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 빈민스토리(17)

▲ 2003년 11월 29일 서울시 청계천 복원공사와 노점상의 저항[사진 : 필자제공]

1. 청계천 복원사업 시기 노점상은 어떻게 저항했나? 

청계천 변의 노점상이 가장 많이 늘어나는 계절은 추석 전후 가을 초입이다. 한때 서울시 추정 약 3천여 명이 장사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노점상 단체로 조직된 상인은 약 1천여 명이었다. 그러나 이 많은 노점상이 한꺼번에 삶을 위협받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복원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점상과 지역 상인의 생존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라는 소문은 진작부터 흘러나왔다. 그 첫 번째 징조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이미 서울시 전역에 단속이 전개되었고, 2002년 8월 23일 청계천 세운상가 근처에서 공구를 팔던 노점상 박봉규 씨가 분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점상 박봉규 씨는 빼앗긴 마차를 찾으러 중구구청에 갔다가 격분하여 이명박 서울시장 앞으로 보내는 유서를 남겨 둔 채 휘발유를 붓고 몸에 불을 댕겼다. 그는 전신 3도, 80%의 화상을 입고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였지만 2002년 9월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1) 
* 주1) 최인기, <그곳에 사람이 있다.> 나름 출판사, 중구황학동과 을지로 공구상가

마침내 서울시는 2003년 2월 청계천 변 노점상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발표한다. 청계천복원을 둘러싼 서울시와 노점상의 본격적인 대립국면으로 들어가자 2003년 3월 노점상은 ‘청계천 노점상 생존권 사수를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생존권 투쟁을 준비 한다. 2003년 5월 2일에는 노점상 1천여 명이 서울시의 단속행정에 맞서 ‘청계천 노점생존권 사수를 위한 투쟁선포식’을 청계천 9가 4거리에서 진행한다. 노점상들은 시민사회단체와의 토론회 기자회견 및 노점상들의 시청 앞 장사, 지도부 단식농성, 천막농성 등을 실시하는 등 크고 작은 투쟁을 반복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2003년 7월 속전속결로 고가 철거를 시작하며 공사를 전개한다. 2003년 7월 15일 전국의 노점상 5천여 명은 노점상 생존권을 주장하며 청계천에서 총력투쟁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서울시 권종수 건설행정과장은 간담회를 통해 ‘노점단체들이 자율 정비를 약속했다.’ 며 ‘시는 풍물시장을 만들거나 전업을 지원하는 등 노점상의 생존권을 보장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왔다. 

서울시 측은 대책 마련을 위한 실무팀 구성에 합의하고 ‘청계천복원사업에 따른 노점상 대표에 대한 고소·고발의 취하’를 약속하고, 노점상 피해와 관련해 ‘상담 센터’를 설치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하지만 이는 복원사업 첫 삽을 뜨기 위한 일시적인 회유책이었다. 2003년 10월 16일 광교부터 본격적으로 고가철거작업이 척척 진행되었다. 마침내 인도축소작업을 위한 공사에 진입하면서 다시 또 단속이 시작되었고, 노점상은 다시 저항하자. 협상을 통해 기존 5m이었던 청계천 라인의 인도를 3m로 축소하는 대신 조업 주차공간을 이용 노점상 장사를 보호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여전히 노점상은 서울시에 맞서 싸웠지만 한편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복원사업에 대해 무작정 반대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점상은 복원 후에도 7가와 8가 노점상이 밀집해 있는 ‘황학동 벼룩시장’을 지역 특성과 역사성을 살려 보존하고 지원 육성해주는 것이 청계천 복원공사의 취지에 맞는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묵살되었고, 일부 도시학자와 몇몇 언론을 제외하고는 서울시는 노점상을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했다. 많은 서울 시민들도 청계천 복원공사는 시의 중요한 정책으로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사업으로 굳게 인식되었다. 당시 청계천 복원공사와 함께 진행된 뉴타운 사업은 서울시민들에게 개발을 통한 이윤을 확보 할 수 있다는 꿈과 환상을 심겨 주었다. 

