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인가 학살인가 : 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0) - 1950년 7월 17일 강경

국가 기록만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사건이 논산 강경에서 벌어졌다. 인민군의 진입을 앞두고 1950년 7월17일 인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강경을 탈출하던 30여 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사로잡혔다. 사망자 중에는 경찰서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경찰이 탈출 시기를 놓친 원인이 국군으로 위장한 인민군 때문이었고 사망한 경찰관의 수도 83명이었다고 주장했다.

▲ 『한국전쟁사』 2권 736쪽. 국방부는 강경경찰서원 죽음의 원인을 “아군을 가장한 적의 간계”라고 설명하였다. “아군을 가장한 적”은 누구였을까?
당시 인민군이 강경에 도착했는지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이 전투에서 강경경찰서가 말한 “적”은 누구를 말하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경찰관들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 즉 이들이 후퇴의 시기를 놓치게 된 이유가 “아군을 가장한 적”이라는 주장도 의문점 중 하나이다. 

강경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화해위원회는 강경에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조사했지만 진실의 일부를 확인하는 것에 그쳤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난 직후 강경경찰서에 의해 미리 체포된 지역의 지도자급 국민보도연맹원 20여 명이 강경역 앞에 있는 에이메 여관에 수용되었다가 대전형무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이들이 7월10일 전후에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모두 희생된 것으로 보았다(진실화해위원회, 「충남 국민보도연맹 사건(2)」,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4권, 527~528쪽).

위원회의 조사가 20여 명이었던 지도자급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것에 그쳤지만 이승만 정부에 의한 명령이 전국 경찰서에 내려진 것으로 보아 일반 국민보도연맹원들 역시 강경경찰서 유치장 등에 소집당해 강경 인근 어디에선가 희생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서장이나 지서장이 학살을 반대한 경우나 학살을 감행할 여유가 없이 후퇴하느라 방치된 경우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강경의 경우는 일반 국민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그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강경경찰서는 7월15일 경찰서 방공호에 감금하였던 국민보도연맹원 중 10여 명을 인근에서 총살했고 20여 명을 대전형무소로 이송시켰는데 나머지 주민들은 석방했다는 주장이 있다. 7월15일은 강경경찰서가 임실까지 후퇴한 날이었으므로 이날 학살이 있었다는 주장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이북의 언론 『민주조선』은 이와 관련하여 “7월12일부터 2일 간에 걸쳐 론산읍에서만도 로동자 김도원 씨를 위시하여 3백여 명의 애국자와 일반 인민을 무조건 체포하였다. …(중략)… 서로 경쟁적으로 총살 혹은 타살케 하였다.”라고 썼다(『민주조선』, 1950. 8. 21; 신경득,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살림터, 2002, 167쪽. 재인용). 학살 장소는 “전주로 가는 길목 산골짜기”라고만 되어 있어 구체적인 장소는 확인되지 않지만 7월12일과 13일 논산과 강경 지역에서도 후퇴하는 경찰 등에 의해 큰 피해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 옛 강경경찰서가 있던 곳이 지금은 논산경찰서가 되었다. 2019년 4월 19일 조사.

때 이른 후퇴

2018년 발행된 강경향토지 『한국전쟁 속의 강경』에 따르면, 7월14일 공주를 점령한 인민군이 7월15일 남하를 시작했다고 보았던 미군은 같은 날 오전 10시 강경읍내에 소개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이에 따라 강경경찰서 정성봉 서장과 220여 명의 경찰은 임실까지 후퇴했다. 당시 미 24사단 34연대가 논산 부적면 마구평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경찰과 우익 단체가 후퇴하자 전쟁 전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 주민들이 경찰서를 접수했지만 공주를 점령한 인민군 4사단이 대전으로 향했으므로 논산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었는지 임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강경경찰서는 7월16일 전주로 올라와 전주초등학교에서 다시 1박을 했다.

