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개인 견해이며 4.27시대연구원의 공식 입장은 아닙니다.

1. 전환기 정세의 두 장면 

필자가 이 글을 쓴 지난 5일 오후 서초동에서는 ‘검찰개혁’, ‘조국수호’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그보다 이틀 전인 10월3일에는 대규모 ‘조국퇴진’ 집회가 광화문에서 있었다. 양 집회 모두 대략 100만이 넘을 것 같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다. 또 멀리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북미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를 위한 실무회담이 열렸다. 일련의 장면들은 마치 시차를 뛰어넘어, 1946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 회의를 두고 서울에서 열린 대규모 ‘찬탁·반탁’ 집회의 데자뷔처럼 느껴진다. 

서초동 집회를 두고 한국진보는 적극 참여파와 방관파, 참여반대파로 입장이 갈려있다. 지난 촛불을 처음부터 적극 추동했던 한국진보가 이렇게 갈라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서울의 대규모 집회와 스톡홀름 회담, 서로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두 장면은 어떻게 상호 연결이 되어있을까? 차후 논거는 주관적 추론이 많다. 그러나 때로는 주관적 추론이 정세발전의 다양한 가능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하며 복잡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기대를 모았으나 성과 없이 끝난 스톡홀름 회담을 먼저보자. 김명길 북측 실무회담대표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미국은 그동안 유연한 접근과 새로운 방법, 창발적인 해결책을 시사하며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하였으나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며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미국이 우리가 요구한 계산법을 하나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미국이 빈손으로 협상에 나왔다고 말했다. “우리는 미국 측이 우리와의 협상에 실제적인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판단한 데 따라 협상을 중단하고 연말까지 좀 더 숙고해볼 것으로 권고했다”고 덧붙였다. 다시 연말까지 협상의 여지를 두고 있으나 기대했던 3차 북미정상회담이 중대 기로에 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018년 6.12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과 공동성명은 역사적 사건이다. 이 흐름이 성공적으로 갔다면 아마 지금쯤 종전선언 이후 한반도 비핵화와 맞물려 남·북·중·미 4자 평화협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또 남북의 협력은 통일열기로 발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여전히 미국 행정부 내부의 대북정책 분열과 찬반양론 속에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6.12싱가포르성명 이후에도 미국은 CVID 방식의 일방적 비핵화 등 실현 불가능하고 구태의연한 대결을 재현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연합군사훈련 중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문재인 정부 역시 4.27판문점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의 남북 불가침과 상호군축 원칙을 무시했다. 오히려 전략무기들을 미국으로부터 대대적으로 도입하였다. 이에 반발한 북도 다양한 신종 극초음속 전술유도무기 시험을 진행했고, 10월2일에는 신형 북극성-3형 SLBM까지 시험했다. SLBM은 ICBM보다 무서운 ‘절대’ 전략무기이다. 북미협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한반도는 1945년 해방 이상의 역대급 격랑 속으로 빠져들 처지에 놓여있다. 

2. 전환기 정세 미국의 반(反)통일전략

이러한 한반도 대전환기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은 혼돈이다. 대한국 정책도 서로 다른 기류의 엇박자가 종종 연출되고 있다. 북의 극초음속 전술무기 시험에 대한 미국의 반응 역시 트럼프 진영과 미국의 군산세력(글로벌리스트)과 온도차가 확연하다.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입장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 현상이다. 한국민중의 일본에 대한 강한 반발과 한국정부의 간절한 요청도 있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면 불가능했던 사안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미일관계를 염두에 둔 트럼프 대통령의 미온적 태도와 연관돼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머지않은 미래 불가피한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의 균열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만약 미국이 조선(북한)과 평화협정에 임한다면, 미래 한반도통일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이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다. 미국은 과연 남과 북이 합의한 6.15공동선언에 절충적으로 제시된 ‘연방연합제안’을 지지하고 한반도 문제에 손을 떼고 순순히 떠날 준비를 할 것인가? 불행히도 평화협상이 진전되더라도 미국은 한반도 통일을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된다. 남북 분리주의적 입장(평화공존형 연합제)을 관철하며, 설사 평화협정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할 처지라도 한국 내 친미정부를 유지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설사 북과 트럼프 대통령의 조미평화협상이 진전되어도 한국문제에서 오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미국의 입장은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외려 새로운 형태로 주한미군의 정치적 상징성과 그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진보의 입장에서는 조미평화협상이 진전되면, 보다 유리한 정치환경에서 통일문제를 처리할 기회가 생기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오래된 문제의 완전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대결로 될 가능성이 있다. 
 
