경찰을 배속해 달라고 요청해왔던 조병옥이 워커에게 다시 한번 한국경찰 배속을 요청하여 결국 미 국방성이 이 요청을 승인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3권, 590쪽). 미군 역시 이 사건 후 피란민의 검색을 더욱 강화했으며, 피란민이 이동할 경우 지정된 도로를 낮시간만 이용하도록 통제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에서 인민군 유격대의 후방 침투를 우려한 조처라고 설명했지만 7월23일은 낙동강 전선이 생기기 훨씬 이전이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인민군에게 무주도로를 돌파당한 미군은 결국 7월25일 영동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피란민으로 위장한 게릴라”, 사실일까?

게릴라들이 피란민으로 위장하여 공격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이 주장이 허구라는 주장 역시 오래전부터 있었다.

데이비드 콩드는 미국의 언론을 인용하여 1950년 7월7일부터 맥아더 사령부가 피란민 사이에 불신을 퍼뜨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내용은 ‘우수한 화력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인민군은 유격대의 형태로 피란민 속에 섞여 전선을 통과했다’고 소개하면서 맥아더사령부가 ‘침투자’, ‘유격대’, ‘피란민을 가장한 붉은 병사’라는 문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다(『한국전쟁 또 하나의 시각』 1권, 156~157쪽). 이는 “피란민을 가장한 적”의 논리는 인민군이 어떻게 전선을 통과했는지 설명하기 위해 미군이 만든 억지 주장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실제 미군은 적이 잠복하고 있을지 모른다며 시골 마을을 초토화 시켰고, 흰옷을 입은 인민군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며 피란민에 대해 무차별 사격을 가한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그는 또한 한국전쟁 당시 AP통신을 인용하여 미군 병사들이 당시 피란민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설명했다. 통신은 “남한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미 육군 병사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자기들의 전쟁인데도 남한인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중략)… 그들은 병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 시골에서 놀며 지내거나 비전투 피란민과 함께 걷고 있는 것에 화가 치밀어서 어쩔 줄을 몰라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라고 보도하면서 미군들은 피란민 대열 속의 청년들이 이승만 정부의 친위 부대인 대한청년단원들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한국전쟁 또 하나의 시각』 1권, 153쪽).

한편, 전쟁 초기 이미 미군의 피란민 공격 정책이 세워졌다는 사실과 함께 당시 내무부장관 조병옥 같은 자들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그는 “나는 미 제24사단이 대전을 상실하고 김천에다 전선사령부를 설치할 무렵 영동 전선을 시찰한 바 있다. 나는 그때 영동지구 미군 사령관에게 공산 오열들이 농부를 가장하고 야습할 우려가 있다고 개진한 바 있었고”라고 했다(『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인식』 1권, 282쪽, 조병옥, 258~259쪽 재인용). 영동 전선이 생겼을 때는 노근리 사건이 벌어지던 1950년 7월25일 전후로 피란민 학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때였음에 주목해야 한다.

학살로 끝난 소개 작전

1950년 7월23일 영동읍 주곡리 주민들에게 소개명령이 내려오자 주곡리 주민들은 일단 임계리로 피란해야 했다. 7월25일 임계리에 모인 피란민들은 임계리 주민을 포함해 모두 500~6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을 소개하던 미군은 그날 밤 동안 피란민에게 하가리 하천에서 야영하게 했다.

26일 아침 미군들이 사라지자 일부 주민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갔고 나머지 주민들은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신탄리 고개에서 바리케이드를 친 또 다른 부대의 미군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피란민들의 몸을 수색한 뒤 곧 철길로 올라가게 했다. 잠시 뒤 한 미군이 무전통신을 한 뒤 사라졌고, 이 틈에 미군 정찰기의 비행 후 전폭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마치 미군이 무전통신으로 폭격기를 불렀던 것으로 보였다.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피란민들은 노근리 쌍굴다리 밑으로 피란했지만 다시 미 지상군의 공격을 받았다. 피란민들이 움직일 때마다 미군의 사격이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공격은 29일 아침까지 계속되었으니 무려 3박 4일 동안 가해진 공격으로 3백여 명의 피란민이 또 사살당했다. 미군이 후퇴하자 학살은 중단되었고 잠시 뒤 인민군이 진입했다.

