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 해부> 조희승 저, 이덕일 주해, 2019. 도서출판 말

2019년 들어 일제 전범자들의 후예로 구성된 아베 정부가 보여주는 한민족에 대한 멸시와 적대감의 뿌리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 왜곡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만큼이나 일본 현대사 역시 미군정의 세계패권전략에 의해 일제 군국주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아베 정부에게 동조하는 국내 세력이다. 일제에게 부역했던 국내 친일세력이 기득권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

일제가 한반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국내에 깊숙하게 남아 있던 친일파의 잔재 중에는 학계도 포함된다. 특히 국내 역사학계의 주류, 즉 강단사학계 내부에는 일제 식민사관의 뿌리가 깊게 도사리고 있다. 
국내 강단사학자들이 일본 극우세력과 함께 고집하는 식민주의 역사관과 역사 왜곡 중 "임나일본부설"이 있다.(주해자는 간혹 강단사학자들이 “일본이 식민사관을 버리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임나 = 가야”라고 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교묘하게 지지한다고 증언한다.)

“임나일본부설”은 한 마디로 일본의 야마또 정권이 4세기 중말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이나 한반도의 가야 연합체 지역에 조선총독부와 비슷한 정치적 성격과 권능을 가진 기관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식민지 지배를 하였다는 주장이다.
국내 주류사학계, 즉 강단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학술적으로 명확하게 비판하는 논문은 없다고 한다. 대부분 교묘하게 일본 사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임나일본부설”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쪽은 오히려 비주류사학계, 즉 재야사학계가 대다수다. <일나일본부 해부>의 주해자인 이덕일 역사학자 역시 재야사학자라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 해부>에서 저자 조희승의 논리는 ‘임나’는 가야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 세운 소국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임나사는 가야의 일본 열도 진출사다. 
조희승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남부조선지배론)"이 조선침략 구실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군 참모본부가 주도하여 만든 사이비 학설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일본과 한국의 강단사학자의 주장과는 달리,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가 일본 땅에 세운 소국”이라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정체를 해부하기 위해 조희승이 처음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1장 ‘가야사’이다. 그는 ‘가야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초기 조일관계 역사를 알려주고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사이비학설이 기대고 있는 자료근거와 허위성을 밝혀낸다.
조희승은 600년 역사를 가진 6가야에 대해 많은 고서와 자료를 근거로 가야사를 풀어낸다. 그가 인용한 자료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는 물론 일본 주류사학계와 국내 강단사하계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까지 광범위하다.

필자는 이 책 <임나일본부 해부>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역사에서 ‘가야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그리고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야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가야사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주는 선생이나 국내 사학자들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가야연합체로 구성된 ‘가야’는 짧게는 500년, 길게는 600년의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역사속 실체이자 조상인 것을 이제서야 머리와 가슴 속에 담게 되었다.

조희승은 ‘가야국’을 “1세기 중엽으로부터 6세기 중엽경까지 락동강 하류류역 일대에 존재하였던 봉건국가”로 정의한다. 문헌에는 가야국을 가라국, 가락국(아야, 아라)이라고도 하였다. 
“조선반도 중남부에서는 B.C. 12세기 이전부터 노예소유자국가인 진국이 존재하였다. 진국의 한 구성부분이였던 변한의 소국 구야-가야국과 아야(안야)국을 모체로 B.C. 1세기경에 봉건소국들이 형성되였다. … B.C 1세기 경에 이미 가야소국이 있었다는 것은 창원시 의창 다호리 1호무덤을 비롯하여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서도 잘 알 수 있다.”(12~13쪽)

“한창 강성을 떨칠 때의 가야는 넓은 령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야령역은 때에 따라 달랐으며 옛 문헌의 류실로 하여 가야령역은 명백하지 못하였다. 이것을 기회로 일제의 어중이떠중이의 사이비학자들이 달라붙어 가야의 령역을 혹심하게 외곡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야의 령역을 력사적 사실에 맞게 정확히 해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야는 진국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변한지역 태내에서 형성된 나라였던 것만큼 기본적으로 변한땅을 계승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봉건국가를 형성할 때는 옛 변한의 소국 가운데는 련합체에 속하지 않고 떨어져나간 소국들도 있었다. 그러니 가야의 땅은 변한땅 그대로가 아니다. 또한 시기에 따라 그 판도가 달랐다.”(19쪽)

“신라는 진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탄하는 한편 락동강 우안지역의 가라땅을 잠식해나갔다. 가야는 련합체를 이룬 가야소국들이 신라에 병탄되는데 따라 판도가 줄어들었는데 주로는 락동강 우안지역의 피해가 제일 심하였다.
가야의 판도는 5세기 초를 계기로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4세기말~5세기 초 광개토왕릉비에 반영된 조선반도를 휩쓴 대전쟁에 가야가말려들어가면서 크게 패한 사정과 관계된다. 가야는 이 전쟁을 계기로 락동강 중하류 우안에 대한 지배권을 점차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20쪽)

조희승에 의하면, 대가야 멸망으로 삼국시기의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존재한 6가야가 종말을 고하였다. 그 존속기간은 소국시기부터 계산하면 약 600년간이며 련합체 형성 이후부터는 약 500년 동안이었다.