반면, 『한국전쟁사』는 인민군이 곧 강경에 진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먼저 자신들의 가족들을 대구 지역으로 피란을 보냈으며 이후 강경경찰서는 1950년 7월15일 전주로 후퇴하여 풍남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주둔했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6일에도 아직 인민군이 강경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강경경찰서의 후퇴 경과에 대해 “강경서장 정성봉 경감 이하 전 서원 66명은 동월 15일에 북괴가 대거하여 강경으로 육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단 전주로 이동하여 권토중래를 꾀하다가 전 날(16일을 말함 -필자)에 아직 강경에는 적의 주력이 다다르지 않았음을 알고 다시 강경을 수복키로 하였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임실까지 후퇴했다거나 전주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차이를 제외한다면, 7월15일과 7월16일 강경경찰서가 후퇴하여 전주에 피란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두 자료의 내용은 일치한다.

▲ 2018년 발행된 강경향토지 『한국전쟁 속의 강경』. 『한국전쟁사』를 기본으로 삼았지만 강경주민들의 증언록이 더해졌으므로 『한국전쟁사』가 숨기고 있는 모순된 사실이 자세히 드러난다.

복귀 후 색적(索敵)하다

7월16일 서해안지구 전투사령관 신태영 소장은 인민군 4사단이 논산이 아니라 대전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듣고 정성봉 서장에게 강경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장은 경찰관들을 3개 중대로 편성하여 1중대장에 보안계장 오현희 경감, 2중대장에 논산지서장 송인석 경감, 3중대장에 사찰계장 방규혁 경감을 임명한 다음 간단한 전투 훈련을 마치고 오후 5시 강경으로 떠났다. 이들은 밤 10시 채운동에 도착하여 채운산에 진지를 편성하고 경찰관 선발대를 강경경찰서 등에 보내 읍내 상황을 살펴본 결과 지방 좌익들이 경찰서를 점거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7월17일 새벽 2개 조로 편성된 경찰부대가 경찰서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1조는 강경역 철로 변을 따라 경찰서 앞 철도건널목으로, 2조는 산양 삼거리 논둑길을 따라 강경여고 앞 철로 변 개천으로 총을 쏘며 경찰서로 진입했다. 피란하지 못하고 읍내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이 총소리가 옥녀봉에서 나는 총소리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인민군이 옥녀봉 방향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강경경찰서를 일시 점거한 주민들을 물리치고 복귀한 서장은 1중대에게 경찰서 경비, 2중대에게 채운산 경비, 3중대에게 강경읍내 좌익 주민 색출의 임무를 나누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서장이 경찰관 66명을 지휘하여 7시간의 전투 훈련을 마친 뒤 오후 5시 강경경찰서로 복귀하였으며, 아직 인민군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색적(索敵)” 즉 적을 색출하는 활동을 했다고 적었다. “이에 이들은 7시간에 걸쳐 전투훈련을 실시한 다음 동일 17:00에 서장 진두지휘로 강경으로 진격하고 시가의 요지요부를 점령하여 색적(索敵)에 임하였다.”고 했다.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민간인을 “적”이라며 학살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인천에서 벌어졌다. 인천에서는 6월28일 경찰, 공무원 등이 떠나자 인천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활동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국군과 경찰이 6월30일 인천에 복귀하여 주민들을 살해했다.

인천경비부 참모장 정경모 소령은 1965년 “그리고 30일에는 아 해군의 헌병대와 경비부대원들도 인천시가에 투입되었는데 그 수는 약 200명 정도였다. …(중략)… 동시에 인천시가에 들어온 북괴군과 치열한 대전을 벌였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어 “7월3일 밤에는 드디어 적의 전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앞에서 말한 “치열한 대전”은 인민군이 인천에 진입을 시작한 7월3일 밤 이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국방부, 앞의 책 제1권, 797쪽). 그는 해군 헌병대 등이 마치 인천에 진입한 인민군과 전투를 벌인 것처럼 증언했지만 그들은 인민군이 아니라 민간인이었던 것이다.