▲ 노근리 쌍굴다리로 피신한 주민들을 미 지상군이 기관총 등으로 공격했다. 70년이 지난 지금, 다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총탄 자욱이 참혹했던 그 날의 진실을 알려준다. 2019년 4월 19일 조사.

전쟁범죄를 은폐하는 또 다른 방식

1950년 7월25일 밤 미 25사단 27연대가 영동군 용산면 매금리에서 교전 중이었음에도 미 1기갑사단 7기갑연대장에게는 미 27연대의 진지가 인민군에게 돌파당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오보를 받은 7기갑연대장은 전투 경험이 없는 2대대가 인민군의 야간 공격을 견디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철수 명령을 내리자 대대는 곧 큰 혼란에 빠졌다. 당시 사병들이 버린 무기만 기관총 14정, M1 소총 120정, 박격포 6문, 무전기 9대 등이었다고 한다.

잘못된 정보였음을 깨달은 연대장은 27일 2대대를 수습하여 황간으로 이동하여 송천 남안에 진지를 구축했다. 보은에서 후퇴하는 미 27연대를 엄호함과 동시에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송천의 물길에서 보은과 황간을 연결한 도로와 인접한 지점은 황간면 노근리와 인접한 황간면 마산리였으므로 송천 남안은 노근리 인근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동한 7기갑연대 2대대가 진지를 구축하는 사이인 7월25일 밤, 영동에서 후퇴한 5기갑연대와 8기갑연대도 영동 동쪽, 즉 황간면 남성리 부근에서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다. 이때 5기갑연대인지 아니면 8기갑연대인지, 또는 (다른 날짜라면, 아래 원문의 문맥상) 7기갑연대인지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미군들이 피란민들을 앞세우고 지뢰지대를 돌파하는 인민군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용어를 약간 풀어 원문을 소개한다.

“그런데 26일 새벽에 수백 명의 피란민이 횡대로 늘어서서 지뢰지대를 통과하여 진지 앞으로 접근하였는데, 그 뒤에는 4대의 적 전차와 적의 보병이 피란민의 등 뒤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하여 피란민으로써 지뢰를 폭발케 하는 악랄한 살인행위를 자행하여 지뢰의 제거를 기도하였는데, 피란민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달아나자 가차없이 이를 사살하는 것이었다. 미군 병사들이 이를 보고서도 차마 사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피란민으로써 지뢰지대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지뢰지대를 대신하여 포병이 탄막을 둘러쳐서 적의 접근을 막았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551~552쪽)

『한국전쟁사』는 이를 목격한 미군이 마치 5기갑연대와 8기갑연대였던 것처럼 보이게 서술했다. 하지만 서로 주둔지가 달랐을 두 기갑연대 앞으로 피란민 집단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피란민이 나타났다는 26일 날짜를 제외하고 (문맥을 자세히 보면) 이 장면의 목격자는 7기갑연대 2대대의 군인들일 가능성이 더 높다.

2019년 4월19일 필자와 면담했던 정구도 노근리평화재단 이사장에 따르면, 황간면 일대에서 수백 명의 피란민이 이동한 경우는 노근리 희생자 집단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고 했다. 당시 노근리에는 7기갑연대 연대본부와 2대대 대대본부도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노근리보다 후방에 해당하는 황간면 남성리에 주둔한 미 5, 8기갑연대가 26일 인민군 전차의 공격을 받았다면 이는 노근리의 7기갑연대 군인들이 완전히 포위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미 5, 8기갑연대가 29일까지 버티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 황간역에서 읍내를 내려다본 모습. 미 1기갑사단 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2019년 4월 19일 조사.

미군의 증언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위 서술은,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 널리 알려진 지금에 보면 대단히 악의적임을 알 수 있다. 출처로 짐작되는 미 7기갑연대 1대대의 7월28일 보고에는 1대대의 좌우측에서 침투하려는 인민군을 일시적으로 격퇴시켰는데 “적은 민간인 군중을 앞세워 공격하는 그들의 전형적인 전술을 썼다”(The enemy was following a typical pattern of attack by forcing mobs of civillians ahead of their troops into the line of fire)라고 했다(방선주 저작집 3, 180쪽). 이 시기는 바로 노근리 사건이 일어난 시기이고 1대대는 노근리 사건을 일으킨 7기갑연대의 소속이다.

