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5) - 1950년 7월 19일 상주 화남면 동관리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을 화령장 전투는 7월 17일에 이어 19일에도 계속되었다. 지난 공격이 국군 17연대 1대대가 화서면 상곡리 도로에서 있었던 데 비해 이번 공격은 같은 연대 2대대가 여기에 북쪽으로 인접한 화남면 동관리 도로에서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공격당한 사람들은 보급과 관련된 한 무리였다고 했지만 이전과 달리 이번 사망자 중에는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 그림 1) 『한국전쟁사』 2권 436쪽. 피살자 중에는 최소한 민간인 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변진세 병장은 이어질 21일 전투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보고했다. 우연이 반복되면 우연으로 볼 수 없다.[사진 : 필자제공]

인민군 48연대에 이어 49연대를 노리다

1950년 7월 18일 국군 17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미 군사고문관과 함께 전날 있었던 1대대의 상곡리 전투 현장을 둘러봤다. 이들이 무슨 정보를 근거로 삼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 더 큰 규모의 인민군들이 이곳을 지날 것으로 판단하고 화령장 북쪽에 있는 갈령으로 수색대를 보냈다고 한다. 
명령에 따라 갈령으로 향하던 수색대는 오후 2시 30분 자전거를 타고 갈령을 넘어서는 인민군 2명을 사로잡았다. 연대본부에서 조사한 결과 이들은 인민군 15사단장이 인민군 48연대장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전령이었음이 확인되었고 그 내용은 “49연대와 합세하여 국군 6사단을 협격하고 김천, 대구방면으로 진출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군 6사단은 7월 10일경부터 상주 북쪽인 문경으로 철수하여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잘못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들 후방에 해당하는 문경에 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마당에 더 남쪽인 김천과 대구를 공격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은 그다지 있을 법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 시기가 7월 18일이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렇다.
하여튼 『한국전쟁사』는 이 상황에 대해 “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이 획득 문서를 통하여 적이 그들의 48연대가 격멸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것과 제49연대도 불원 이곳을 통과할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여기에서 글쓴이들은 김희준 중령의 입을 빌어 지난 7월 17일 민간인 포함하여 최대 250명에 이르는 보급부대원들을 사살한 전투를 마치 1개 연대 3천여 명에 해당할 인민군 48연대를 전멸시킨 것처럼 스스로 속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표현대로라면 이제 인민군 48연대는 전멸되었고 다음은 인민군 49연대가 전멸될 차례처럼 보인다. 하지만 달리 보면, 250명을 사살한 대규모 전투 사실을 인민군 측이 모르고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두 가지 가능성, 즉 전투가 과장되었거나 사망자들이 인민군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전투 사실을 모르고 지나가다 체포된 인민군 연락병을 통해 인민군 15사단 49연대가 곧 화령장 부근을 통과할 것으로 판단한 연대장은 화령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2대대(대대장 송호림 소령)를 화남면 동관리로 보냈다. 
한편 이날까지 밤과 낮 구별 없이 이어져 갈령 계곡을 가득 메웠던 수많은 피란민 대열이 7월 19일이 되자 발길이 끊겼다고 했다. 『한국전쟁사』는 “그간 연일연야로 남부여대한 피란민의 대열이 갈령계곡을 메웠는데 이날을 기해 그들의 발길이 끊기고 이 계곡은 흡사 무인지경과 같은 고요 속에 묻히게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지난 17일 피란 길목에서 벌어진 전투 소식이 이제야 피란민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 사실에 대해 인민군들 역시 알고 있었을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민군 측에서 피란민 이동을 통제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인민군 측은 점령 후 대체로 주민들에게 피란할 필요가 없다는 선전을 했다고 한다. 물론 피란을 막지 않고 피란민과 함께 이동하는 경우가 확인되기도 한다.

동관리 주민들이 국군의 소개 명령을 거부하다

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7월 19일 새벽 6시 곧 전투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동관리에서 주민들이 거주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소개하라고 명령했다.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념하라고 강조하였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는 이틀 전 있었던 전투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일 수 있었다.

▲ 그림 2) 동관리 마을 입구 모습. 하송리가 이안천 옆 평야에 있는 큰 마을이었던 반면 동관리는 갈령고개 아래 계곡에 인접한 작은 마을이었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사진 : 필자제공]

각 중대장들이 확인한 결과 당시 5중대 진지 앞의 송내리(하송리를 말하는 듯)와 7중대 진지 안의 동관리에는 노인 두세 명이 남아서 소개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들이 소개 명령에 따르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갈 곳도 없고 가 봤자 얼마나 더 살겠느냐”는 것이었고, 둘째는 “인민군 대부대가 통과했으나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동관리는 20호여가 살던 마을이었는데 위 책은 첫째 이유와 관련하여 마을 노인들이 전투 직전에 소개되었는지, 아니면 전투 중 또는 전투 후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전혀 밝히지 않았다. 소개 지역의 민간인을 공격한 당시 국군의 정책이나 민간인 피해에 대한 소극적 태도의 서술 내용으로 봐서는 마을에 남아 이른바 “부수적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인들이 마을에 남겠다는 둘째 이유는 더욱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인민군 대부대가 통과했으므로 무슨 심각한 전투가 벌어지겠느냐는 입장은 국군 17연대에겐 불편할지 모르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으로 여기에는 이미 인민군 대부대가 이미 통과했다는 사실과 함께 지난 17일에 있었다는 전투를 의심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노인들은 지난 17일 벌어진 전투를 모르던가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는 것이다. 