2003년 11월 29일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이었다. 당시 노점상 단체 전화가 빗발치게 울려 댔다. 수많은 언론사와 방송국에서 다음날 서울시의 ‘행정대집행’을 예고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질문이 쏟아졌다. 노점상 단체는 비상 운영위 회의를 열고 긴급 동원을 내려 서울 경기지역의 노점상을 청계천 7가와 8가에 오후 10시경 집결시켰다. 노점상 약 1,500여 명은 현재의 청계천 8가 영도교 자리 주변에 모여 모닥불을 피워 놓고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채 공권력에 결사 항쟁으로 맞설 것을 결의하였다. 11월 30일 해가 뜨기 직전의 청계천 건물 사이로 매서운 바람들이 몰아닥쳤다. 밤을 꼬박 지새운 노점상들은 모닥불에 의지한 채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농성하는 사람들 주변을 경찰에서 보낸 감시조들이 마스크를 쓴 채 서성이는 게 눈에 띄었다. 당시 노숙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문헌준 씨에 따르면 서울역과 영등포역 등 전역의 노숙인들이 봉고차에 실려 어디론가 출발했는데 아마도 청계천 행정대집행에 일당을 받고 동원되는 거 같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해가 뜨기 시작하자 서울시에서 고용한 용역반원과 건설사 직원들은 동대문 운동장 근처 6가까지 포크레인으로 도로를 파헤치고  노점상을 7가 쪽으로 몰며 인도에 적치된 노점물건을 실어냈다. 청계천에 대한 서울시의 대대적인 행정대집행이 시행되었다. 당일 오전 7시경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울시 직원 약 1천여 명과 경찰과 용역반원 1만 8천여 명이 청계천 주변을 에워쌌다. 같은 시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다산교 근처 삼호호텔 (지금의 바티카) 호텔 2층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급해진 노점상은 청계천 성동기계공고 앞 다산교 근처에 바리케이드처럼 쌓아 놓은 폐타이어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청계천 일대가 검은 연기로 가득 뒤덮었다. 이날 전투 조에 배치된 노점상은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투쟁을 경험했던 세대다. 이미 학생들의 통일 투쟁과 노동 현장의 연대 투쟁에 참여하며 높은 의식과 투쟁에 참여해봤던 사람들이었다. 황학동 중심의 노점상들은 마스크를 쓰고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채 전투 조로 배치되어 삼삼오오 산발적인 싸움을 전개했다. 바리케이드에서 번진 불길은 1시간여 동안 계속 타올랐다. 아침 방송은 청계천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도했다. 긴급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7가부터 9가까지 불을 꺼 내려갔다. 불이 다 꺼지자 7가 방향에서 철거를 시도하려는 용역반원들에 맞서 대치하던 노점상 70여 명이 돌과 쇠파이프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철거를 앞두고 비어있던 삼일 아파트 위로 올라간 일부 노점상들은 도로 위로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결국, 서울시의 공권력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이날의 투쟁 전후로 총 10여 명의 노점상 간부가 구속되었다. 청계천 복원공사는 도시 빈민 운동사에서 커다란 투쟁으로 기록된다.2)
* 주2) 가난의 시대, 동력출판사, 최인기

2. 노점상 문제의 해결 방안은 무엇이었나? 