7월3일 다시 후퇴할 때까지 인천에서 희생된 민간인의 수가 1천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처럼 비슷한 지역의 사례를 비교해 본다면 후퇴했던 강경경찰서가 말하는 “적”은 인민군이 아니라 곧 민간인들이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적 “대한유격대”의 간계?

경찰관들은 강경으로 복귀하는 중 또는 복귀하여 “색적” 활동을 하는 중 30여 명의 무장 군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들에 대해 『한국전쟁사』와 강경향토지 모두 “육군본부 특공대”와 “아군을 가장한 적”이라며 마치 서로 별개의 부대인 것처럼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강경을 배경으로 활동한 무장 군인들은 이들 외에 없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시가를 배회 중인 지방공비 5명을 검거하고 이날 03:00에는 무장괴한 10명을 포착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마침내 아군을 가장한 적의 간계에 빠져 1,000명으로 추산되는 적에게 포위되기에 이르렀다.”라고 했다(출처, 국방부, 앞의 책 제2권, 736~737쪽, 944쪽). 이들은 “아군을 가장한 적”은 국군에 소속된 최전방 첩보부대라고 하면서 육군 소령이 발급한 “대한유격대” 대원 신분증을 제시했고, 경찰서장은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상부에 연락했으나 통신이 두절되어 확인을 못했다고 한다.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이 강경향토지 『한국전쟁 속의 강경』에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읍내를 수색 중이던 3중대는 오후 1시 옥녀봉에서 수상한 무장군인 30여 명을 발견했는데, 이들이 인민군 6사단 1연대와 내통하여 경찰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강경향토지에 등장하는 무장군인 30여 명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전쟁사』의 사실 왜곡을 바로잡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단서이다. 『한국전쟁사』는 이들 무장괴한이 10명이라면서 이후 살펴 볼 “육군본부 특공대” 27명과 다른 군인들처럼 서술했지만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무장 세력은 강경경찰서 경찰관 외에 이들밖에 없었으므로 이들 30여 명의 무장군인은 곧 27명의 “육군본부 특공대”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7월17일 새벽 3시에 포착된 10명의 무장괴한은 오후 1시에 옥녀봉에서 발견한 “육군본부 특공대”의 일부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한국전쟁사』가 말한 “아군을 가장한 적”, 강경향토지가 말한 “인민군 6사단 1연대(인민군 13연대는 서천에 있었으므로 14연대 또는 15연대일 수도 있었다)와 내통한” 무장군인은 곧 이들 “대한유격대”, “육군본부 특공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강경향토지는 이들 무장 군인들이 “국군의 정보와 암호까지 샅샅이 알아내” 능력이 놀라운 게릴라들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이들은 국군 소속의 유격부대였으므로 국군의 정보와 암호까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황과 일치한다. 유격대원 신분증을 발급했다는 육군 소령은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배동찬 소령이었을 것이다.

7월17일 경찰과 “육군본부 특공대”가 진입한 오후 5시부터 강경읍내에서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 인민군은 아직 성동면이나 광석면에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므로 이 총성은 대한유격대원이나 경찰관의 총에서 난 소리였을 것이다. 앞서 『한국전쟁사』는 대한유격대원들이 20여 명을 사살했다고 했다. 사망자들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지만 대한유격대가 성동다리를 방어하겠다며 경찰서를 나선 뒤 시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므로 이들에게 사살당한 사람들은 강경읍내 주민들이었을 것이다.

육군본부 특공대

후퇴했던 강경경찰서에 복귀하여 적을 색출했다고 하지만 실제 그 대상은 국민보도연맹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10여 명의 무장괴한, 즉 1천 명의 군중에게 포위되게 만든 “대한유격대”가 누구였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한국전쟁사』에 담겨 있었다.

7월17일 서해안지구 전투사령관 신태영 소장은 27명으로 구성된 육군본부 특공대(대장 배동찬 소령)에게 ‘강경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하니 강경에 잠입하여 침공한 적의 규모를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한국전쟁사』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7월17일) 해질 무렵에 황등과 함열을 거쳐 강경 남쪽 채운산에 잠입하는데 성공하고 정찰활동에 들어갔던 바 주간에 강경을 탈출치 못한 민간인과 경찰 등 250명을 구출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이들 제보에 따라 점령 중인 적이 2,000명 규모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했다(출처, 국방부, 앞의 책 제2권, 737쪽).

