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7) - 1950년 7월 21일 문경 농암리

1950년 7월 21일 소속을 알 수 없는 인민군 200여 명이 국군 6사단 7연대 지휘소가 있던 문경 농암면 농암리까지 왔다가 대전차포 중대에 의해 전멸당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679~680쪽) 국방부는 지리에 어두운 인민군들이 계곡으로 몰려서 몰살당한 것이었다면서 이를 “의외의 사태”라고 했는데, 포위될 위험에 놓였던 국군으로서 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니었다.
후에 국방부는 이들이 인민군 15사단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지난 7월 17일부터 화령장 전투를 치르던 부대였다는 것인데, 상주에 있어야할 부대가 무슨 이유로 직선 거리로 20km나 후방에 있는 문경 농암리에 뒤쳐져 있다가 의도하지 않았던 사태를 당했던 것일까? 이들 역시 보급부대였을까? 아니면 피란 민간인들이었을까?

▲ 그림1) 『한국전쟁사』 제2권 679쪽.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인민군 200명의 “기습”을 긴급한 위기가 아니라 놀랍게도 “의외의 사태”라고 표현하는데 그치고 있다.[사진 : 필자제공]

문경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아니었을까?

전쟁이 발발하자 문경 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했다. 국군 6사단은 7월 10일 문경으로 철수한 후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6사단이 후퇴하여 주둔하기 시작한 날부터 세 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했다. 7월 10일에는 농암면 뭉우리 재에서 있었으며, 7월 14일경에는 호서남면 유곡동에서, 7월 16일경 영순면 김용리 또는 의곡리에서 있었다. 6사단 헌병대 김만식 상사는 이 학살이 자신들의 행위였다고 증언했다. 호계면에서는 120여 명의 주민들이 지서로 연행되어 이중 80여 명이 문경경찰서로 이송되어 모두 총살당했다. 농암면에서는 농암리 129 이규복(신청인 이준우)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농암면 뭉우리는 문경 농암면과 상주 이안면의 경계지점으로 비운리 또는 무운리 라고도 했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대구·경북(I-1)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5권, 556쪽) 현재 문경 농암면 지동리와 상주 은척면 두곡리에 뭉우리골이 있는데 종곡리 경계와 6km정도 떨어져 있다. 
사건 발생 시기와 장소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인민군들이 국민보도연맹원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 그림2) 문경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인 농암면 지동리 뭉우리골. 오른쪽으로 지동터널이 보인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사진 : 필자제공]

국군 7연대 지휘소에 나타난 인민군을 공격하다

사태가 발생하던 1950년 7월 21일 전후 국군 6사단 7연대와 2연대가 문경 북쪽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치르던 중이었다. 이때 7연대의 지휘소는 전선에서 7km 떨어진 문경 농암면 농암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농암면 면사무소 소재지로 지휘소가 있었기 때문인지 당시 농암리에는 전투보다는 보급을 담당했던 군인들이 주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라주바예프에 따르면, 7월 16일 밤 9시 인민군 1사단이 문경을 점령했고 이후 상주 낙동면 유곡리에서 국군과 전투를 벌여 손실을 입고 유곡리를 포기했다고 한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345~346쪽) 문경이 이미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뒤 5일이 지난 7월 21일 문경읍내에서 서쪽으로 20km정도 떨어진 농암면 농암리에 주둔한 국군은 인민군에게 곧 포위당할 위기에 처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국군 6사단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7월 21일 새벽 3시 소속을 알 수 없는 인민군 200여 명이 최전선에서 7km나 떨어진 국군 지휘소에 나타났다. 국방부는 이에 대해 “이날 03:00에 소속미상의 적 200여 명이 불시에 기습한 것이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들은 화령장으로 남하한 저들 15사단 소속의 일부 병력이라고 하거니와 함창으로 통하는 진로를 탐색하다가 여기에서 벽에 부딪쳤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얼른 보아도 이 설명에는 모순이 보인다. 이 시기에 화령장 전투를 치른 인민군 소속이 15사단인 것은 맞지만 중대병력 200여 명에 불과한 이들이 화령장 방면으로 가지 않고 함창으로 우회하려 했다는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전쟁사』는 남하하던 인민군이 우연히 국군 7연대 지휘소를 만나게 된 것을 기습이라고 표현했다. 다음 설명은 더 어이없다.
200명의 인민군을 만난 연대 지휘소는 대전차포 중대를 시켜 농암리 남쪽 계곡으로 몰아 공격했다고 한다. 즉 “지리에 어두운 이들을 상곡리(농암리 남쪽 1.5km) 계곡으로 몰아 일격하고 말았지만”이라고 했다. 

이들이 인민군이었을까?

농암리와 종곡리 주민들에 따르면 “상곡리”라는 지명은 농암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에 없었다고 한다. 종곡리는 3개의 구가 있어서 이를 종곡 1리, 종곡 2리, 종곡 3리로 불렀는데 이를 상곡 또는 중곡, 하곡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농암리 남쪽 1.5km” 지점은 종곡3리이다. 이를 상곡리로 기록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현재 마을 뒷산은 낮은 능선으로 이어진 산이어서 인민군을 몰아넣을 만한 계곡은 보이지 않는다.

▲ 그림3) 종곡3리 마을 전경. 인민군을 몰아넣을 만한 계곡은 보이지 않는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사진 : 필자제공]

비록 길을 잃었다고 할지라도 패잔 낙오병들이 아닌 이상에야 인민군 200명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연대 지휘소 전체가 전멸당할 수 있는 긴박한 위기 상황이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 서술 속에는 아무런 긴박한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과연 이들이 인민군이었던 것일까? 
이 전투에 대한 『한국전쟁사』의 서술은 여기에서 그쳤다. 마치 200명을 전멸시킨 것 같지만 전투 결과를 더 이상 밝히지 않았으므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분명치 않다. 공격을 당한 인민군 집단이 있었다면 충주 동락리나 상주 화령장의 경우처럼 보급부대였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지만 우마차를 이끌었다는 설명은 없다. 실제 일방적인 주장 외에 포로나 노획한 물품 등 인민군을 공격한 것인지도 근거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당시 살았던 마을 주민들은 인민군과 전투는 물론 인민군조차 구경하지 못했다고 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나 전투 중 피해를 입은 주민들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정작 마을 주민들이 크게 피해를 입은 곳은 종곡리에 이웃한 갈골, 갈동이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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