미군은 인민군이 피란민에 섞여서 진지를 통과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렇게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보고가 미 5기갑연대나 8기갑연대가 아니라 미 7기갑연대의 보고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한국전쟁사』가 7기갑연대의 보고를 5기갑연대 또는 8기갑연대의 보고로 둔갑시켜 진실을 호도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 7월26일 영동읍의 주민들을 황간면으로 소개시킨 주체는 인민군이 아니라 미군이었음은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황간면 일대에 인민군이 있었을까?

7월26일에는 노근리의 미군뿐 아니라 황간면사무소가 있던 남성리의 미군들 역시 인민군을 목격할 수 없었다. 노근리에 주둔하던 미군이 상부의 명령에 따라 쌍굴다리 아래 있던 피란민들을 사살하다 후퇴했을 뿐이었다.

사건 당시 인민군이 영동을 점령한 것은 맞지만 노근리까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소련 군사고문관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인민군 3사단은 7월25일) 밤 8시에 영동을 점령하였다. 도시 점령 전투 결과 미 25보병사단은 900명 이상의 병사 및 장교를 상실하였으며 전차 6대를 파괴당하였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214쪽)라고 했으며, 같은 책 다른 곳에서는 “인민군 3사단은 25일 영동을 점령한 후 부대를 재정비하고 탄약을 보충한 후 7월28일 새벽부터 김천을 향해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김천에 이르기까지 소규모 저항을 받았으나 7월29일 김천 근교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라고 했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363쪽). 영동읍내를 점령한 인민군이 김천을 향해 출발한 날은 7월28일이었으니 7월26일 황간면에 인민군이 나타났다는 말은 꾸며낸 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선주 교수의 연구 역시 인민군이 노근리 쌍굴다리에 도착한 날이 7월29일이었음을 확인하고 있다(방선주선생님저작집간행위원회, 방선주 저작집 3 <한국현대사 쟁점 연구>, 선인, 168쪽). 『한국전쟁사』를 제외한 어떤 자료나 증언에도 7월29일 이전에는 인민군이 피란민을 몰고 내려올 수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미 1기갑사단조차 7월29일 전쟁 일기에 “29일 오전 5시 30분, 야간에 포 사격과 전차포 사격을 받은 7기갑연대 1대대는 철수 명령을 받았다. …(중략)… 피란민들을 계속하여 철수시키고 있는데 많은 불면을 가져왔다”라고 하고 있다(RG 500 Records of U.S. Army Commands, 1942-, 1st Cavalry Division, Box 131, War Diary. 방선주선생님저작집간행위원회, 앞의 책 3, 176쪽 재인용). 이는 29일 미군의 후퇴 사실을 비롯해 피란민들을 철수시킨 군대가 인민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구도 노근리평화재단 이사장은 생존자인 모친을 비롯해 30여 명의 현장 생존자들이 미군이 후퇴하던 7월29일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정 이사장의 모친은 미군이 마지막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려는 듯이 새벽부터 굴다리의 피란민들에게 극렬하게 총을 쏘았으며 그러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뒤 모두 사라졌다고 기억했다고 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1950년 7월26일 황간 지역을 이동 중이었던 수백 명의 피란민 집단은 미군의 소개 명령에 의해 노근리까지 이동하다가 미 1기갑사단 7기갑연대 2대대에 의해 사살당한 희생자들 외에 확인되지 않는다. 인민군들이 황간면에 진입한 날은 7월29일이었으므로 그 전인 7월26일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워 피란민을 몰고 와 지뢰지대를 파괴했다는 미군들의 증언은 인민군을 악하게 묘사하려는 악의적 의도와 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호도하려는 의도로, 가공된 거짓에 다름 아니었다.

▲ 노근리 전시관은 제주 4·3기념관, 거창사건 추모관과 함께 전국에서 세 번째로 만들어진 평화기념관이다. 수백 개에 이르는 전쟁기념 시설에 비하면 평화기념 시설은 터무니없이 모자란다. 2019년 4월 19일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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