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히 외, 1977, 사월의책

이 책은 전문가주의를 비판하는 5명의 글이 담겨 있다.
이반 일리히가 “우리를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들”을 저술했으며, 2장은 어빙 케네스 졸라가 “의료 만능 사회”를, 3장은 존 맥나이트가 “서비스 사회의 정치학”을, 4장은 조너선 캐플런이 “변호사와 사법 독점”을, 5장은 할리 셰이큰이 “베이비시터가 된 장인들”을 저술했다.

이반 일리히의 “우리를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들”은 전문가주의를 비판하는 총론적이고 종합적인 저술이다.

"전문가들, 즉 자신의 지식을 사회 문제나 타인을 돕는 데 쓰는 숙련되고 학식 있는 전문인들은 전통적으로 큰 존경을 받아왔다.
세대를 거듭하는 동안 종교, 법률, 의료, 심지어 군사 분야의 전문가들과 이제는 교육, 복지, 건축, 산업관리 등 새로운 분야의 전문가들까지 이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이익에 사심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로 인정받아 왔다.
스스로 자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삶을 더 충실하고 안락하고 건강하게 이끌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제는 전문가들이 과연 자신들의 서비스를 이타적인 의도로 제공하고 있는지, 그들 덕분에 우리의 생활이 실제로 향상되고 있는지, 오히려 전문가들의 활동에 예속되어 오기만 한 것은 아닌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7쪽)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넘어 현대산업사회의 근본적인 구조와 체계를 문제 제기했던 현대 사상가 이반 일리히가 20세기 후반에 문제 제기한 "인간을 불구화하는 전문가 시대"가 바야흐로 21세기 대한민국에 등장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많은 분야에서 전문가들은 한국사회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런 ‘전문가들의 독점 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이반 일리히가 문제 제기한 "전문가 시대"의 문제점은 아래와 같이 거시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눈에 보인다.

"전문가 시대는 정치가 시들어버린 시대, 유권자들이 교수들의 충고에 따라 자신의 요구를 법제화할 힘을 전문 관료들에게 위임해 버린 시대,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결정할 권리를 포기한 채 이 필요를 충족시킬 수단을 거머쥔 과두독점 체제에 시달린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정치에 대한 신뢰가 항상 낙제점이다. 언론과 여론은 정치를 불신하고 부정하도록 선동한다. 소위 교수와 정치평론가라는 자들이 언론에 등장하여 유권자 대신 정치를 평가하고 심판한다.
법을 만드는 국회와 지방의회에서도, 법을 집행하는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법을 판단하는 법원에서도 직업정치가, 교수라는 전문가, 변호사라는 전문가, 의사와 평론가라는 전문가, 의사라는 전문가, 과학자라는 전문가들이 유권자를 대신(자임)하여 모든 제도와 정책과 판단에 개입하여 결정한다.

“이 시대는 학교체제의 시대, 즉 사람들이 생애 3분의 1 동안은 자신에게 필요한 학습을 처방받고서 이 필요를 어떻게 더 늘려갈지 훈련받으며 보내고, 나머지 3분의 2 동안은 자신들의 소비 습성까지 관리하는 일류 강매자들의 고객이 되어 보낸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이 시대에 휴가 여행이란 낯선 이들을 멍하니 쳐다보다 오는 패키지 상품을 의미하고, 사람 사이의 친밀함이란 매스터스와 존슨 같은 부류들이 정해준 섹스 규칙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온갖 자격증이 사람의 능력과 실력을 대신하고 그 자격증은 소위 전문가들이 제도화시킨 후 자신들이 자격증을 줄지 말지 평가하고 결정한다.
유년기에는 아동학자라는 전문가가, 좀 더 성장하면 유치원장과 교사가, 의무교육에 들어서면 교육전문가와 관료와 교장과 교사가, 제도권 밖에서는 온갖 학원과 입시전문가가, 대학에 들어서면 교수라는 작자와 각종 학위와 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들이 청년들에게 필요한 학습을 규정하고 강요한다.
TV와 인터넷과 SNS와 신문에서 유권자와 소비자의 필요와 결핍을 규정하고, 무엇을 소비하고 공부해야 하고 즐겨야 하는지 결정한 후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이 시대는 지난밤 TV 토크쇼에서 나온 말을 재탕하는 것이 곧 훌륭한 의견이요, 별 차이도 없는 것들을 권하고 팔아먹는 자들에게 찬성표를 던지는 것이 곧 좋은 선택인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15쪽)