3. 전환기 정세 미국의 대(對)한국전략

미국은 현재 조선(북한)의 전략 핵미사일 군사력에 밀리면서 북미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만약 북미협상이 진전된다면 이후 과정에서 미국은 남쪽에서 어떤 성향의 정부를 파트너로 선호할까? 이 문제 역시 간단치 않다. 남쪽에서 북과 합작이 가능한 6.15공동선언 지지 정부를 선호할까? 예상과는 다르게 조미관계의 순방향 흐름과는 반대로, 미국은 한국에서 반(反)통일 수구성향의 정권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차후 평화협상이 본격화될수록, 거꾸로 미국은 더 노골적으로 반통일 정권과 극우 반통일단체들을 지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은 남북이 통일된 나라가 아니라 분리된 양국체제를 선호한다. 남북연합제 또는 연합연방의 절충형 통일 단계에서 남쪽 정부의 자치성과 독자성을 이용해 기득권을 계속 추구하며 오히려 통일정부를 교란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 중국과 분리된, 홍콩에서와 유사한 시도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친미정치세력을 육성하듯 남측에서도 동일한 시도를 할 수 있다. 남북이 한반도에서 느슨한 연방제를 실현하여도 미국은 반통일 전복시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차후 한반도 전환정세에서 트럼프, 반트럼프 진영에 관계없이 미국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한국의 반통일 수구보수세력으로 정권교체하는데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4. 미국이 보는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의 차이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은 경쟁적 친미정당이며 초록이 동색인 보수정당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 정세 관리의 양대 축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이 거세지면 일시적으로 밀리면서 미국은 군사정권이나 수구보수정권 대신 개혁적 보수정당, 민주당 정권을 지지 활용한다. 정세가 누그러지면 다시 수구보수세력으로 정권을 되돌린다. 한국에서 미국은 단순한 외세가 아니라 내부정치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큰 손이다. 한국정치를 주의 깊게 관찰해온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아는 상식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당은 차이도 있다. 촛불로 등장한 정권의 개혁의지 실종과 무능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는 분명 다르다. 민주화와 개혁세력의 지지를 받고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그러나 개혁정부가 국민을 믿고 동원하지 못하면 한국사회 개혁은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으며 결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역대 개혁정부들은 언제나 개혁 ‘시늉’을 하다가 반대방향으로 갔다. 수구보수세력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동화된 것이다. 

정권은 노무현, 문재인 정부로 교체되었으나 한국사회 전반의 물적, 사상적 기반은 여전히 미·일외세와 수구보수가 쥐고 있다. 경제, 군부, 검찰, 언론, 교육, 사법, 의회 그리고 행정부조차 중심에는 기득권 수구보수의 영향력이 막강하며 항상 새로 등장한 정부를 포위하고 포섭해간다. 정세를 보는 안이함으로 말하면 민주당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이다. 국내 재벌의 저항도 있었겠으나, 민주당은 촛불에 힘입어 권력을 잡고도 본격 개혁에는 손도 못 대는, 적폐청산에 의지가 없는 정권이다. 한국진보와 미국의 문재인 정권에 대한 평가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한국진보는 불만이고 미국은 만족한다. 

흥미로운 점은 민주당이 미국을 맹신하는데 반해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미국이 민주당을 믿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현재 미국의 시선의 초점은 한국 국내정치보다 대북 대응에 쏠려있다. 향후 한반도 차원의 정세관리에 우선 신경 쓰고 있다. 민주당이 차후 한반도 정세 발전 속에서 민족공조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고, 그런 남북통일의 기운이 다시 남쪽 사회에서 근본적인 민주화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면 미리 차단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될 것이다. 미국이 보기에 민주당은 지금보다도 향후 정세에서 믿을 수 없는 이중성과 잠재력을 가진 세력이다. 실제 남북이 합의한 6.15와 10.4선언, 판문점선언, 9.19평양공동선언 모두 남쪽의 주역은 민주당이다. 민주당을 북의 통일 제안과 경제협력 제안을 수용해 민족공조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5. 한국의 색깔혁명 가능성  

21세기 들어 미국이 제3세계 도처에서 반미성향의 정권을 교체하는 새로운 방법이 유명한 ‘색깔혁명’이다. 대중의 정치의식이 높지 않았던 과거 정권교체 방식은 주로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였다. 최근에는 대중을 동원하는 세련된(?)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타국 정권교체 방식이 바뀐 것이다. “대중을 동원해 대중을 제압”하고 혼란을 조성해 전쟁을 일으키거나 정권을 교체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레바논, 리비아, 유고슬라비아, 우크라이나 사례가 대표적이다. 

