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오종렬 선생 생애(2)

민중과 함께, 자주민주통일의 지도자 故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의 생애를 몇 편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5·18, 부끄러운 선생의 모습으로 광주를 누비다

80년 광주에서는 학생·시민들의 투쟁이 끊이질 않았다. 서울 및 지방에서도 대규모 시위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남한 땅 전체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민중의 분노를 담은 지뢰밭과 같은 형국이었다.

80년 당시 오종렬은 전남고등학교 과학교사 겸 학생지도부장을 맡고 있었다. 전남고 학생들도 역시 심상치 않았다. 교문 밖으로 몰려나가려는 학생들을 겨우 막아 나선 오종렬은 그들 중 학생대표 강대우를 붙들고,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동물적 직감으로 “얘들아, 군이 반드시 움직인다. 그들은 분명 위험한 장난을 할 것이다. 이를 알고 행동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제발 다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학생들에게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아이의 대답은, “선생님, 괜찮을 것입니다. 군이 움직이진 않을 거라고 합니다.” 오종렬은 땅으로 스르르 무너져 주저앉아 버렸다. 아이들이 무참히 쓰러지는 환상을 본 것이다. 학생들이 고통 속에 절규하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는 이미 오종렬 앞에 없었다.

▲ 지금도 망월동 구묘역 분향대 바로 옆에 서 있는 고 최미애 님의 묘비.
518희생자인 고 최미애 님은 오종렬의 동료 교사 아내였다.

오종렬의 동료 교사였던 전남고등학교 학생지도부 소속 영어교사 김충희의 아내 최미애는 시내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걱정 끝에 남편 마중하러 대문 밖을 나섰다. 마침 그때, 젊은이를 사살한 계엄군이 시신을 끌고 가더란다. 동네 아줌마, 할머니들이 “이놈들아, 이 죽일 놈들아, 송장이라도 내놔라!”고 외쳐댔는데 돌아서며 갈긴 M16총탄에 만삭의 최미애가 쓰러지고 말았다. 달려나간 친정어머니가 딸을 안아 일으키자 뱃속의 아이가 살자고 펄떡펄떡 뛰는 걸 보고 기절하였고 뒤늦게 도착한 남편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꺽꺽 숨 막히며 뜨거운 눈물만 쏟았다고 한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오종렬은 학생들을 찾기 위해 다시 또 정신없이 헤맸다. 수많은 시신더미들, 그 속에 한 작은 주검 앞에서 발걸음을 뗄 수조차 없다. M16 소총에 맞아 산산이 부서져 버린 한 어린 소년의 머리통…. 마치 날카로운 돌 모서리에 던져져 깨져버린 수박과도 같았다. 그토록 처참해 보였고 울컥 토할 것만 같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수박을 먹지 못하였다고 한다.

금남로에 담긴 오종렬의 고백

광주 그 현장에서 보낸 80년 5월을 생각하면, 오종렬은 씻을 수 없는 두 가지 부끄러움을 동시에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미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 앞바다에 정박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오종렬은 “우리의 우방인 미국이 곧 온다, 우리 용기를 내서 조금만 더 참아보자”라며 시민들에게 호소하였던 것이다. 미국과 우리나라와의 종속 관계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던 오종렬이, 미국의 본질과 그 단면을 나름대로 꿰뚫어 보고 정리해온 나이 마흔이 넘어선 소위 지식인이었던 오종렬이, 그렇게까지도 상황을 몰랐었던가 하며 자괴감에 몸서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뜨거웠던 항쟁의 시기, 연일 학생들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며 아침마다 오종렬은 아주 당당하게 나갔다. 마치 시내 현장에 있어야만 학생들이 피해를 입지 않고 보호될 것만 같은 환상과 함께. 그러나 막상 그 끔찍한 생사의 현장에 도달해 계엄군들이 총을 쏘며 쫓아오면 정신없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달아나는 뒤통수에서 솟아오르는 그 치욕.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고 나섰다가 비겁하게 또 도망쳤다.

바로 그 두 가지의 부끄러움, 어리석음과 비겁함! 그것은 역사와 광주에 대한 오종렬의 큰 빚으로 남게 된다.

