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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과 카스피해 파이프라인, 그리고 CIA 아편전쟁미국의 중동 침략전쟁(2) - 아프가니스탄
  • 류경완 KIPF 공동대표
  • 승인 2019.11.2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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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국주의 일극 패권이 쇠퇴하면서 전쟁과 내전으로 얼룩진 중동에 평화의 기운이 싹트고 있다. 미군의 시리아 철군과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러시아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강력한 조정자로 등장했다.

이 연재는 ‘석유자원 탈취와 지역 불안정화’라는 전략목표 아래 ‘민주주의와 인도주의적 개입’을 구실로 자행된 미국의 30년 가까운 중동 침략전쟁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조성된 지구촌 정세 속에서 커가는 평화의 희망을 찾아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침략과 약탈이 아닌, 호혜와 친선에 기반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고대하며![필자]

1. 이스라엘과 미국 - 30년 중동 침략전쟁의 설계
2. 아프가니스탄 - 9.11과 카스피해 파이프라인 그리고 CIA 아편전쟁
3. ‘이라크 프로젝트의 미래’와 ‘대량살상무기’, 냉혹한 사기전쟁
4. 리비아 - 핵과 석유, 가다피를 위한 변명
5. 시리아 - ‘색깔혁명’으로부터의 생환과 미군 철군
6. 잊혀진 학살 - 팔레스타인과 예멘을 위하여!

유노칼과 엔론을 위한 ‘파이프라인’

구 소비에트 해체 이후 세계 석유업계의 관심은 16조 달러 규모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된 카스피 분지로 쏠렸다. 자원은 아직 탐사와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고 서구시장으로부터도 멀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은 카스피에서 인도양으로 연결되는 최단 파이프라인 경로였다. 파이프라인 건설자가 이 자원을 통제할 수 있기에 경쟁은 치열했다.

미 국무부와 국가안보위원회, CIA로부터 전적으로 지원을 받는 미국의 해외석유기업그룹도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룹은 아모코와 펜조일, 엑손과 유노칼로 구성되었으며 주요 멤버는 유노칼 고문 헨리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아모코 고문, 투르크메니스탄 로비스트 알렉산더 헤이그, 핼리버튼 CEO 리처드 체니 등으로, 모두 전직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출신이었다.

하지만 1996년 하반기에 아르헨티나 기업 브리다스는 아프가니스탄의 두 정치세력이었던 탈레반 정권, 북부동맹 도스툼 장군과 아프간 파이프라인 건설 계약을 맺었다. 미 석유기업 유노칼은 하미드 카르자이, PNAC(Plan for a New American Century) 멤버인 리처드 아미티지와 잘메이 칼릴자드까지 추가 고용해 브리다스에 맞섰다. 유노칼은 탈레반 지도자들을 미 본사로 초청해 브리다스와의 계약 취소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한다.

1989년 소련군 철군 이후 내전 속에서 군벌과 경합하던 탈레반은 1997년 정권을 장악한다. 1998년 2월 유노칼 부사장 존 마레스카는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증언에서 탈레반 정권의 제거와 안정적인 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당시 PNAC의 이라크 침공을 거부한 클린턴 행정부는 아프간 침공에도 관심이 없었다.

▲ 탈레반 소탕 작전 중인 아프간-나토. 2019년5월. [사진 : 뉴시스]

빈 라덴을 둘러싼 미국과 탈레반의 협상

2000년 10월, 알 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은 예멘 아덴항에 정박 중이던 미 구축함 USS콜호를 공격해 수병 17명이 사망하고 39명이 다친다. 미 정부 일부 인사들이 아프간 폭격을 원했지만 클린턴은 특사 모하바트를 특사로 파견했고, 협상에서 탈레반 정권은 보복폭격을 피하기 위해 빈 라덴의 무조건 항복을 제안했다. 그러나 논란의 미 대선에서 조지 W. 부시가 승리하면서 빈 라덴 신병처리는 다음 행정부로 넘겨진다.

