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오종렬 선생 생애(1)

민중과 함께, 자주민주통일의 지도자 故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의 생애를 몇 편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어린시절

하늘의 별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몽땅 변절해 간 일제 광풍의 암흑시대.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 11월 28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덕동 311번지의 가세마저 폭삭 기울어진 딸 부잣집에 사내아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갖 축복과 환호 속에서 아버지 오정근과 어머니 박성노 사이 2남 4녀 중 여섯째 막내아들 오종렬이 태어난 것이다.

▲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 11월 28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덕동 311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축복과 환호도 잠시, 오종렬의 집안도 일제 광풍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오종렬의 큰형은 징병으로 빼앗기고, 큰딸은 정신대 사냥 피하려고 열일곱 나이에 시집보내고, 어렵게 지은 농사는 공출로 빼앗겼다. 총알인지 대포알인지 만든다고 놋그릇 젓가락 수저도 다 빼앗기고, 학교에 간 오종렬의 누나들은 근로봉사로 날이 저물어서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갓 국민학교에 입학한 오종렬은 문중 할아버지의 불호령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할 일 없는 8살 백수가 되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그때 오종렬 나이 8세. 정확히는 태어나서 6년하고도 8개월쯤 될 무렵,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세상 사람들은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저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8살 어린 나이의 오종렬이 보기에 신기하기만 했다.

오종렬의 얘기를 들어보자.
“해방! 자유! 독립! 만세! 외치는 말, 우렁찬 목소리는 귀청을 찔렀어요. 태양도 어제의 그것이 아니었고 하늘의 별이 다 내려와 우리와 함께 춤추는 것 같았어요. 숲도 강물도 만세 행렬을 따라오고, 꽹가리, 태평소, 징소리, 북소리에 맞춰 동네 강아지들 줄줄이 날뛰는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날의 만세 행렬 맨 끄트머리엔 벗겨진 고무신짝 든 오종렬이 따라붙었다고 한다.

이젠 대동아전쟁에 끌려간 형님도 돌아오고, 아들 빼앗기고 목 쉬어버린 엄마 목청 살아나고, 농사지어 거둔 곡식 공출은 물론 나이 들어가는 누나들 빼앗기지 않게 되고, 일본 순사 헌병 그 무서운 귀신들 다시 나타날 일 없고, 독립군 혁명가들이 붙잡혀서 고문치사 당했다는 어른들의 몰래 하는 말 이젠 듣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말조심 몸단속에 애들 잘 간수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잠결에 듣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독립군 혁명가들 무용담을 터놓고 뽐내며 들을 수 있어 좋고, 이제 나도 다른 또래처럼 학교에 갈 수 있는 데다, 그 무엇보다 ‘이젠 우리도 배 안 곯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은 천지가 개벽한 날. 노예가 사람이 되는 날, 민족의 염원을 노래한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이 실제로 온 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축 행렬 흩어진 뒤 끝에서 슬슬 스며 나오는 괴상한 얘기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난다. 조선아 조심해라.” 이상하고 요사스러운, 그러면서도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무슨 예언 같은 것이 돌았다. 아닌 게 아니라 815는 온전한 해방절도 광복절 아닌 반절의 해방절, 광복절이자 새로운 질곡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 앞 왼쪽부터 오종렬 선생의 부친, 모친, 본인. 모친 뒤의 여성이 누이이다.

변혁의 피를 잇다

아버지 오정근은 어려운 가세에서도 서울경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전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할 정도의 인텔리 활동가였다. 1933년 적색 농조 운동을 이끌면서 구금되기도 하고 그 뒤 여운형의 건국동맹에서 활동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해방정국에서 여운형, 박헌영 등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나주 인민위원회 농민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45년 10월 맥아더와 존 하지의 점령정책에 따라 미 군정에 의해 나주 인민위원회는 철저히 파괴되고 부친을 포함한 핵심 간부들은 46년 2월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뒤 광산군 인민위원장인 그의 외삼촌 역시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미 군정에 의해 광산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오종렬의 누나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당시 송정여중의 동맹휴업을 조직하고 선도한 이후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다가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한국전쟁 중 보도연맹으로 광주교도소에 끌려가 학살 직전 구사일생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해방의 기쁨으로 삼천리강산이 춤추고 노래할 때, 오종렬의 가정을 비롯한 일족은 분단의 칼바람을 맞아 풍비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서석초등학교, 광주사범병설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 시절

▲ 오종렬 선생이 매우 존경했던 모친

부친 오정근과 외삼촌이 형무소에 갇히고 모친 박성노도 가혹한 고문으로 후유증을 겪었고, 부친과 외삼촌의 옥바라지에 가계를 혼자 꾸려가는 모친 슬하에서 오종렬은 불우한 유소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한 번은 모친이 형무소에 갇혀있는 부친과 외삼촌을 위해 반찬을 만들고 있는데, 오종렬은 “나도 형무소에 갇혀서 그 맛있는 반찬 먹고 싶다”고 떼를 쓰다가 모친의 회초리에 심하게 맞았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불우한 가정에서 가난하고 힘겹게 자랐지만 총명하고 담대했던 천성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기기도 한다.