▲ 『한국전쟁사』 제2권 737쪽. 유격활동을 전개해왔다는 27명의 육본특공대가 강경경찰서와 함께 활동했다. 강경경찰서가 말하는 “대한유격대원”은 이들의 신분과 일치한다. “아군을 가장한 적”은 이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강경에 도착하여 적 20명을 사살하고 250명의 민간인과 경찰을 이리로 탈출시켰다고 하며 신태영 소장에게 인민군의 규모가 2천 명에 이른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원래 부여받은 임무가 “적의 규모 보고”였으므로 적 사살 20명, 경찰과 민간인 구조 250명이라는 결과는 임무를 넘어선 엄청난 전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육본특공대가 잠입했다는 채운산은, 군중에게 포위되었다는 강경경찰서와 1km도 미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육본특공대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군중에게 포위된 강경경찰서 경찰관들은 전멸했다는 것이므로 250명을 구출했다는 육본특공대의 주장은 이런 상황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국전쟁사』의 주장대로 이들이 7월17일 채운산까지 잠입했었다면 강경경찰서를 둘러싼 1천 명의 군중을 목격했을 것인데 그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한편, 육본특공대가 노획한 군수품은 쌍안경, 권총, CAR 각 1개였다고 했다. 사살당한 20명의 적에게 노획한 군수품이라고 하기에는 빈약하다. 피살자들 대부분이 민간인들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든다.

『한국전쟁사』는 전멸했다는 강경경찰서와 자신들만 살아 돌아간 육본특공대의 관계를 마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은 전투 당시 같은 강경읍내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같은 “색적”과 처단 활동을 했으므로 서로 만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정작 강경경찰서가 만났다는 무장 군인들은 육본특공대가 아니라 “대한유격대”라는 인민군 측 유격대였다고 주장했다. 2018년 발행된 강경향토지 『한국전쟁 속의 강경』 역시 강경경찰서의 전멸이 “대한유격대원”에게 속아서 생긴 참상이라고 주장했다. 앞에서 말한 “대한유격대원”이 곧 이들 “육본특공대원”들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억지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적” 1천 명은 누구였을까?

“대한유격대”가 곧 “육본특공대”였다면 이들이 무사히 빠져나간 사이 강경경찰서는 어쩌다가 1천 명의 “적”에게 포위당하게 되었을까? 강경경찰서를 18시간이나 포위한 1천 명의 군중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 경찰서가 포위된 것, 경찰관들이 전몰한 것은 사실일까?

『한국전쟁사』는 “서장 이하 전 서원은 서 구내에 농성하여 혈전 18시간을 계속하다가 끝내 탄약이 바닥이 나 이에 혈로를 타개코자 육박전을 감행하여 포위망의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무위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경찰관들이 갖고 있던 탄약이 바닥날 때까지 대치하고 있었다면 이들을 둘러싼 1천여 명의 적은 소총 등의 강력한 무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 역시 이들이 인민군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라주바예프에 따르면, 인민군 6사단 15연대는 7월17일 오후 늦게 강경에 도달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받았으며, 7월18일 새벽 5시 공격을 시작하여 아침 6시 30분 강경을 점령했다고 한다(라주바예프,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제1권, 335쪽). 이북의 역사학자 허종호 역시 강경을 해방한 날이 7월18일이었다고 했다(허종호, 『미제의 극동침략정책과 조선 전쟁』 제2권, 69쪽).