2001년 1월 20일 아들 부시 행정부가 취임했다. 부시는 탈레반과의 교역 협상을 금지한 클린턴의 특별행정명령을 무시하고, 해외원조 패키지 교환을 통해 카스피 분지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독점적인 접근을 추진했다. 인도에 건설할 발전소 연료 공급을 위해 엔론도 파이프라인 사업에 눈독을 들였다. 협상은 세 차례 벌어졌지만 탈레반은 다시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협상이 진행되면서 군사행동 계획도 추진되고 있었다. 2001년 7월 미 고위관료는 전 파키스탄 외무장관 니아즈 나이크에게 “아프간에 대한 군사행동이 10월 중순까지는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2001년 8월 2일 탈레반과의 마지막 협상이 끝날 때 미 국무부 협상대표 크리스티나 로카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우리 ‘황금 카펫’ 제안을 수용하든가, 아니면 당신들을 ‘폭탄 카펫’ 아래 묻어버리겠다.” 탈레반 제거라는 유노칼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갔다.

협상이 끝나자마자 부시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미국의 공격이 10월말 이전에 시작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9.11 5주일 전이었다. 이 기간 특사 모하바트는 봄과 여름 두 번에 걸쳐 빈 라덴의 인계 문제로 탈레반과 만났지만, 부시 행정부는 여전히 빈 라덴의 인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빈 라덴은 건재했다. 그는 미국-탈레반의 파이프라인 협상과 미국의 아프간 공격 의도를 알고있었다. 그 위협이 특수한 상황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 후 9.11이 터졌다.

▲ 9.11테러 당시, 맨해튼 건너편에서 촬영된 사진 [사진 : 뉴시스]

9.11의 진실과 속임수

9.11 공격 직후 대통령 부시와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 공보관은 앵무새처럼 “아무도 테러리스트들의 비행기 납치와 빌딩 충돌을 예측할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 정보보고서는 수년간 ‘납치된 비행기를 이용한 미사일 공격’에 대해 경고해온 것으로 밝혀졌고, 프랑스 정보국은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비행기 납치 계획”이라는 5쪽짜리 문서를 사건 8개월 전 CIA에 전달했다.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이들의 주장이 범죄적 직무 태만인지 국제적 기만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9.11이 1년 전 PNAC에 의해 언급되었던 “재앙적이고 촉매제적인 사건”인가? 수백만 미국인들과 셀 수 없는 출판물, 웹사이트들이 “부시 행정부와 9.11에 관한 혼란스러운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가장 극적인 비판은 9.11 공격에 대한 행정부의 직접 관련성 혐의이다. 정부가 사전 경고를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무수한 음모론을 떠나 정부의 행동에는 여전히 부적절하고 의심스러운 점들이 있다. 왜 사건 초기에 부시와 체니는 모든 조사를 반대했는지, 왜 1년이 지난 뒤에야 조사가 행해졌는지, 왜 부시가 9.11위원회 위원 임명을 고집하고 위원장에 유노칼 고문 키신저를 임명했는지, 왜 부시와 체니는 증언선서를 거부했는지 등등...

현직 미 대통령 트럼프와 차기 대선후보 툴시 가바드 등도 9.11의 진실과 사우디의 역할 등에 대해 꾸준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민간 투자기업 카알라일을 통해 석유와 안보, 무기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일군 부시와 빈 라덴 가문, 사우디 왕가의 오랜 네트워크도 폭로되었다.

9.11의 진실이 무엇이든 부시 행정부는 뜻밖에도 오래 계획한 침공을 밀어붙일 환상적인 기회를 잡았다. 정부는 테러공격을 즉각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비교했다. 그러나 9.11은 해공군 상비군이 대규모 전쟁을 벌인 1941년 진주만과는 달랐다. 전례 없는 국제 테러범죄였지만, 미 전역의 안전을 위협하는 군사 침공이 아니었다. 전례에 따라, 국제 형사 조치에 따라 처리하면 될 사건이었다.

그러나 형사적 조치로는 아프간과 이라크에 대한 의도된 침공이라는 전략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오직 정복과 점령이라는 군사행동만이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9.11은 진주만과 동등하게 취급되었고, 공포를 조장하는 정부 캠페인이 선택되었다. 공공의 신뢰에 반하는 조치였지만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정부의 필요에 완벽히 부응했다.

테러와의 ‘사기전쟁’

이렇게 미리 기획된 침공에 “테러와의 세계 전쟁”(Global War on Terror)이라는 ‘거대한 거짓말’이 태어났다. 이를 뒷받침하는 선전 캠페인, 허상의 진언이 뒤를 이었다. “이것은 자유를 파괴하려는 적들로부터 우리 삶의 방식을 지켜내는 일생일대의 투쟁입니다. 적들과 중동에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의 도시에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잘 조율된 반복되는 선전에 대중이 호응하고 의회가, 언론과 정당이 지원했다. “군대를 지원하라!” 국기와 노란 리본이 전국에 넘쳐났다. 9.11 다음날 아침 부시는 의회에 군사행동 승인을 위한 공동 결의안 초안을 제출했다.