청계천 복원사업을 둘러싸고 노점상 대책은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묻거나 궁금해 한다. 다음은 당시 언론에 기고한 글을 재구성해 인용하였다.
“세금을 퍼부어 행정 대집행을 했다고 노점상이 없어지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청계천에 나가봐라. 이들은 다시 보따리를 펴들고 장사를 하고 있다. 결코 노점상은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 빈곤율이 8백만 명을 상회한다는 주장을 들지 않더라도 가난한 사람이 한겨울에 삶을 영위할 방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노점상들은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청계천 노점상을 해결하는 방안은 없는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청계천 7~8가 벼룩시장을 풍물시장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를 해 달라. 이곳 벼룩시장은 서울의 명물로 그 자체가 우리 역사이고 문화다. 이대로 없애기보다는 보존하고 개발해야 한다. 서민의 성실하고 검소한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이곳을 풍물시장으로 육성하면 좋은 서울의 관광명소로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현재 서울시에서는 동대문운동장에 약 9백여 명의 노점상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한 상태이지만 다른 2천여 명의 노점상에 대한 생계 방안은 무대책이다. 동대문운동장 안은 축구를 하기에 적합할지 몰라도 노점상들이 장사하기에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우선 화장실과 상하수도 시설 그리고 전기 시설 등이 노점상에게 맞게 갖추어져 있지 않다. 벼룩시장에서 내다 파는 물건을 사러 이곳까지 시민들이 찾아와 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그동안 서울시와 노점상의 대립과 갈등으로 미뤄 동대문운동장으로 입주한 뒤 또다시 철거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노점상도 많다. 따라서 동대문 운동장에 입주하지 못한 이들이 장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셋째 위와 같은 두 가지 방안 이외에도 영세노점상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지원과 재정적인 생계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공식 부문에서 안정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취업과 지원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몇 가지 사항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노점상생계 대책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동대문운동장에 일방적으로 노점상을 밀어 넣고 눈감아 주겠다는 식의 발상이나 불법인 노점상과 무슨 대화가 필요하냐는 식의 생각을 버리고 서울시는 대화에 즉각 나서야 한다.3) 
*주3) 2003.12.03., 한겨레, <왜냐면> 최인기 기고, 청계천 노점을 서울의 풍물로

당시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03년 12월 서울시와 재협상을 벌인 노점상은 ‘동대문 풍물 벼룩시장’ 에 입주하는 것에 합의한다. 그리고 2004년 1월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는 동대문 축구장의 일부를 ‘동대문 풍물 벼룩시장’으로 개조하여 시장을 개업하였다. 청계천복원공사로 인하여 노점상 2천 명은 뿔뿔이 흩어지고 단체로 조직된 950여명의 노점상만이 동대문운동장 풍물 벼룩시장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다. 청계천에서 오랫동안 신발을 만들어 팔았던 소순관 씨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기억한다.

“청계천복원공사가 성공으로 끝났다고 언론에서 떠들어 대도, 수많은 사람을 삶에 현장에서 쫓아내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장사하던 노점상은 뿔뿔이 떠나고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어디선가 좌판을 펴고 생계를 이어 나갈 것입니다. 결국 서울시 강압에 못 이겨 많은 수의 노점상은 동대문 운동장으로 들어가 장사를 하였지만, 마구잡이로 진행된 철거와 행정대집행은 수많은 의혹과 비리로 점철 됐습니다. 당시 서울시경의 정보과 형사인 김*섭이 깊숙이 개입하여 복원공사가 시작되던 시기부터 동대문 축구장에 집단 이주할 때까지 개입했습니다. 오래전 서울시에서 경기도 광주로 집단 이주시켰듯이 동대문 운동장 풍물 벼룩시장 안에 950여 명 가까운 사람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니 난리가 난 거죠. 이때 서울시경의 정보과 형사를 이용하여 노점상을 분열 시켜 하나로 단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노점상들은 ‘햇빛 가리개’ 가림막을 비롯하여 화장실과 식수를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며 농성을 하고 또 안에서 서울시를 상대로 항의를 하자 그제야 화장실과 식수 공간을 만들어 줬고 오·폐수를 버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풍물시장 지원의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가림막 공사는 서울시 지원이 불투명해지자 서울시경의 정보과 형사 김*섭과 동대문 운동장 풍물 벼룩시장 책임을 맡고 있던 일부 상인이 주도하여 상인 한명당 70만 원씩 약 7억을 걷어 가림막 공사를 마칩니다. 이 비용의 일부는 서울시경의 정보과 형사인 김*섭이 대주고 상인을 상대로 돈놀이를 했으며, 몇 년 후 동대문운동장 풍물벼룩 시장이 폐쇄되고 가림막 철거 후 남는 철근 등 고물 비용 처리를 둘러싸고 또다시 갈등이 발생하자 결국 그는 옷을 벗게 됩니다.”