오종렬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혼자 술 마시고 신음하다가 겨우 잠드는 버릇을 10년 가까이 버리지 못했다. 정신 나간 사람, 넋 나간 사람처럼 ‘나 죽으면 저 흘러가는 구름 되리, 나 죽으면 저 흘러가는 물 되어 우리 형제들 씻어 주리’와 같이 죽음에 대해 혼자 뇌까리며 병적인 생활 역시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지워버리고만 싶었던 오종렬의 모습에 대한 자책감도 함께 말이다.

오종렬의 병은 1987년 거리와 명동성당에서 민중들과 어깨 걸고 6월 항쟁을 만들어가면서, 그리고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 온 힘을 다하는 속에서 치유되어갔다. 이 땅의 자주 와 민주 그리고 통일을 이루기 위한 그 치열한 투쟁의 현장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말이다.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

1987년 6월 10일, 광주 민중항쟁의 피멍을 안고 끝도 없이 몸부림하던 대지는 그날, 마침내 민중의 한을 화산처럼 내뿜었다. 광주학살의 피 묻은 손으로 정권을 거머쥔 군부 독재자들은, 온 세상을 군홧발로 짓이기며 영구집권을 꿈꾸었지만 우리 민중들은 그들을 오래 용납하지 않았다. 7년, 꼭 7년 만에 우리 민중은 항쟁의 불길을 다시 치켜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항쟁 3주일이 채 못 되는 6월 하순쯤, 예기치 않았던 장면을 오종렬은 목격한다. 지금도 사람들 입에 전설처럼 오르내리는 ‘넥타이 부대’와 ‘노동자’ 진출이 바로 그것이다. 최루탄이 직격으로 날아들고 몽둥이가 머리에 내리꽂히는, 광폭한 탄압을 뚫고 사무직 노동자들이 항쟁의 현장에 나타난 것이고, 7월, 8월, 9월 억센 주먹으로 어용노조를 뒤집고 자주적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노동자를 본 것이다.

노동조합. 마침내, 남녘 민중들이 모두 하나처럼 뭉쳤고 87년 노동자 대투쟁 속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태동하게 된다.

▲ 1989년 전교협 대의원대회 단상에 선 오종렬.

1989년 전교조 결성과 첫 번째 구속

민주노조 물결을 목격한 오종렬은 ‘참교육실현은 우리의 생명이다’, ‘교사의 사회적, 경제적 권익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교사도 노동자라는 선언과 함께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의 출범에 가담한다.

이에 호응한 교사들도 1987년부터 교육민주화는 사회민주화의 단초이자 그 성과라는 결의에 따라 자주적 민주교원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종렬은 1988년에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대회 의장을 역임하고 그 다음해인 1989년 전교조 초대 광주지부장을 역임하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이를 모두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1,500명의 민주조합원을 해직·파면·투옥 시키는 등 이른바 교육 대학살을 자행한다. 이때 전교조 결성 건으로 오종렬은 구속되어 7월 5일 옥중에서 해직 처분을 받는다.

오종렬은 전교조는 자신의 모태 조직이요, 운동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스승’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에 묶여, 혹은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로 권력의 종노릇에 내몰리는 세월, 그 허위와 치욕으로 점철된 거짓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교육노동자로 다시 태어나 자주의 다리로 우뚝 서자는 것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너른 품으로 함께 일어서자는 것이 전교조 건설투쟁이었다고 설명한다. 한 발은 노동자의 생존과 권익 보장에, 또 다른 한 발은 거룩한 참교육실현 위에 굳건히 딛고 서서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노동이요 교육노동자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 1990년 4월. 전교조 ‘온 나라 걷기’에 참여한 교사들과 광주에서 한자리에 모인 오종렬.

장기수 선생님을 알게 되다

구속으로 인해 광주교도소 수감 당시, 오종렬은 매일 같이 한겨레신문을 봤다고 한다.

그때 본 것이 한 페이지를 전부 차지하고 있던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28년의 삶 이야기. 파란만장했던 만델라의 삶과 긴 감옥 생활 등을 보며 절망감과 분노, 그리고 적개심을 느꼈다고 한다. 만델라라는 인간을 가두고 탄압한 것에 대해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할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던 즈음, 장기수들에 대해 차츰 알아가기 시작하게 되었다.

