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1) - 1950년 7월 17일 서천 장항읍

충남 서천군 장항읍에 포진했던 군산경찰서가 1950년 7월 17일 아침 10시 읍으로 진입하는 인민군 선발부대로 보이는 200명을 기습하여 20명을 사살하고 3명을 사로잡은 뒤 오후 3시 이리 부근으로 후퇴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944쪽) 경찰의 피해는 설명이 없었다.
그런데 하늘이 준 방어선인 금강 하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군산경찰서가 무슨 이유로 해군, 해병대와 함께 방어가 불가능한 장항까지 들어갔는지, 들어가서 한 일은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국전쟁사』는 이들 일행이 장항에 들어가기 직전 보령에서 후퇴하던 경찰부대가 서천을 거쳐 군산으로 후퇴한 사실을 설명하지 않았다. 두 부대는 서로 마주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인민군 6사단이 군산을, 그리고 인민군 4사단이 익산을 점령한 날이 7월 19일이었다고 하므로 7월 17일 당시 장항에 인민군이 들어왔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과연 인민군에 대한 군산경찰서의 기습이 있었던 것이 사실인지 또는 기습당했다는 200명이 인민군이 맞는 것일까?

▲ 그림 1) 『한국전쟁사』 제2권 944쪽. 경찰부대가 인민군 선발대 200명을 기습했다고 주장했다.

군산경찰서, 장항으로 이동하다

7월 11일 천안을 점령한 인민군 주력부대 6사단 13연대가 천안에서 갈라져 장항선을 따라 충남 서천을 향해 남하하여 7월 13일 오후 4시 대천에 이르렀다. 이들에게는 금강을 건너기 위해 장항을 점령하는 것이 매우 중대한 임무였다고 한다. 한강 하구를 건너 김포에 상륙한 부대도 이들이었을 것이다.
대천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군산경찰서(서장 현규병 총경)는 서천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할 경우 군산도 역시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먼저 서천 장항읍에 진입하여 이들을 막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멸할 각오로 싸울 것이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보아 장항읍으로 건너가 금강을 등지고 싸우려던 시도는 어리석어 보인다. 오히려 한강 전투처럼 금강 강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강을 건너려는 인민군을 저지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경찰서의 병력만으로 1천 명이 넘을 인민군의 공격을 아무런 방어선도 없는 장항읍내에서 이들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도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판단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7월 16일 해병대 1개 대대 규모의 고길훈 부대가 군산에 상륙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이들이 군산에 상륙한 목적은 당시 군산에 보관되어 있던 정부미를 반출하는 것이었지만(『서천군지』 제2권, 317쪽) 당시 아군 측은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면 경찰병력과 힘을 합쳐 인민군의 전진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여튼 1950년 7월 17일 오전 경찰서장은 강을 등지고 싸우러 나가면서도 ‘기선을 제압한다’며 군산경찰서 경찰관 50명과 후퇴한 충남경찰대, 해병 1대대(대대장 고길훈 소령)와 함께 장항으로 이동했다.

▲ 그림 2) 군산과 장항 사이에 다리가 놓이기 전에 사용되던 나루였다고 한다. 이곳으로 군산경찰서와 해병대가 장항에 상륙했을 것이다. 2019년 8월 9일 조사.