10여 대 우마차를 공격

낮 2시가 되자 동관리를 경계하던 초소에서 10여 대의 우마차와 사람들이 내려왔다고 한다. 이를 목격한 변진세 병장은 “말을 탄 군인 2명이 보급품을 적재한 것으로 보이는 우마차 10여 대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라고 보고 했다. 이어 소대장이 보니 선두에는 말을 탄 인민군 장교 2명이 대열을 이끌고 있었고 그 뒤로는 민간인 복장의 사람이 섞여있는 10여 명의 무리가 소와 말이 끌고 있는 마차를 몰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주위를 경계하는 기색도 없었고 더 이상 뒤에 따라오는 무리도 없었다. 
일행이 국군 진지로 다가오자 매복한 국군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연대장이나 대대장의 사격 명령이 없는 상태에서 공격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보아 상부에 우마차가 다가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사』는 “집중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그들 전원을 쓰러뜨렸는데, 확인하여 보니 말을 탄 다른 1명은 보이지 않고 민간인 2명을 포함한 19명이 사살되었으며, 소 2마리와 말 4마리도 폐사되었었다. 그리고 우마차에는 각종 탄약과 식량 등이 적재되어 있었다.”고 했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436쪽) 
명령을 받지 않고 먼저 총을 쏘고 난 이후 확인해 보니 사망자는 민간인 2명이 포함된 19명이었고 소 2마리와 말 4마리도 사살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우마차에는 탄약과 식량이 실어져 있었다고 했다.
이후 보고를 받은 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사살된 적 시체와 말을 도로로부터 떨어진 곳에 매장케 하여 흔적을 없애게 하고 그들 보급품과 죽은 소는 다른 우마차에 분적시켜 연대본부로 후송”케 하였다. 

명백한 민간인 피해 사실

대대장의 이 조치는 이어 올 인민군 부대를 한 번 더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인을 살해한 범죄의 흔적을 없애려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이어 각 중대장에게 “앞으로 명령없이 발사하는 중대는 그 중대장을 문책하겠다”고 밝혔다. 이 사실도 이러한 의심의 근거가 되는데, 전투의 내용을 정리하면 최소한 민간인을 공격한 사실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7일 공격에서도 이미 지적했지만 우마차가 10여 대였다면 10여 마리의 소와 말을 끈 사람 역시 10여 명의 민간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피살자가 민간인이 2명 포함된 19명이었다고 적었다. 마치 2명 외에 모두 인민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대부분이 민간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도로를 내려오던 일행은 경계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으며 저항 역시 없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판단의 근거이다. 이 전투를 통해 노획한 무기가 있었는지에 대한 보고도 보이지 않는다. 앞서 인민군 49연대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지만 정작 이번에는 피살된 인민군의 소속을 밝히지도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사』는 장교 뒤에 따르는 민간인 복장의 사람들이 인민군인지 여부를 분명하게 서술하지 않았고, 대대장은 이 전투 후 명령 없이 층을 발사하는 중대는 문책하겠다며 질책했다. 
17연대 스스로 2명의 민간인이 사살당한 사실은 인정하고 있는 데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인민군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우마차에 적재한 물건을 탄약으로 보더라도 이들은 점령군의 위협에 의해 동원된 지역 주민들이었다고 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한편, 국가 공식 기록물에서 이날의 전투를 기록하지 않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화령장지구전적비』가 세워진 곳의 안내판에는 17일 전투에 이어 21일 전투만을 소개하고 있어 눈에 띈다.

▲ 그림 3) 『화령장지구전적비』 공원 내 화령장 전투지 안내판. 19일 전투는 소개하지 않았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사진 : 필자제공]

한편, 1954년 간행된 『육군전사』 제3권은 42쪽에 7월 19일부터 21일 사이의 정황에 대해 “전선은 평온하였고 제17연대는 계속 방어진지를 구축 강화하였다.”라며 이날 벌어진 전투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한국전쟁사』와 비교된다.
한편, 지난 국가기관의 조사에서 상주 화령장 전투 중 학살당한 민간인들이 확인되었음이 드러났다. 1960년 제4대 국회 「국회양민학살진상조사보고서」 내 양민피살자신고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상주 화서면 상현리, 상곡리, 화남면 동관리 일대에서 17연대 등에게 희생된 주민들이 확인된다. 이 보고서는 1960년 5월 23일 국회 본회의 결의에 따라 구성된 “양민학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같은 해 5월 31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 동안 조사한 내용이다. 
이때 피해 주민으로부터 접수받은 신고서에 따르면, 상곡리 윤숙상(33세)은 7월 20일 피란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군 17연대 군인에게 총살당했다. 당시 국군의 소개 작전은 토벌 작전과 다름없었으므로 집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보고서에는 상현리 김성택(57세) 역시 7월 30일 피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같은 날 같은 마을 김수원(여, 71세)과 김용득(32세)은 집에 있던 중 미군에게 총살당한 사실이 담겨있다.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이 피해 사실에 대해 조사한 바가 없었다.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사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전투가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시기에 국군 17연대에 의해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사실 일부가 『한국전쟁사』라는 국가기록에 의해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제라도 이들의 피해 사실을 전면적으로 조사하여 진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 그림 4) 화령장전투를 치렀다는 국군 17연대에 의해 상곡리 주민이 학살당한 사례가 1960년 국회보고서 신고서에서 확인된다. 당시 33세였던 희생자는 피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사진 : 필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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