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인가 학살인가 : 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6) - 1950년 7월 5일 음성 감우재

충주 신니면 문락리 동락마을의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 전투에 이어 음성읍 소여리 유현고개를 지나던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 소속의 1개 소대가 1950년 7월 5일 아침 8시 고개를 넘는 “자동차를 탄 군인과 수명의 사복한 사람”과 그 뒤로 따르는 1개 중대 규모의 병력을 공격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240쪽) 거의 같은 시기에 전투가 벌어진 두 지역은 직선거리로 약 7km 떨어져 있었다.
국군이 이들을 인민군으로 판단한 이유는 단지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행 중 일부가 민간인이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공격할 때에는 결국 “그들과 같이 행동하고 있는 사복차림의 사람을 제외시킬 수도 없었다.”고 했다. 
감우재를 넘던 한 무리의 집단이 인민군이라는 증거도 없이, 일행 중 민간인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공격을 가했음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 이 주장은 사후 합리화에 다름 아니었다. 

그림 ) 『한국전쟁사』 2권 240쪽. 국군이 공격한 이 무리에는 민간인이 앞장서고 있었다고 했다.
그림 ) 감우재 전승기념관과 각종 기념물들이 모여 하나의 공원을 이루고 있다. 전쟁을 미화하는 이 공원의 이름은 “무극 전적 국민관광지”이다. 음성읍 소여리에 있다. 2019년 3월 8일 조사.

배낭 메고 모자 쓴 150여 명을 공격하다

7월 4일 밤과 5일 새벽에 있었던 국군 7연대 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의 1차 동락마을 전투 소식을 들은 국군 6사단 7연대장 임부택은 7월 5일 새벽 6시 1대대(대대장 김용배 소령)에게 음성 금왕읍 무극리에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인민군의 남하 속도를 지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으면서도 “남하를 저지”하라 했다고 서술한 것은 연대 전체에게 내린 비상경계 명령을 지나치게 표현한 것이었다. 당시 2대대는 충주 동락마을 전투를 치른 뒤 진천으로 이동하다 증평에서 되돌아와서 1대대를 엄호하고 있었다. 
1대대가 명령에 따라 주둔지를 떠나 무극리로 향하던 중이었다. 정찰부대 3중대 3소대(소대장 이상우 중위)는 아침 8시 음성군 읍성읍 소여리를 지나 유현고개에 접어들면서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서 이제 막 고개를 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는 공격이 가능한 언덕으로 병사들을 급하게 배치하여 일행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무리의 선두는 자전거를 탄 군인과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었고 그 뒤로 1개 중대규모인 150여 명의 군중이 따르고 있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한국전쟁사』는 이들을 마치 군인인 것처럼 “병력”이라고 서술했지만 발견 당시 “가물거리는 안개 속”이라 이들이 군인들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고 무리 중에는 분명히 민간인이 섞여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를 두고 『한국전쟁사』는 “고개를 넘는 일단의 무리가 안개 속에서 가물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중략)… 그들 선두에는 자동차를 탄 군인과 수명의 사복한 사람이 앞장서고, 1개 중대 규모로 보이는 병력이 행군대형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라고 하면서 “가물거리고 있는” 한 무리에 대해 사복을 입었음에도 마치 인민군 1개 중대의 대형처럼 묘사했다.
소대장은 “사복을 입은 사람들”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아군인지 몰라서였는지 “아군일지도 모르니 자세히 살피라”고 했고 부대원들은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이 틀림없다”고 했다고 한다. 아군만 아니면 총을 쏘아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또, 육군 본부가 국군은 배낭을 메지 말라, 또는 모자를 쓰지 말라는 지침이라도 내렸던 것일까?
『한국전쟁사』는 국군과 무리의 거리가 100m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무리의 정체가 확인될 때까지 기다리면 됐을 일을 미리 인민군으로 낙인찍었던 것은 처음부터 민간인 공격을 합리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든다. 
정체가 확인되었을 때에도 국군은 무리 중에 민간인이 함께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소대장은 “사복차림의 사람들을 제외시킬 수 없었”으므로 사격을 명령했다. 
전투 결과는 민간인들의 희생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후 전투 상황에 대해 위 책은 “기습을 당한 적은 앞을 다투어 퇴각하려 하였으나 제3중대(장, 김명익 대위)가 발사한 60mm 박격포탄이 그들을 더욱 당황하게 하였다. 이윽고 중대장이 달려 나오고 동 중대가 가세하였을 때에는 적은 40여구의 시체와 자전차 2대를 버리고 궤산(潰散)한 뒤였다.”라고 했다. 이 전투에서도 무리로부터 반격은 없었으며 현장에 남아 있던 것은 무기도 없는 시체들과 두 대의 자전거뿐이었다.