두 시간의 기습 전투와 그 후

7월 17일 군산경찰서장 일행이 오전이라고 했을 뿐 몇 시에 군산을 출발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장항 나루까지 거리와 도착 후 방어 전투를 준비해야 하는 정황으로 보아 대략 새벽 6시 경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항에 도착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뒤 오전 10시 인민군 6사단의 선발부대로 보이는 200명이 진지로 다가오자 군산경찰서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이날 10시 선발부대로 보이는 200명의 적이 장항에 침입하였다. 이에 군경부대는 이들을 기습하여 2시간 동안 격전 끝에 적을 격퇴하고 사살 20명, 포로 3명의 성과를 거두었다.”라고 헸다. 아군 측의 피해가 없었는지 이에 대한 기록은 없었으며 적으로부터 빼앗은 노획물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적을 격퇴했다고 서술했지만 오후가 되자 인민군 주력부대가 공격을 시작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군경부대는 결국 오후 3시에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에도 역시 아군 측의 피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위 설명에서 정작 전투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이들이 후퇴한 곳이 군산이 아니라 이리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리까지 후퇴했는지도 설명이 없지만 하여튼 서장을 포함해 군산경찰서 경찰관들 모두 군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리로 물러났던 것이다. 군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장항에서 패할 경우 군산까지 포기하기로 했던 것이었을까? 
위 책의 주장을 근거로 판단한다면 당시 인민군 6사단은 7월 17일 오전 10시 장항읍에 진입을 시도했으며 오후 3시 장항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전투에 대해 라주바예프의 보고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라주바예프에 따르면, 서천을 향한 인민군은 6사단 13연대로 7월 16일 오후 늦게 서천을 점령했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333~334쪽) 이들은 7월 18일 금강을 도하하였고 7월 19일 새벽 경찰부대와 전투를 치른 뒤 오전 10시 군산을 점령했다고 한다.(앞의 책, 357쪽) 즉, 이들이 전투를 치른 곳은 장항이 아니라 군산이었으며, 서천군청 소재지에서 장항읍까지 약 8km 떨어져 있었으므로 7월 17일 오후에는 이들이 장항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7월 11일 아산을 출발한 인민군 6사단 중좌 최태환의 증언도 이와 일치한다. 그는 서천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보낸 뒤 7월 17일 장항을 향해 남진했는데 남진하는 동안 별다른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했다.(최태환, 『젊은 혁명가의 초상』, 141쪽) 
군산경찰서가 장항 방어선에서 후퇴한 다음 날 7월 18일 B29를 비롯한 미 공군의 폭격기들이 장항읍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후퇴했으니 이제부터 장항은 적의 점령지가 되었던 것이다. 
군산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날은 7월 19일이었고 당시 군산에 진입한 인민군은 6사단 2개 부대였는데, 13연대는 서천을 통해 금강을 건넜고 15연대는 논산 강경을 거처 임피면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 그림 3) 서천경찰서 신청사와 장항지서가 있는 읍내의 모습이다. 이곳 너머에 군산으로 가는 바다가 있어 이곳에서 전투 후 후퇴를 했다면 바다를 건너는 방법 외에는 없어 보인다. 후퇴에는 해군의 함정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2019년 8월 9일 조사.

또 다른 경찰부대가 이미 서천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사』의 또 다른 서술에 따르면 같은 시간 서천에는 이미 경찰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15일경 홍인출 경감이 지휘하는 충청남도경찰국 직속 특경대가 이미 서천에 집결한 공주, 청양, 보령, 홍성, 당진, 서산 등의 경찰 200명과 함께 서천 북쪽 고지 일대에서 방어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군산지구 해군경비부 사령관 김종기 소령의 명령에 의해 비인 부근에서 1,500명의 인민군과 대치하다가 7월 17일 아침 7시 금강을 건너 군산으로 후퇴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943쪽)
마치 별개의 사건처럼 서술하고 있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앞에서 군산경찰서장이 했다는 말, 즉 “먼저 서천 장항읍에 진입하여 이들을 막기로 결정했다”라든가 “기선을 제압한다”라는 말은 거짓이 아닐 수 없다.
수백 명의 경찰부대가 같은 날 아침 7시 장항을 통해 군산으로 후퇴했으며 군산을 떠난 군산경찰서 역시 거의 같은 시간에 군산항에서 장항을 향했던 것이니 어쩌면 두 부대는 금강변 어느 쪽이나 금강 위에서 만났을 가능성까지 있어 보인다. 마치 교대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경찰부대가 금강선에서 방어하지 않고 굳이 강을 건너 장항까지 갔던 또 다른 이유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상대가 1,500명 규모의 인민군이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난 직후 서천경찰서에 의해 미리 체포된 지역의 지도자급 국민보도연맹원 20여 명이 대전형무소로 보내졌고 서천에서 총살이 집행된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충남 국민보도연맹 사건(2)」,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4권, 529쪽) 하지만 전체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바 없으니 이 주장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사살된 20명의 인민군은 국민보도연맹원이었을까?

이들 인민군 6사단 13연대의 목적은 장항읍을 지나 군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병력의 수나 무장의 수준을 비교한다면 이들이 장항읍에 포진한 군산경찰서의 병력을 중요한 상대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기습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서술에 과장이 있어 보이는데 실제 공격이 있었는지도 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7월 17일 군산경찰서와 해병대에게 사살당했다는 20명은 누구였을까?
서천 지역에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서면 희생자 외에 조사되지 않았다. 군산경찰서의 경우 유치장에 감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총살한 날이 7월 19일이었다. 이날은 인민군이 군산을 점령한 날로 인민군 점령 직전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일어났는데 경찰서장이 이리로 후퇴하고 없는 상태에서 저질러졌던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생존자는 후퇴가 임박했던 군산경찰서 경찰들이 다급하게 유치장 창살 사이로 총을 쏘았다고 했으며 경찰관 나 씨는 인민군이 군산에 진입하는 것을 확인하고 후퇴하면서 유치장에 감금된 보도연맹원들을 사살했다고 증언했다.
서천에서는 경찰서에 소집되어 있었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언제 어디에서 희생되었는지 아직 조사된 바 없다. 다급하게 총살했다는 군산의 사례로 보아 7월 17일 군경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는 장항읍의 20명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