(2007년 브레진스키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테러와의 전쟁에 겁먹다”란 글에서 부시 행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이 ‘공포의 문화’를 냉전시대에 빗대 비판했다. 역시 2007년 나토군 사령관 출신 클라크 장군은 “알 카에다는 실재하는 위협이 아니다. 우리는 공포의 위협 속에 살았고 위협은 조작되었다”고 비난했다.)

‘테러와의 전쟁’ 첫 행동은 9.11 한참 전에 기획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이었다. 빈 라덴과 탈레반 정권을 동시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안보와 에너지’ 정책의 완벽한 접목이었다. 빈 라덴 체포는 안보, 탈레반 전복은 에너지 정책 목표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제 브리다스의 계약은 무효화되고 유노칼이 그 길을 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빈 라덴을 인계하려는 탈레반의 제안이 살아있었다. 9월 15일 특사 모하바트가 다시 파키스탄에 파견되어 협상을 벌였다. 탈레반은 재앙적인 폭격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빈 라덴을 1주일 안에 인계하고 빈 라덴의 기지와 훈련장을 폐쇄하겠다고 제안했지만 CIA 담당자는 ‘24시간 시한’을 제시하며 거부했다. 경호대와 아프간 산악에 은신한 빈 라덴을 데려오기엔 불가능한 시간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은 침공과 점령이 필요했고, 빈 라덴은 아프간에 살아있어야 했다. 몇 주 후 탈레반의 반복된 제안도 거부되었다. 빈 라덴을 인도하기 위한 탈레반의 11개월 간의 노력은 실패했다.

항구적 자유 작전, 폭탄 카펫

2001년 10월 7일 ‘폭탄 카펫’이 아프가니스탄에 펼쳐졌고 12월 말 이전에 집권 탈레반은 붕괴되었다. 유노칼 전 고문이었던 하미드 카르자이가 미국에 의해 임시정부 수반으로 취임하고 이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의 첫 아프간 대사에는 유노칼 전 부사장 마레스카가 취임했다. 다음 대사는 전 유노칼 고문 칼릴자드로 PNAC의 창립 멤버였다.

침공 4개월 후인 2002년 2월 카르자이는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과 새로운 파이프라인 프로젝트 협정을 맺었다. 브리다스는 무력화되고 유노칼이 길을 열었다. 다시 2주일 후 미 연방 세 개의 기구-미국 수출입은행과 무역개발청, 해외민간투자공사-가 파이프라인 프로젝트 컨소시엄 투자 준비를 갖췄고, 동시에 미국은 “군대의 영구 주둔을 통해 파이프라인 인프라에 대한 치안을 유지”하는 데 착수했다.

2003년 2월까지 부시 정부는 아프간을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과 그를 보호할 군 주둔지 건설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지도상에서 군기지와 파이프라인 경로는 정확히 일치했다. 3월 13일 부시는 왜 더 이상 빈 라덴을 언급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정말로 그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목적은 성취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최고의 포상은 아직 청구되지 않았다. 그것은 약 2천억 배럴에 달하는, 아직 개발되지 않고 쉽게 뽑아낼 수 있는 고품질의 이라크 석유였다.

▲ 2016년 4월.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주 농부가 양귀비에서 추출한 아편 원재료를 보여 주고 있다. 아편은 진통제 모르핀 용 외에도 마약 헤로인의 주 성분으로 사용된다. 아프간은 아편 최대 생산지다. [사진 : 뉴시스]

CIA 아편전쟁 : 아프간의 헤로인(heroin) 무역

아프간 아편 무역은 계속 번성하고 있다. 강력한 금융 및 조직범죄 이익을 위해 미국-나토 점령군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아프간 마약 경제는 미국의 외교정책에 따라 신중하게 고안된 CIA의 프로젝트였다.