오종렬은 이렇게 말했다. “같은 교도소 안에 담장을 경계로 미결수 사동과 기결수 사동이 엄격하게 나뉘는데, 저쪽 담장 너머에서는 30~40년 수용생활한 장기수들이 있었지. 그전에도 장기수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긴 했지만 심부름하는 교도소 복역수 등에 의해서 (제대로) 알게 됐어. 고문당하고, 불구자 되고……. 이런 끔찍함 속에서 30년을 넘게 살아온 거야. 나는 일평생 동안 지울 수가 없어. 그것을 몰랐던 나의 몽매함, 야만에 가까운 고매함……. 그 아픔을 잊을 수가 없어.”

구속된 지 3개월 후에 집행유예로 풀려나기까지, 그는 스스로 ‘노역’을 자청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느꼈을 고통과 절망이 어두컴컴한 물 밑에 있는 것처럼 그를 압박하고 괴로움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감, 부끄러움이 그를 괴롭혔다.

“그 노역 생활은 지식분자의 관념적 낭만주의, 그런 껍질을 벗기는데 도움이 됐다”며 스스로는 그때의 ‘노역생활’이 구원이었다고 한다.

▲ 장기수 선생님들과 함께 한 오종렬.

기초자치단체 의원 활동과 두 번째 감옥행

이후 집행유예로 수감생활을 마친 뒤로는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제1대 광주광역시의회 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는가 하면, 같은 해 1991년 출범한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공동의장에 선출되기도 한다.

1993년에는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김영삼 대통령이 망월묘역을 방문하려 하자 당시 오종렬은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없는 망월묘역의 방문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며 실력저지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김영삼 대통령의 광주 망월묘역 방문이 무산된다. 그 여파로 오종렬과 광주전남연합은 정권의 표적 응징으로 극심한 탄압에 직면하게 되고, 1994년 범민련 결성 주도, 남총련 폭력시위 배후 조종 등 국가보안법 및 공무집행방해, 불법집회시위 주도와 같은 수많은 혐의로 구속돼 97년 만기 출소할 때까지 2년 8개월을 감옥에서 살게 된다.

오종렬은 재판을 하면서 광주교도소에서 1년 5개월 정도 특별 관리를 받았고 이후에는 충청남도 홍성교도소에 수감 되며 대상포진 병마와 싸우고 추위에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의료시설이 변변치 않은 속에 자가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단전호흡과 기 수련의 구체적 내용을 자녀들에게 편지로 전하기도 하였다.

▲ 광주시의원 유세 중인 오종렬.

오종렬은 여러 편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 가훈 시조 8수를 소개한다.

가훈 시조 8수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려 말고
깊은 산 골짜기에 하늘 닿게 자랐다가
일주문 짓는 자리에 기둥 되게 하소서

솟은 위용 고운 자락 빼어난 그 모습에
사람들이 넋을 잃고 봉우리만 우러를 제
하늘에서 내린 비는 골짜기로 모이누나(모인다네)

눈보라 칼바람이 옥창을 두드릴 때
광야에(서) 말달리던 그 모습 그리다가
스텐카라친 뱃노래로 서린 한을 달래주(보)네

백두산 오름 길에 고개 마루 넘었더니
마주 오는(던) 벗님네가 이웃마을 가느냔다(가느냐한다)
조용히(말없이) 머리 끄덕여(이며) 웃음 띠어 보낸다

용천설악 벼리는데 시련(담금질)이 으뜸이요
닭은 모이를 (쪼아)먹고 자라고
(시련 이긴 망아지가 천리마로 거듭나듯)
사람은 시련을 먹고 자란다
아기용도(이) 시련 먹고(뚫고) 허물 벗어 승천하니
만백성 지켜내고 단비 내리게 하여 주소

근하신년
늘 사랑과 웃음(으로) 가득하며, 일을 다룰 때는 하늘에서 내리쏘는 매와 같이,
사람을 만나서는 봄날 햇볕 같게 하여 주십사

- 병자원단 아빠가

 

 

▲ 오종렬의 광주시의원 후보 당시 선거공보물 [제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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