이북의 문헌자료에 따른다면 인민군은 7월17일 저녁까지 강경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국방부가 주장하는 같은 날 새벽 강경경찰서를 둘러쌌다는 1천 명의 적은 인민군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찰서에는 강경경찰서 1중대 80여 명이 방어하고 있었고 채운산과 봉화고개에도 2중대와 3중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교전이 18일 새벽까지 계속되자 2중대와 3중대에서 일부가 경찰서로 지원을 나왔다고 한다. 당시 전투가 시가전 형태로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이로 봐서는 전투는 강경경찰서에서 벌어진 것에 그쳤음을 알 수 있다. 경찰서 인근에 있었던 채운산과 봉화고개에서도 전투가 없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시가전은 강경읍내 주민들에 대한 공격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17일 저녁 이후 대한유격대나 육본특공대는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이후 서술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적의 규모를 파악하라는 임무를 마쳤으므로 육군본부로 복귀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들이 무슨 이유로 강경경찰서와 함께 후퇴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문헌에서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앞에서 7월11일 공주 유구에서 인민군이 곧 진입할 것을 알고 있던 국군 독립기병중대가 유구지서장에게 방어를 지시하고 떠났음을 살펴보았다. 육본특공대 역시 강경경찰서에 같은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편, 강경향토지에 따르면 7월17일 오후 5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17일 저녁 8시 인민군 측의 협상 요청에 따라 잠시 중단되었다고 한다. 고립되어 공격을 받던 강경경찰 측에서는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어 1차로 이계봉 경사를, 2차로 조인환 경위를 내보냈으나 서로 “먼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고 주장했으므로 협상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한다. 인민군 정규군이 경찰과 항복을 놓고 협상을 했다는 이 주장 역시 상식적이지 않다. 경찰서를 포위한 사람들이 인민군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경찰서원들의 전사

위 책자에는 얼마 동안 협상이 진행되었는지 밝히지 않고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잠시 뒤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정성봉 경찰서장은 7월18일 새벽 6시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는 라주바예프가 앞에서 강경을 점령했다는 아침 6시 30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후퇴 준비를 마치자 경찰서장이 탄 쓰리쿼터와 경찰 30여 명이 탄 트럭이 경찰서를 떠났지만 낮 11시 황산 사거리를 지나 강경중학교에 이르렀을 때 인민군의 집중 사격을 받게 되었다. 10여 명이 사로잡혔으며 탈출한 경찰관들도 있었지만 나머지 30여 명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어 7월19일 오전 미군 정찰기의 비행이 있은 뒤 전폭기가 강경경찰서를 폭격하고 기총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새 강경이 적 진영이 되었다는 것을 미군이 어떻게 알았는지 폭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결국 경찰서장 등 서원 83명이 대한유격대원이라고 주장하는 무장괴한 10명에게 속아 7월18일 낮 11시 30분 모두 전사했다고 설명하였다. 후퇴의 시기를 놓친 이유가 이들 대한유격대원의 주장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이렇게 하여 중위에 빠진 것을 깨달은 서장 이하 전 서원은 서 구내에 농성하여 혈전 18시간을 계속하다가 끝내 탄약이 바닥이 나 이에 혈로를 타개코자 육박전을 감행하여 포위망의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무위로 돌아가 전원이 사이유영(死而有榮)을 함께 하게 되었다.”라고 했다(출처, 국방부, 앞의 책 제2권, 736~737쪽, 944~945쪽).

▲ 옛 강경경찰서 앞 고가도로에서 본 채운산과 강경역. 1950년 당시 채운산에는 육본특공대와 강경경찰서 경찰관들이 함께 주둔했다. 2019년 4월 19일 조사.

진실

이제 앞의 『한국전쟁사』와 『한국전쟁 속의 강경』을 종합하여 당시 강경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의문점들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다.

