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중동 침략전쟁(1) - 이스라엘과 미국

미국의 제국주의 일극 패권이 쇠퇴하면서 전쟁과 내전으로 얼룩진 중동에 평화의 기운이 싹트고 있다. 미군의 시리아 철군과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러시아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강력한 조정자로 등장했다.

이 연재는 ‘석유자원 탈취와 지역 불안정화’라는 전략목표 아래 ‘민주주의와 인도주의적 개입’을 구실로 자행된 미국의 30년 가까운 중동 침략전쟁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조성된 지구촌 정세 속에서 커가는 평화의 희망을 찾아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침략과 약탈이 아닌, 호혜와 친선에 기반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고대하며![필자]

1. 이스라엘과 미국 - 30년 중동 침략전쟁의 설계
2. 아프가니스탄 - 9.11과 카스피해 파이프라인 그리고 CIA 아편전쟁
3. ‘이라크 프로젝트의 미래’와 ‘대량살상무기’, 냉혹한 사기전쟁
4. 리비아 - 핵과 석유, 가다피를 위한 변명
5. 시리아 - ‘색깔혁명’으로부터의 생환과 미군 철군
6. 잊혀진 학살 - 팔레스타인과 예멘을 위하여!

침략의 첫 설계 - 이스라엘 ‘오데드 이논 계획’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전쟁과 내전, 인종학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대(大)이스라엘’ 정책인 ‘오데드 이논 계획(Oded Yinon Plan)’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982년 이스라엘 외무장관의 수석 고문이었던 오데드 이논은 이스라엘의 중동 지역 정복과 지배를 위한 문건을 하나 발표한다. 그 제목은 「1980년대 이스라엘을 위한 전략」이다. 이 문건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압도적 강자로 군림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신흥 패권 강자가 부상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국가들을 인종과 부족,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적 정체성’을 이용해 분열과 대립 그리고 전쟁으로 갈기갈기 찢어 ‘발칸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기법과 그리 다르지 않다.

중동국가들이 내부 안정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은 이스라엘의 국익에 배치된다.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는 정권 교체와 함께 제거되어야 한다. 색깔혁명과 문화침투에 이은 소요 조장, 용병 투입과 직접 침략을 통해 무정부상태를 만들고 자원을 탈취하는 시나리오, 이로써 미국의 패권은 유지되고 이스라엘은 안전해진다.

20세기말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리비아, 레바논, 수단과 소말리아, 시리아 등이 차례로 이 운명의 길을 걸었다. 오직 이란만이 강력한 국가적 응집력으로 미국의 봉쇄를 뚫고 살아남아 지역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골란고원에 지뢰경고를 알리는 문구가 철조망에 걸려 있다.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로 현재 이스라엘이 실효 지배하고 있지만 국제사회는 국제법에 반하는 이곳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92년 미국의 ‘방위계획 지침 초안’

구 소련 붕괴 직후인 1992년, 조지 H.W. 부시 행정부의 리처드 체니 국방장관과 폴 울포위츠 정책부차관, 루이스 리비, 잘메이 칼릴자드 등 4명은 46쪽의 ‘방위계획 지침 초안’을 작성해 향후 미국의 세계 전략 방향을 제시한다.

▲유일 초강대국의 확립과 경쟁국의 출현 방지
▲미국의 이익에 맞지 않는 다자주의의 폐기
▲전 세계 분쟁 개입과 선제 전쟁
▲급속한 군비 증강

영구적인 세계 패권을 추구하는 이 ‘신보수주의’ 초기 문건은 퇴행적인 제국주의의 청사진으로, “페르시아만의 석유에 대한 접근 필요성”과 “대량살상무기 확산, 미국에 대한 테러 위협” 등을 적시해 이미 이라크를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미국 외교정책의 급진적 전환을 요구한 이 문서는 공개 즉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부시 대통령은 이를 철회했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PNAC)

1997년 윌리엄 크리스톨과 로버트 케이건은 이 4명의 강경파들과 함께 다시 네오콘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창립한다. 방위계획 지침 초안의 공세적 이념은 “현재와 미래의 도전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강력하고 준비된 군대, 해외에서 미국의 원칙을 대담하고 의도적으로 장려하는 대외 정책과 미국의 세계적인 책임을 받아들이는 국가 지도력, 우리의 관심과 가치에 적대적인 체제에 도전” 등 PNAC의 원칙으로 재천명된다.