색깔혁명을 위해서는 극우세력의 의식화와 조직화가 필요하다. 극우적 시위부대나 극우대중단체가 필요하다. 이 단체의 목적은 선거가 아니다. 따라서 대중적 지지도와는 관계없다. 물론 가짜뉴스와 대중이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억지이론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흐름이 한국에서 뉴라이트와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론’이 조직 유포되는 배경일 수 있다. 내용은 극과 극이지만 방식은 과거 진보운동권이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모방한다.  

색깔혁명 조직은 일반적으로 자유한국당과 같은 합법적 정당조직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들의 목표는 합법적 선거를 넘어선다. 한국에서 날이 갈수록 증대하는 태극기 부대와 극우적 단체의 최종목적은 자유한국당 지지나 박근혜 석방 정도가 아닐 수 있다. 친미 극우적 대중시위를 일상화하며 사이비 애국을 명분으로 정권전복을 꾀한다. 해방 후 최대 규모로 광화문에 집결한 수구보수집회는 결코 돈이나 ‘조국사태’로 모인 우연한 현상으로 볼 수만 없는 이유이다. 문재인 정권이 언론적폐와 비민주적폐 청산을 미루는 사이 전환기 정세에 위기의식을 공유한 수구보수세력이 전열을 정비한 셈이다. 

6. 정권교체 전초전, ‘조국사태’의 본질

어느 누구도 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 파문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고 이른바 ‘조국사태’로까지 비화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조국사태의 본질은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조국일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 문제이다. 국회청문회가 부도덕하고 무능한 인사에 대해 거르는 작용도 하고 있지만, 국회청문회가 자격검증이란 원래 기능을 상실하고 여야간 정쟁의 장으로 변질된 지는 이미 오래다. 민주당이나 자유한국당을 막론하고 대한민국의 역대 장관들 가운데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는 자격을 갖춘 이가 과연 얼마였던가? 

조국사태의 첫 단계는 자유한국당이 정략적 차원에서 조국일가의 문제점을 추적, 발굴하는 과정에서 유리한 공격 소재를 찾아 폭로하는 수준이었다. 입시부정의혹(논문저자 기재, 표창장 위조), 사모펀드 의혹, 웅동학원 의혹 등이다. 이것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자유한국당과 수구언론은 확대재생산했고 청년과 진보세력, 국민대중은 드러난 의혹만으로도 조국의 표리부동한 이중성에 실망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개혁적이리라 기대한 ‘금수저’ 장관후보자의 도덕성과 개인 사익추구 몰두에 허탈감을 크게 느꼈다. 조국 후보자에 부정적 여론이 크게 확산되며 국민여론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까지는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두 번째 단계는 ‘조국문제’가 ‘조국사태’로 비화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여론 분위기에 편승한 검찰이 조국사건을 특수부에 배당하고 전면적인 먼지털이 수사로 개입하면서 사실상 대통령의 인사권에 영향을 미치려하던 단계이다. 윤석렬 검찰총장이 대통령 인사권에 반해 조국 장관후보를 거부하려한 정황이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검찰의 정보나 의견제시가 아니라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즉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거부 차원으로 발전해갔다는 점이다. 민주화과정에서 검찰독립을 명분으로 힘을 키운 검찰이 대통령 인사권에 도전할 정도로 비대해지고 무소불위의 권력이 됐다는 것이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이 사실 공허한 말뿐임은 조국이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단행한 개혁조치가 말뿐이라는데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이) 검찰로 하여금 문재인 집권 초기와 조국 민정수석 시기를 경험하면서 청와대와 장관 조국을 우습게본 근거이기도 할 것이다. 조국 장관이 생존을 위해 뒤늦게나마 결기를 보이며 역사적 사명과 검찰개혁을 주창하고 있다. 사실 문 대통령의 조국 임명은 검찰개혁이 목표라기보다는 민주당의 총선, 대선 전략 차원이라고 하겠다. 어쩌면 검찰의 칼과 수구언론 가짜뉴스로 노무현 대통령이 타살된 전철을 피하고 싶다는 피동적 동기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최소한 문 대통령의 후일을 위해서라도 검찰에게서 힘을 빼려 했을 것으로 추론해본다. 