먼저, 강경에 인민군이 언제 진입했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 두 책자를 종합하면, 후퇴했던 강경경찰서가 복귀한 때는 7월16일이었으며 다시 후퇴한 때는 18일 아침이었다. 육본특공대는 7월17일 오후 5시경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로 복귀했다. 이는 7월17일 밤에 도착해 조직적인 저항을 받은 뒤 7월18일 새벽 강경읍내를 점령했다는 라주바예프의 주장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육본특공대”가 곧 “대한유격대”였다는 사실 역시 두 자료의 비교에서 확인된다. 신태영 소장의 명령으로 27명의 “육본특공대”가 7월17일 채운산에 잠입했다고 했다. 당시 채운산에는 강경경찰서 2중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니 두 집단이 만난 것은 분명했다. 실제 읍내에서 수색활동을 하던 3중대가 같은 날 새벽 3시 성동교에서 10여 명 또는 오후 1시에 옥녀봉에서 30여 명의 무장 군인 “대한유격대”를 만났다고 했다. 당시 강경읍내에서 강경경찰과 “육본특공대” 외에 30여 명 또는 10명의 또 다른 무장 군인이 활동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육본특공대”가 바로 “아군을 가장한 적”이라는 “대한유격대”였던 것이다. 이들은 7월17일 저녁 강경에서 사라졌다. 이들이 사라진 시간이 인민군의 진입 시간과 가까웠다는 사실로 보아 이들과 함께 후퇴한 민간인이 250명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일 수 있으며, 강경경찰서와 함께 후퇴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경찰에게 강경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강경경찰서가 복귀하는 과정에서 또는 “육본특공대”가 활동하는 과정에서 이들에게 사살당한 사람들은 누구인지 판단할 수 있다. 경찰이 후퇴한 15일부터 17일 저녁까지 인민군은 강경읍내에 진입하지 않았으니 경찰서를 점거한 사람들은 좌익 계열의 주민들이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나 경찰에 원한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수 있다. 이들이 경찰의 진입 과정에서 총살당했을 것이다.

17일 오후 5시 이후 종적이 사라진 “육본특공대”에 의해 사살당한 20명 역시 강경에 살던 주민들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사』는 당시 강경에 있었다는 1천 또는 2천 명의 적이 인민군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다. 인민군이 강경에 진주한 날이 7월18일 아침이었다면 국방부가 말하는, 강경경찰서를 포위했다는 1천 명의 적은 일반 시민이었을 수 있다. 후퇴한 경찰이 돌아와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한 시민들이었을 것이다.

과장되어 보이는 측면도 몇 가지 지적할 수 있다. “전원이 진몰”했다는 주장은 경찰의 죽음을 지나치게 미화했다. 마치 강경경찰서를 끝까지 사수하다 전원이 전사한 것 같은 서술도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혈전 18시간 또는 25시간 계속된 전투라는 표현도 지나쳤다. “혈로를 타개코자 육박전을 감행”했다는 서술 역시 과장되었다. 경찰청 홈페이지 추모관에 정성봉은 “강경경찰서장으로 6.25사변 중 적의 래습 도발함을 총지휘 교전 중 장열한 전사”라고 적혔다. 순직일은 1950년 7월 19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사』의 7월 18일 낮 11시 30분이라는 기록과 다르다(출처 : 경찰청 홈페이지 https://bit.ly/2oHyOg4). 

강경경찰서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태를 종합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의 소개 명령에 따라 1950년 7월15일 강경에서 후퇴한 강경경찰서는 임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7월16일 전주에 와서 신태영 소장으로부터 즉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강경에 진입한 경찰은 7월16일 밤 10시 채운산에 진지를 편성한 뒤 7월17일 새벽 강경경찰서에 복귀했는데 당시 반정부 성향의 주민들이 경찰서를 점거하고 있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소총을 쏘았으므로 희생된 주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날인 7월17일 신태영 소장의 명령으로 “육군본부 특공대”가 채운산 등 강경읍내에서 활동하면서 강경경찰서와 함께 반정부 성향의 주민들을 색출하여 총살했지만, 저녁 무렵 인민군 6사단 15연대 등이 강경 부근에 도착하자 경찰을 포함하여 250명의 주민들과 함께 철수했다. 한편, 강경경찰서에서 주둔하던 경찰은 이들과 함께 후퇴하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자 7월18일 아침 소형 트럭과 중형 트럭을 이용해 40여 명이 탈출하던 중 인민군의 공격으로 3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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