1998년 1월 PNAC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사담 후세인 정권의 제거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전략에 착수할 것”을 촉구한다. 도발하지 않은 주권국에 대한 침공을 요구한 것으로, 유엔헌장에 위배되는 국제 범죄였다. 클린턴은 그 요구를 무시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끝날 무렵인 2000년 9월 PNAC는 다시 “재래식 및 핵무기와 우주무기의 압도적 우위”를 추구하는 ‘미국의 방위 재건’이라는 안내서를 출간하고, 기존의 억지 정책을 전 세계 군사 패권의 장악으로 급격히 전환하기를 원했다. 여기엔 동시다발 전쟁과 세계 ‘경찰’ 임무 수행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문서는 이 전환의 과정이 “진주만 같은 재앙적이고 촉매제적인 사건이 없다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초현실적인 기대를 내비쳤다.

PNAC는 군사적 정복을 위한 로드맵을 설계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직접적인 미국의 전초기지 수립’을 제안했다. 또한 경찰기능 수행을 위한 징벌적 폭격과 비밀작전, 정권교체도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주의적 임무’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인도주의 전쟁이라는 거짓 소설을 유지하기 위해선 언론이 중요한 도구로 쓰인다. CIA의 외곽기관인 민주주의국가기금(NED) 등의 자금 지원을 받는 NGO 단체들도 동원된다.

한편, 1998년 오사마 빈 라덴은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 폭파 범인임을 ‘자처’했고, 클린턴은 보복으로 몇 발의 순항미사일을 아프가니스탄에 발사했다. 빈 라덴은 PNAC의 ‘미국의 방위 재건’ 문서가 나온 지 몇 주 뒤인 2000년 10월 다시 아덴항의 미 구축함 ‘USS 콜’호를 폭파해 미 해군 17명이 사망했다.

사태 해결을 위해 만난 유럽의 협상장에서 탈레반 측은 미국의 대규모 보복 폭격을 피하기 위해 빈 라덴의 ‘무조건 항복’, 또는 대안으로 미국 미사일에 의한 빈 라덴의 표적 처형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는 혼란과 논쟁의 여지가 있는 미국 대선이 진행 중이었고, 빈 라덴의 항복(또는 암살)은 차기 행정부로 넘어갔다.

침략전쟁의 시작

조지 W. 부시는 논란 끝에 대법원 판결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10년 가까이 중동에 눈독을 들이던 PNAC의 25명 회원들이 행정부에 합류했고, 그 중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울포위츠 국방부장관 등 16명은 최고위직에 포진했다. 최근까지 강경파로 맹위를 떨치는 리처드 아미티지와 존 볼턴, 엘리엇 에이브럼스 등도 합류했다. ‘미국의 방위 재건’에 명시된 예방-선제전쟁 등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은 공식적으로 체계화되었다. PNAC의 승리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조정하는 중동의 오랜 우선 과제는 폐기되었다. 대신에 사담 후세인의 전복이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자리했다. 부시 행정부는 취임 열흘 만에 이라크 침공에 매달렸다. 9.11 발생 8개월 전이었다.

나토군 사령관을 지낸 미군 장성 웨슬리 클라크가 2007년 자서전 ‘현대전에서의 승리’에서 고백한 대로, 이 시기에 이미 “5년 안에 이라크와 시리아, 레바논,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과 이란 7개국을 장악한다”는 미국의 군사적 로드맵은 가동되고 있었다. 핵개발이나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여부, ‘민주주의나 인권’ 문제에 무관하게 후세인과 가다피 살해, 전화에 휩싸일 중동 국가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국가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수백만이 희생되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난민으로 떠도는 가운데, 미국의 제재 봉쇄와 색깔혁명 시도 속에서도 이란만이 살아남았다. - 계속 -

[참조 : 신현철 ‘국제정치 완전정복’, 미셸 초서도브스키 ‘전쟁의 세계화’ ‘Global Research’, 코드핑크 ‘이라크 전쟁에 관한 인민법정’, 리처드 베한 ‘사기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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