만약 검찰이 대한민국의 정의를 위해 독립성을 지켜오고 공권력의 칼을 불의를 단죄하는데 사용했더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비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의 인사가 정말 큰 문제를 안고 있고 대의명분이 분명하다면 조국 후보에 대한 윤석렬 검찰의 수사를 크게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윤석렬 검찰의 먼지털이 수사의 주요 동기는 정의나 국민적 명분이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결과적으로는 위기에 처한 검찰의 기득권을 수호하고 반민주적 수구연합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인 것이다. 검찰은 국민과 정의의 편이 아니라 갈라진 여론의 틈을 활용해 자기 기득권을 강화하려했고, 결국은 자유한국당-수구보수언론과 한배를 타게 되었다. 

자유한국당과 수구언론이 조국문제를 처음부터 내년 총선전략으로 활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자유한국당 수구연합세력은 총선과 대선을 바라보며 문재인 정권 허물기와 정권탈환에 본격 시동을 건 셈이다. 나라밖에서 한반도 정세가 남북공조와 화해협력으로 발전하는 흐름을 차단하며 인위적 경제위기로 문재인정권 교체를 기도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국내에서는 수구보수연합이 조국사태를 계기로 정권교체를 시도하고 있다. 조국사태로 자유한국당은 지지도를 회복하며 불리한 토착왜구당 프레임을 단숨에 깨고 크게 성공한 셈이다. 이것이 조국문제가 조국사태로 비화된 시기의 국내외 상황이다.  
   
7. 한국진보가 못 담는 대중 진출 현상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진보(좁게는 진보운동권)는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진보이슈로 거대한 국민대중을 조직동원하며 정치적 민주화의 계기를 만드는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민주노총과 다양한 노동운동조직과 진보적 학생, 시민운동 조직 등이 망라되어 선진적으로 정치이슈를 제기하고 일관되게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진보가 대중운동을 ‘유일하게’ 선도하던 시대가 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들이 시작되고 있다. 

촛불항쟁 이후 대중의 정치의식은 높아지는데 진보정당, 사회단체가 이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술혁명시대에 발달한 개인미디어와 SNS 소통과 조직화도 자발적 대중운동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진보적 정치적 성향을 가진 비정형의 느슨한 모임과 정치조직이 자발적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극우조직도 대중조직화를 진행하며 거리에 나서고 있으며, 기존 정당·단체의 활동방식으로는 담을 수 없는 대중운동과 대중정치가 새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고 있다. 새로운 여성운동이 급부상하자 전통적 진보진영이 이를 따라가고 있으며,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의 경우처럼 비정규직 생존권과 계급문제에 대한 대처 역시 일반인들의 반응과 진정성이 대중을 결집하고 더 큰 울림을 주는 현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촛불이후 한국사회 정치의식 고양과 정치참여의 활성화. 기존 정치조직으로 담을 수 없는 새로운 대중정치 운동의 등장으로 이후 대규모 군중시위의 양상이 다양해질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거대한 군중시위의 전개양상이 전통적 공식과는 달라지고 있다. 한반도 전환기 정세 흐름과 더불어 집회를 누가 주도하든 일정한 사건과 계기가 생긴다면 개혁중도적 정치의식을 가진 거대한 군중의 결집이 가능한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8. 서초동 집회의 대중은 우중(愚衆)인가? 

2016년 가을 시작된 1차 박근혜 탄핵촛불은 “이것이 나라냐”는 구호가 함축하듯 초보적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요구였다. 거창한 계급적 요구도 아니며 자주와 통일에 대한 염원도 아니었다. 국민 200만이 광화문에서 함께 시위하며 이른바 소박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정상국가’를 요구했다. 사상최대의 광범한 대중이 참여했으나 그것이 바로 촛불투쟁의 계급적 한계이다. 그럼에도 촛불투쟁은 거대한 역사적 역할을 하였다. 

이번 서초동 집회에 참여한 다수의 사람들도 이전 촛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매우 유사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집회의 주도세력(검찰개혁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범시민연대, 개싸움국민운동본부)이 달랐다. 이를 주도한 세력이 친민주당 성향이고 민주당 지지성향의 사람들이 다수 참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 참가 대중은 매우 다양했다. 만약 거대한 민심의 분노와 참여가 없었다면 서초동 집회의 성사는 불가능했다. 집회를 친정부 구호로 통제하고 제한하려는 경향은 분명 한계이고 문제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언행과 주관단체의 선동이나 조직력만으로 이 집회의 성격을 전부 평가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러한 집회는 계속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 집회의 주된 구호의 하나가 ‘조국수호’인 것은 주관하는 단체의 성향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모인 대중의 요구가 조국수호로만 한정될 이유가 없으며 거기에 머물지도 않을 것이다. 원래 집회시위와 광장은 대중의 것이다. 만약 이 집회가 서초동에 모인 광범위한 대중의 검찰개혁과 사법적폐 청산 요구를 조국수호에만 한정한다면 대중은 스스로 다른 대안을 찾아 분리될 것이다. 국가보안법 체제 아래에서 제대로 된 정치의식을 향유할 기회가 없고 중도 민주당 여론지형이 강한 정치환경 속에서도, 대중은 역사적으로 한계가 있으나 결코 우중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진보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자기 한계를 극복하며 모이고 자기의 갈 길을 스스로 찾아 나서고 있다. 