▲ 2019년 청계천 을지로 3구역 철거현장[사진 : 필자제공]

3. 다시 짚어 보는 삼일 아파트 철거민과 공구상가 상인들 

청계천을 둘러싼 노점상 못지않게 삼일 아파트 철거민과 공구상가 상인들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다. 청계천 복원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일반 상인 대책 문제였다. 고심 끝에 나온 대책이 송파구 문정동 현재의 가든파이브 이전 계획이다. 이 문제도 첫 단추부터 꼬였었다. 2003년 7월 1일 이후 입주한 세입자는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한마디로 대책을 바라고 무임승차하는 것으로 규정했지만 청계천 상인들 가운데 오랫동안 공식적인 계약 없이 상가에 월세를 내면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전이 확정된 상인들도 불황이 계속되면서 상권이 들어설지 장담할 수 없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7가와 8가 황학동 주변에 남아있는 업종은 고물을 수리해서 재활용해 팔거나 중고서적과 비디오 판매 같은 사양업종이었다. 이들 업종은 문정동으로 이전해도 장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다만 이들은 대책으로 마련해 주는 송파구 문정동에 상가입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남는 재산으로 투기 효과나 노려보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겼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삼일고가도로를 따라 청계천 변에 줄을 지어 서 있던 판자촌을 가리기 위해 지어졌다는 삼일 아파트는 복원공사가 진행되기 전부터 철거가 진행 되었다. 종로구 숭인동만 남겨진 채 거의 철거를 당했고 15년 가까이 방치된 채였다. 다음은 2003년 빈민 학생 연대 활동을 나온 학생들과 함께 청계천 삼일아파트 철대위(철거대책위) 임병근 (남 58세) 위원장에게 당시 이곳의 상황을 들어 봤다.

"삼일 아파트엔 몇 집이 이사를 가지 않고 남아있나요?"
"많은 사람들이 수년째 철거에 맞서 농성 중이었다가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약 50여명 정도가 있습니다."
"왜 아직도 이주를 못 하고 있나요?"
"임대주택을 줘도 이들은 입주비 1천5백여만이 없어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민 대부분은 기초생활 보장 대상자입니다. 다시 말해 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몇 년째 주거공간을 지키기 위하여 싸움을 하다 보니 생활은 완전 파탄 지경에 왔습니다."
"지난번 종로구청에서 약속이 있었지 않았나요?"
"오랜 투쟁을 통해서 가수용 단지를 받는 것으로 약속을 얻어 냈습니다. 하지만 보다시피 전기도 수도도 모두 끊어버리고, 주민들을 고립시킨 채 계속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올 초는 장애인과 노숙인까지 동원하여 철거를 강행했습니다. 한마디로 없는 사람들끼리 싸움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파렴치한 작태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청과 롯데건설에서는 2003년 7월 18일 이후 강제로 행정 집행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이날의 인터뷰는 빈민학생 연대활동에 참여한 학생들과 함께 이루어졌다. 청계천 철거민들은 수고한다며 간단한 음료를 대접하고 어깨를 다독여 줬다. 학생들의 온몸에서는 단내가 폴폴 났다. 장맛비를 맞아서만은 아녔다. 청계천을 알고자 하는 열정으로 발산되는 열기 때문이었으리라. 연대를 호소하는 세대위(세입자대책위) 위원장의 간절한 눈길을 뒤로 삼일 아파트를 빠져나왔던 기억이 난다.

‘10월이면 청계천이 새롭게 열립니다.’ 2005년 9월 서울시에서 내건 플래카드가 거리 곳곳에 걸린 채 부푼 몸을 날리며 펄럭였다. 청계천 복원사업 2년 만에 약 6km의 구간이 복원되었다. 이정도 공사라면 보통 외국에선 10년을 걸려 완공을 한다는 사업을 2년 만에 공정률 98%를 보였다. 언론은 이명박 서울시장의 치적을 알리는 기사를 앞 다투어 보도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처음에는 개발을 반대하고 극렬하게 투쟁하시던 분들이 지금은 서울시의 절대 지지자가 됐습니다. 상인들과 우리는 얼마 전까지 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서울시가 이렇게까지 우리를 배려해 줄줄은 몰랐다며 감동했다"라고 했다. 그 후 서울 전역에 환경과 문화, 역사 복원이라는 포장을 쓰고 특히 강북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뉴타운 사업이 곳곳을 휩쓸었다. 청계천 복원사업이 이명박 서울 시장의 정치적 야욕과 비리로 점철된 사업이라는 주장을 뒤받침 하듯 그의 측근 양윤재 부시장은 청계천 비리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박 서울시장은 대선에서 그의 꿈을 이루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자본의 속성이란 도시공간을 배회하다가 이윤을 낳는 곳이라면 어디든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민관합작의 거대한 개발 프로젝트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4. 2019년 청계천은 안녕 하신가?  