2017년 유엔마약범죄국 통계에 따르면 아프간의 아편 생산량은 9000톤이며, 가공 후 순 헤로인(heroin) 약 900톤에 해당한다. 2016년 미 헤로인 시장 소매가격 $902,000/kg을 감안할 때 아프간 헤로인 거래(2017)에 의해 창출된 가치는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미 국방예산에 해당하는 약 7125억 달러에 달한다. 가난한 양귀비 농가에서 국제 도소매 유통과 서구 범죄조직·비즈니스카르텔·정보기관·금융기관의 돈세탁 과정을 거쳐 크게 증가한다.

2000년 유엔의 지원을 받은 탈레반 정부는 성공적으로 마약퇴치 프로그램을 시행해 1년 만에 아편 생산이 94% 감소했다. 하지만 이듬해 9.11 후 미국-나토의 아프간 침공으로 아편 생산과 마약 거래는 역사적인 수준을 회복했다. 아편 생산은 2001년 185톤(경작지 8000헥타르)에서 2017년 9000톤(33만 헥타르)으로 50배 급증했다.

2001년 이후 미국에서의 헤로인 사용도 20배 이상 폭증했다. 콜롬비아 대학 연구에 따르면 헤로인 사용자는 아프간 침공 전 18만9000명에서 현재 450만을 초과하고 있다. 2016년 1만5446명이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전체 마약 중독 관련 사망자는 6만명)하고, 납세자는 85억 달러의 전비를 부담했다.

미 국방부와 CIA는 1970년대 후반 수십억 달러 규모의 아프간-파키스탄 아편 경제를 창출했다. 전쟁의 ‘숨겨진’ 목표 중 하나인 마약 거래의 수익금은 소련-아프간 전쟁에서 싸울 알 카에다 무자헤딘 용병 모집자금을 조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란-콘트라, BCCI 스캔들에서 드러났듯이 CIA 비밀작전은 마약 자금 세탁을 통해 자금을 확보했다. -미셸 초서도브스키 <Global Research>

아프가니스탄의 현재

구 소비에트 점령에 맞서 싸우며 미국의 지원을 받던 탈레반은 1997년 집권했다가 2001년 전복된 뒤에도 현재 국토의 60% 가량을 장악하고 있다. 2011년 네이비실은 빈 라덴을 사살했다고 발표했고, 그 해 14만 명에 달했던 미군과 국제안보지원군은 2014년 공식 철군에 착수했다. 현재 미군 1만4천 명이 남아있으며, 2019년부터 양측 사이에 평화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56개국이 참전한 미국 주도 국제전과 이어진 내전에서 수백만이 사망했다.

오랜 전쟁의 후유증으로 파이프라인에 자본 투자를 유치하기엔 현실이 너무 폭력적이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 미국 기업조차 독점권을 누리기엔 힘든 상황이고, 유노칼은 2007년 셰브론/텍사코에 흡수되어 일찌감치 사라졌다. 탈레반이 인정하지 않는 꼭두각시 정권엔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있으며, 과거 영국과 소비에트, 미국의 점령하에 존재하던 군벌들은 여전히 할거하고 있다.

향후 평화협상에서 합의할 철군 일정과 내부 정치협상에 따라 아프간의 험난한 장래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 계속 -

<참조 : 미셸 초서도브스키 ‘Global Research’, 코드핑크 ‘이라크 전쟁에 관한 인민법정’, 리처드 베한 ‘사기전쟁’>

류경완 KIPF 공동대표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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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신령 2019-11-30 00:08:33

    911 당시 워싱톤에 오래 살았던 사람으로 다른건 모르겠지만 펜타곤 비행기 공격은 완전 조작입니다 당일 해밝은 아침 펜타곤 포토맥 강 근처에는 수많은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펜타곤은 낮은 건물로 비행기는 수면에 바로 붙어서 날아야만 공격할수 있었는데 어떠한 목격자도 사진도 없고 엔진으로 보이는 작은 잔해물 외에 비행기로 인식될만한 어떠한 잔해물이 없었습니다 벽에 난 구멍 또한 비행기 폭파가 아닌 미사일 구멍이었습니다 쌍둥이빌딩 사상자 역시 평소의 반이어서 조작 의심이 제기되었습니다 특정 인종인은 전날 출근하지 말라는   삭제

    • 11 2019-11-29 01:10:49

      브레진스키는 "무슬림 테러조직은 미국의 이익을 위한 지정학적 무기다"라고 함. 미 장성 마이크 플린은 IS가 오바마 정권에 의해 설립되고 지원받았다고 고발했음.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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