국군 1사단만 기억하는 감우재전승기념관

이 전투를 기억하기 위해 감우재전승기념관이 음성읍 생음대로 594에 2003년 11월 개관했다. 음성지구 전투가 국군이 인민군과 싸워 이긴 첫 전승지라고 안내되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전승자에서 국군 6사단은 빠지고 국군 1사단의 전투만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림 ) 감우재전승기념관 2층 전시실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이다. 전투를 치른 국군의 소속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2019년 3월 8일 조사
그림 ) 공원 가운데 있는 안내판. 국군 6사단의 전투는 빠지고 국군 1사단의 전투만을 소개하고 있다. 2019년 3월 8일 조사

감우재전승기념관 2층 전시관에는 음성지구 전투의 의의라며 “6‧25전쟁 중 최초의 대승전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제공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지대한 공여를 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이들은 국군이 모두 철수한 것으로 알았는지 기름고개에서 음성 쪽으로 2열 종대 대형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연대는 적의 행군대열의 절반이 방어정면으로 들어섰을 때 105mm 곡사포의 지원사격 하에 각종 화기를 집중함으로써 적의 남진을 분산시켰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 제49연대는 100여 명의 손실을 입고 많은 장비를 상실하였다.”라고 설명했다. 49연대는 인민군 15사단 소속이었다.
‘100여 명’의 인민군을 손실시켰다거나 ‘2열 종대 대형’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는 위 7월 5일에 있었던 전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국군 1사단이 아니라 국군 6사단의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기념관 마당에 있는 안내판은 전혀 다른 내용이 감우재 전투로 소개되어 있다.

여기 감우재 전투지 안내판에는 “1950년 7월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곳이다.”로 시작되는데 구체적인 날짜는 물론 국군 6사단의 전투 사실조차 소개하지 않고 있다. 단지 “국군 제6사단으로부터 음성방어선을 인수한 제1사단은 전열을 정비하고, 7월 8일 음성 서북쪽 감우재에 제11연대를 배치했다. …(중략)… 감우재에서 적 1개 중대를 섬멸하고, 뒤이어 공격해 오는 적 2개 중대도 물리쳤다.”라면서 국군 1사단의 승전 소식만을 기록하고 있다. 전투의 규모가 중대 단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점은 그나마 과장하지 않고 솔직해 보인다.