지난한 세월의 아픔과 슬픔을 아련히 간직한 채 다시 1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청계천 7가와 8가 사이에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노점상이 주변 이면도로에 수백 명이 산개해 장사하고 있다. 동묘 근처를 중심으로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몇 배 더 늘어난다. 대신 동대문 운동장을 허물고 신설동 근처로 터전을 옮긴 ‘풍물 벼룩시장’은 2004년 개방 초기 주말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는 듯했지만 현재 평일에는 개시도 못 하는 실정이다. 벼룩시장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2019년 6월 29일 이날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꿀잠’에서 기획한 ‘청계천 답사’ 프로그램이 있었다. 여러 수녀님과 청계천 황학동벼룩시장, 노점상 투쟁 현장,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 현장 그리고 세운상가와 요즘 개발과 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을지로 공구상가를 지나 전태일 기념관까지 3km가 넘는 거리를 함께 걷는 시간이었다. 청계천 황학동에 가보면 지금도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처럼 텔레비전과 냉장고들이 층층이 쌓여있는 가게를 쉽게 볼 수 있다. 오전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내리쬐자 답사팀은 공구상가 골목에 들어섰다. 스패너, 망치, 그리고 드릴 같은 것들이 천장 높이 촘촘히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 건들면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태위태한 모습이지만 끄떡없이 버티고 있다. 공구상인들 방식의 경험과 지혜로 빼곡히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은 망치 하나, 못 하나, 아무렇게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질서 있게 제자리에 놓여 있다. 눈을 감고 손만 뻗으면 쥘 수 있는 적재적소에 공구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 사이사이를 상인들은 공구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어 한낮의 달콤한 잠에 취했으리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문도 봤을 것이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한 끼의 식사도 마쳤을 것이다. 어두워질 무렵이면 물건들을 살아온 만큼이나 견고한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고 하루의 노동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붙잡고 막걸리 한 사발로 시름을 달랠 것이다. 

답사팀이 공사가 진행 중인 청계천 3구역에 다다르자 얼마 전에 갔던 길도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커다란 담장이 위압적으로 가로막혀 그 길이 이 길인가 도통 헷갈린다. 빈 상가와 공장 안에는 철 지난 달력과 찢긴 신문들, 연체료 고지서, 버리고 간 옷과 신발, 장부 몇 권이 주인을 잃은 채 나 뒹굴고 있다. 곰팡이가 검게 피어오른 벽에 위태롭게 걸려있는 가족사진은 집안의 내력을 엿보게 한다. 멈춰버린 벽시계가 2시 즈음을 알리고 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자 상인들은 이내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한다. 어둡고 적막한 골목의 일상을 깨뜨리고 시끌벅적 상인들의 환대가 뜨겁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꼿꼿이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미 지나 버린 것, 낡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 고집스러운 사람들로 치부한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것이 넘쳐나는 ‘속도의 시대’에 한곳에서 수십 년 동안 서로 유기적으로 촘촘히 엮인 그물망처럼 생계터전과 산업생태계를 닦아 왔던 사람들이다. 한 가지 기술과 일을 10년 이상 배우고 지켜오면 먹고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제 오랜 공구상가를 둘러싸고 ‘없는 것이 없다’고 치켜세워 지거나 한때는 한국 경제를 일구는데 산파 역할을 했던 곳이라 일컬어진다. 분명한 것은 청계천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은 장인의 손을 거쳐 상인에게 팔리고, 또 노점상까지 버리는 물건 없이 재생되고 소비로 이어져 튼실한 상권을 유기적으로 일구어 왔다. 그런데 지금 이곳이 또 개발로 흔들리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돈을 낳는 곳이라지만, 누군가에게는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청계천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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