따라서 이반 일리히는 ‘전문가들의 사회’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기 위어 자립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에 대해 회의하고 계도하는 태도로 바뀌지” 않는다면 “기술전체주의(techno-fascism)”로의 추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상품에 대한 의존이 어떤 방식으로 욕구(wants)를 정당화했고 이 욕구를 긴급하고도 애타는 필요(needs)로 바꿔놓았는지 이해할 때만이, 그리고 이와 동시에 어떻게 그것이 사람들의 자립능력을 파괴했는지 이해할 때만이 우리는 새로운 암흑시대로의 진입을 피할 수 있다”(17쪽)는 것이다.
일리히는 이렇듯 사람들의 필요를 만들어내고 판정하고 충족하는 일을 도맡고 있는 전문가 집단이 실은 ‘새로운 종류의 카르텔’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미로처럼 뒤얽힌 관료제보다 더 깊이 뻗어 있고, 어떤 세계 종교보다 더 국제적이며, 어떤 노동조합보다 더 결속력이 강하고, 어떤 주술사보다 폭넓은 문제해결 능력이 부여되어 있는데다가, 이른바 그들의 고객들에 대해 어떤 마피아 집단보다 더 견고한 장악력”(19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일리히는 사람들을 전문가 체제의 노예로 만드는 환상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한다.
첫 번째 환상은, 인간이란 어차피 소비자로 태어난 존재이므로 어떤 목표를 세우든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해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환상은 교육에 그 원인이 있다.
두 번째 환상은, 공학적 소산물에는 더 많은 전문가 지배를 인가해야 한다는 식으로 기술 진보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기술 진보’라는 표현을 오로지 새로운 도구가 더 광범위한 사람들의 능력과 효율성을 재고하는 경우에만, 그리고 특히 사용가치의 자율적 생산을 더 늘리는 경우에만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환상은, 일반인이 도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먼저 전문직 테스트를 거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청바지가 아무리 간편하고 튼튼하더라도 ‘피에르가르뎅’이 보증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런 것이다.
네 번째 환상은, 전문가들이 성장의, 한계를 정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지 듣고서야 필요를 갖도록 전 인구가 사회화된 터에 이제는 그것이 ‘필요치 않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환상은, 고객이 전문가가 되어 스스로 자조(self-help)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전문가들의 전문화를 통해 ‘전문가들의 사회’를 사회 전체적으로 굳히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사람들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들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반 일리히 역시 뚜렷하고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사람들이 입을 열어 자신들이 공통적으로 원치 않는 것의 철학적이고 법적인 특성을 명확히 밝힐 때” 전문가의 시대가 막을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더해 “스스로 선택한 내핍생활이 어떤 즐거움과 이점을 주는지는 이미 이들이 입증하거니와, 갈수록 비용이 높아져만 가는 상품 소비의 ‘권리들’을 공적으로 제한할 때 자유도 보장된다는 일반이론이 여기에 더해질 때라야만 그 내핍의 이점들은 더 뚜렷한 정치적 형태와 무게를 얻게 될 것이다.”(53쪽)

일리히의 문제 제기처럼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일반인의 삶과 필요와 미래를 결정하고 제도로 정책으로 문화로 강요하는 사회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당장 뾰족한 방법은 없어도 끊임없이 회의하고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

[2019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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