그늘에 가린 국군 6사단의 전투 기록

『한국전쟁사』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과 가장 가까운 기념물은 정작 그 뒤쪽 그늘에 숨겨져 있었다. 여기에는 “38선에서 북한 괴뢰군의 불법 남침을 받고 지연전을 하면서 후퇴한 아군 6사단 7연대가 이곳에 도착하니 때는 서기 1950년 7월 4일 아침이었다. 7연대는 장호원에서 남하하는 적 15사단의 침공을 저지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7월 5일 무극리에서 음성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 15사단 49연대의 정찰 소대를 소여리 부근에서 7연대 1대대가 포위 전멸시켰다. 8일 서부에서 전진하여 온 아군 1사단 11연대 2대대가 18시경 기름고개에서 적 49연대 1개 중대를 포착 섬멸하였고 19시경 또 다시 2개 중대의 적병을 무찔렀다. 9일 9시경 적 대대병력이 도로를 타고 남하하는 것을 이곳에서 격퇴하였다. 전후 4차의 전투에서 적병 6백여 명을 사살하였고 아군은 18명의 고귀한 희생을 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승탑의 기록에 따르면 감우재에서 모두 네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국군 6사단이 7월 5일 한 차례, 국군 1사단이 8일과 9일 사이 모두 세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는 것으로 모두 6백여 명의 인민군 15사단 49연대를 사살했다. 이 정도 피해라면 1개 연대를 전멸시켰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더 놀라운 것은 국군의 피해가 18명에 그쳤다는 점이다. 우리는 앞의 동락마을 전투에서 국군 1명의 부상만으로 인민군 15사단 48연대 1,100명이 사살당해 전멸당했다는 주장을 살펴보았다. 믿기지 않는 “신의 전투”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후 살펴볼 예정인데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인민군 15사단 48연대와 49연대는 7월 20일 전후 벌어질 상주 화령장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전멸당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아 오직 국군에게 승리의 기록만을 남기는 역할을 했다니 이를 믿어야 하는가? 
이 전투들에 대해 이북의 전사 기록은 아직까지 자세히 확인되지 않는다. 국군은 이 전투 후 음성에서 후퇴했고 이북의 역사학자 허종호는 7월 10일 음성을 해방했다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허종호,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 제1권, 203쪽) 

그림 ) 감우재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67년 4월 건립된 “전승탑”. 이후 제작된 다른 기념물들과 달리 7월 5일 전투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건립자는 음성군수였다. 2019년 3월 8일 조사

전투와 민간인 학살

국군 6사단은 다음날인 7월 9일 충주에서 후퇴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민간인 학살의 관점에서 보면 국군 6사단 7연대는 7월 5일부터 8일까지 충주 호암동 싸리재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부대였다.
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7월 5일부터 음성 지역의 주민들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되기 시작했다. 당시 후퇴하던 6사단 9연대 소속 중령 1명이 음성경찰서로 들어와 군내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음성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된 주민들의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으나 대소지서 등 각 지서에서 저질러진 사건들이 확인되었다. 대소지서에서 소집한 보도연맹원 30여 명은 7월 5일 진천군 만승면 조리방죽에서, 원남지서에 소집된 보도연맹원 30여 명은 7월 8일 원남면 문암리 백마령 고개에서 집단희생당했으며, 이외에 소이면 주민 여 씨가 음성군 소이면 ‘가막골’에서 희생되었다.
 
민간인이 포함된 40여 구

앞에서 7연대장은 7월 4일 동락마을 전투 소식을 들었다고 하므로 7월 5일 음성 감우재에서 치러졌다는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의 전투는 전날인 7월 4일 동락리에서 있었던 2대대 전투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인민군이 아직 국군 주둔지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2대대의 7월 4일 동락리 전투가 인민군이 아니라 피란민을 상대로 벌인 공격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감우재 전투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국군의 전투 기록에 과장이 있을 수 있다고 지나치더라도 음성 감우재에서 첫 전투가 있었던 7월 5일에 기습당한 “40여 구의 시체와 2대의 자전거”가 과연 인민군의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기습을 당한 인민군들은 대응 사격 등 저항이 없었다. 소대장은 이들의 무장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으며 “배낭을 멨다”거나 “모자를 썼다”는 것으로 인민군으로 판단했다. 『한국전쟁사』 역시 이들의 무장여부에 대해 전혀 서술하지 않았다. 전투 지역에서 노획한 물건 역시 자전거 2대로 그쳤다고 하니 이들이 갖고 있던 전투 무기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배낭과 모자, 자전거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주장은 상식적이지 않음에도 『한국전쟁사』에 종종 등장하는 주장이다.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역시 자전거를 탔다는 사람들뿐이었다. 사망자들 중에 민간인이 있었을 것은 명백하며 이들이 피란민이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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