오종렬은 송정리 시골 초등학교(송정 동초등학교)에서 대도시의 광주서석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다. 화장실에 갔는데 똑같이 생긴 교실이 너무 많아서 촌놈 오종렬은 자기 교실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같은 반의 이름도 모르는 급우를 보자 대뜸 꾸짖는다. “야 너 뭐 하고 있어 빨리 너희 교실로 가!” 하니, 그 급우는 슬금슬금 피하듯 자기 교실을 찾아갔고 오종렬은 그 급우의 뒤를 따라 교실을 찾을 수 있었다 한다. 광주고 시절에는 교련선생이 학생들을 심하게 탄압하자 오종렬은 전체 학생들을 모아 구령대에서 일장연설을 하여 그 교련선생을 쫓아버리게 되는데, 쫓겨 나가는 그 교련 선생이 오종렬에게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나갔다고 할 정도로 학창시절부터 기지와 의기가 엿보이는 오종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광주사범대학에 입학하다

중고시절 오종렬의 꿈은 군인이었다. 전쟁 이후 정치 권력은 군인에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군인은 선망받는 직종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매력에 끌려 군인이 되려고 사관학교 시험까지 봤으나 결국 당연하게도 신원조회에 걸려 좌절된다.

그 후 오종렬은 당시 2년제였던 사범대가 마음에 끌렸고 교사를 하면서 가르친다는 것이 역사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오종렬은 “독일통일에서의 주역도 한 교실에서 나왔단 말이지. 그런 뜻을 품고 한번 해볼 수 있다는 것이 교사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설명한다.

오종렬은 지금 교육대학교 전신인 2년제 초급대학인 광주사범대학에 입학한다. 과학교육과에 들어가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1959년과 1960년이었다. 그러니까 2학년 때 4.19혁명을 맞게 된 것이다. 오종렬이 사범대 학생회장이었던 시절이다.

그러니 경찰이 가만두지 않았다. 오종렬의 말을 들어보면 “나에게 정보과 형사가 직접 와서 밀착한거야. 학생에 대한 영향력이 있고 하다보니까. 그러다가 옆구리에 칼을 대고 나를 은연중에 협박한게 우리집 내력이야.” 결국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가 없었고 친구들 몇몇밖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한다.

▲ 대학시절. 오른쪽 첫 번째가 오종렬 선생.

1등 사수, 육군 오 하사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군대에 징집이 되었다. 논산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서 3년을 보내고야 말았다.

군대에서 오종렬은 쾌속 진급을 했다. 같이 들어간 동기들이 일등병일 때 오종렬은 상병을 달고, 상병일 때 병장을 달았다. 당시엔 장교가 부족해서 일반 사병 중에서도 하사관을 뽑았는데 오종렬 역시 시험을 쳐서 하사관까지 됐다. 사격 훈련만 하면 백발백중인 1등 사수에다 하사관까지 한 모범병사였 던 것이다. 오종렬은 “나에게 군대도 안 갔다 온 정치 모리배들이 ‘빨갱이 종자’라고 할 때면 콧웃음이 난다”며 호탕하게 웃곤 했다.

청년시절 신체단련

▲ 1966년 8월, 교원연수 출장 중 여수 만성리 해수욕장에서.

오종렬은 ‘힘은 근육에서! 근육은 규칙적인 운동에서!’라는 격언을 남긴 유젠샤도우(아령의 창시자)의 운동철학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고 운동을 통한 심신단련으로 고질병들을 치유하고 체력을 단련하였다. 운동의 중요성을 실감한 오종렬의 운동철학은 제자들과 자녀들의 교육철학으로 이어진다.

훗날 초등 6학년 아들이 여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빠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세요?” 오종렬은 대답한다. “단련이다”

섬마을 선생님, 결혼

오종렬은 제대 이후 부산에서 부두하역노동자 등 1년 동안을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동을 했다. 그리고 고향 광주로 돌아와 첫 부임한 곳이 바로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초등학교였다.

혼기가 꽉 찬 선생님을 시골마을에서 가만두지 않았다. 그 중학교에서 간사로 일하며 오종렬을 잘 보았던 김평임의 큰 오빠가 중매를 서서 지금의 김평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오종렬은 김평임을 “엄청나게 뛰어나게 머리가 우수하고 총명하다. 그리고 엄청나게 부지런하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고 오종렬의 어머님을 모시고 와 김평임을 소개하고 양가의 만남 이후 결혼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규와 창규 쌍둥이를 낳았다.

▲ 오종렬 선생의 결혼식 가족사진(오종렬 좌측으로 모친과 부친이, 그리고 신부 김평님의 우측으로 장모 김모방덕과 장인 김수열)

제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건 교직생활! 
뿌리에서 수분과 양분이 공급된다

이 시기 오종렬은 내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면 아이들이 자라 자주성, 창조성, 공동체성을 발현하며 사회는 민주화되고 나라는 통일될 것이라는 아주 소박한 교육자적 양심과 야심을 가졌다고 했다.

여러 가지 실험도 했다고 했다. 조회와 종례를 전달사항 메모만 해주고 주도는 학생들이 하게 하곤 했다. 돌아가면서 당번 정해서는 학생이 담임을 맡게 하는 방식이다.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 보니 정작 오종렬이 아이들에게 배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오종렬은 바닥에서 배워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바닥에서 올라와야 한다. 뿌리에서 수분과 양분을 빨아올리듯이 민중 속에서 지혜와 용기가 올라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오종렬의 전선운동 당시 활동의 근간이 된다. (계속) 

▲ 교사 시절, 학생들과 함께한 오종렬 선생.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은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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