9. 새로운 유형의 촛불투쟁들 
 
서초동 촛불은 검찰의 조국일가에 대한 과잉수사로 촉발되었으나 크게 보면 검찰, 자유한국당, 수구보수언론, 미국과 아베 정부의 문재인 정권 허물기에 대한 첫 대중적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 이해관계가 가장 큰 친문 민주당 단체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앞장서는 것도 필연적 현상이다. 

한국진보는 개혁의지가 거의 없는, 아니 반개혁적이라고 해도 반박할 처지가 못 되는 문재인 정부에게 실망한 지 이미 오래다. 이제는 문재인 정부에게 적대감마저 느끼고 있다. 이러한 한국진보가 미일외세와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정권교체 시도라 한들, 서초동 집회에 동참하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한국진보가 서초동 집회 역시 여야 보수양당세력의 집권과 당리당략적 선거전으로 보며 거리를 두는 것은 당연한 1차적 반응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같은 사태와 대규모 대중정치투쟁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여러 국내외 정세와 연관되어 다양한 정치투쟁이 계속 진화하며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일시적 현상이나 조국사태에 한정된 특수현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총선과 대선까지 이어지며 단속적으로 분출될 현상의 시작으로 보인다. 조국사태는 중단돼도 군중의 대규모 집회시위는 이슈를 달리하며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태극기부대의 집회도 서초동 대중집회도 결코 일시적이 아니라 반복될 현상으로 보인다. 진보가 외면한다고 끝날 문제도 아니며, 시간이 갈수록 반드시 전략적으로 숙고해야할 진보의 전략적 판단문제로 다가 올 것이다. 이는 ‘대중투쟁과 선거의 결합’이 더 이상 진보의 전유물이 아닌 새로운 정치환경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의미한다.

10. 대중 중심의 구동존이(求同存異)

한국진보 일부는 서초동 집회를 ‘친문동원집회’로만 치부하고 비난하는데 이는 협소한 시각이다. 정확히 말하면 친문단체가 주도한 대중적 촛불집회이다. 여기 참여한 대중의 구호는 현재 ‘조국수호’에 방점을 찍은 ‘검찰개혁’이다. 하지만 대중의 요구는 ‘검찰개혁’, ‘적폐청산‘이다. 민주당과 조국문제에 비판적인 진보세력은 ‘조국수호’에 비판적이다. 오히려 ‘조국퇴진’ 정서에 가깝다.  

자유한국당과 수구언론, 검찰은 ‘조국문제’를 결국 ‘조국사태’로 확대발전시켰고 이는 승패를 보아야 끝나는 싸움이 돼버렸다. 이 싸움이 생각보다 쉽게 끝나지 않는 이유이다. 당면 검찰개혁 역시 쉽게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쟁점으로 발전했다. 서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검찰개혁부터 개혁촉구투쟁이 본격화되었다. 따라서 이와 연관된 후속투쟁은 진보가 피하고 기다리려 해도 피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싸움은 국회로 옮겨갈 것이며 그 끝에 내년 총선이 있다. 
         
진보가 자기의 계급적 진지를 장기적으로 강화하면서도 당면 문제에 대해 ‘대중적 구동존이’의 입장에서 이를 더 높은 민주주의 요구로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친 민주당 대중의 ‘조국수호’ 구호는 그들의 구호로 그대로 두자. 진보의 구동존이 구호는 ‘검찰개혁, 언론개혁, 국회개혁, 사회대개혁 적폐청산’이다. 서초동 집회 현장에서 나타나는 일부 배타성은 집회가 발전할수록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배타적 태도가 장기화하면 그 흐름은 결국 더 높은 대중의 요구와 분리 될 수밖에 없다. 진보는 독자적 입장을 갖고 아래로부터의 전국적, 독자적 ‘검찰개혁, 적폐청산’ 대중투쟁을 추동하고, 서초동 집회와는 문을 닫지말고 연대투쟁으로 열어두고 가는 것이 옳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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