조희승은 ‘가야사’ 600년을 밝힌 데 이어 제2장에서 “<임나일본부>설의 조작과 실재 여부”를 이야기한다.
그는 먼저 ‘임나 = 가야설’의 진원지가 메이지 시대 일본군 참모본부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1882년  《임나고고((任那稿考)》 및 《임나명고(任那名稿)》를 간행했다. 군부에서 임나에 관한 역사서를 간행한 이유는 물론 한국 점령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희승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군사작전을 토의하는 륙군참모본부가 력사학설을 창시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괴이한, 현대 지성인의 귀를 의심케 하는 일이 19세기 말년에 일본에서 벌어졌다. 력사연구는 나라와 민족의 력사를 탐구하는 진지한 과학일진대 100년이 넘는 일본 편사학은 순수한 과학의 일로를 걸오온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침략, 대륙침략을 위한 군국주의적 침략목적에 철두철미 복무한 어용과학이었다.”(49쪽)

육군참모본부(일본군 참모본부)가 창시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조희승은 "현대 지성인의 귀를 의심케 하는 일이 19세기 말년에 일본에서 벌어졌다."고 말했다. 해제자 이덕일의 눈에는 "현대 지성인의 귀를 의심케 하는 일이 21세기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다."로 읽힌다. 조희승은 역사연구를 "나라와 민족의 력사를 탐구하는 진지한 과학"이라고 말했는데, 일부 남한 강단사학자들에게는 "나라와 민족의 력사를 깎아내리고 말살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후 일본군 참모본부가 창설한 임나일본부 학설에 나가 미치요(那珂通世:1851~1908) 같은 정한론자들이 가세했다. 나가 미치요는 도쿄제대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던 《사학잡지(부)>(1896)에 <가라고(加羅考)>를 실어서 '가라(가야)가 임나’라고 주장했다. 가야가 고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일제의 한국 점령은 침략이 아니라 고대사의 복원이라는 주장이었다. 

주해자 이덕일은 “임나설의 배경이 이런데도 일본의 학자가 아닌 일본과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기를 쓰고 '임나=가야설'을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통탄해 마지 않는다.

조희승에 의하면 일본군과 조선총독부는 1916년부터 일본 군인과 학자들로 구성된 <고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패망 직전까지 한반도 구석구석의 고분과 유물을 파헤치고 훔치고 파괴하였다. ‘임나 = 가야설’을 입증할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실례로 야쯔이는 1918년 겨울부터 1919년에 걸쳐 불과 몇 달 사이에 경상남도 창년무덤떼에서만도 혼자서 100기 이상이나 파헤쳤다.”(105쪽)

하지만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전역에서 고분과 유적을 구석구석 파헤쳤지만 그 누구도 한 편의 발굴조사 보고서조차 쓰지 않았다. 

“그것은 창녕 교동 등지의 유적 유물들이 자칫 잘못하면 야마또 정권의 <임나일본부>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일본렬도 내 조선소국 <분국>의 존재가 증명되는 ‘재미없는 것’으로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109쪽)

즉 일본총독부와 일본인 학자들은 한반도 전역의 고분과 유적에서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가야연합체가 존재했던 한반도 남단에서 아무런 고고학적 유적이나 유물 그리고 기록도 없다는 것이다.


이어 제3장 “<임나일본부>설의 파탄”에서 조희승은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나오는 ‘왜’가 야마또 정권의 군사력인지 여부, 그리고 당시 일본렬도의 사회경제적 단계와 고분 등 일본내 유적을 분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을 파탄시킨다.

“《임나일본부》설이 성립되자면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기내 야마또정권의 군사력이라는 것이 밝혀져야 한다. 왜냐하면 《임나설》의 기본 바탕, 기본 론거에는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기내 야마또정권의 군사력이라는 대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 론거가 허물어지는 경우 《임나설》도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거꾸로 말해서 이와 같은 대전제가 성립되자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들이 밝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134쪽)

그가 제기하는 문제점은 첫째, 4세기 말에는 기내 야마또정권이 서부일본을 통일해있어야 한다는 것과 둘째, 백제칠지도가 백제의 공납품이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셋째, 에다 후나야마고분 출토 칼을 야마또정권이 하사하였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하고 넷째,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야마또정권의 왜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조희승은  1945년 8.15 이후 일본사학계에서는 그 전날처럼 《임나설》을 입증하는 데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따위의 론거는 들고 다니지 않게 되였고, 그 대신 그들은 여러 가지 이른바 “설득력 있는” 금석문자료 및 고고학적 자료 등을 들고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금석문들과 고고학적 자료들은 야마또 정권의 조선 진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본에로의 조선이주민 진출의 역사를 말해주는 유력한 자료적 근거가 됨을 입증해 낸다. 

예를 들어 다이센, 곤다야마 고분의 축조 시기가 5세기 말~6세기 초라는 것을 일본 내 자료와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야마또 정권이 4세기 말부터 한반도 남단을 식민지 지배하려면 야마또 정권이 그 당시에 서부일본을 통합했어야 했지만, 일본 사학계가 그 근거로 주장하는 고분의 축조시기로 인해 불가능한 주장일 뿐인 것이다. 또한 야마또 지방에 마구류가 보급된 것은 5세기 중엽 경으로부터 6세기 초엽으로서 광개토왕릉비문의 시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일본서기>와 광개토왕릉비문에 등장하는 ‘왜’의 정체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어 크지 않은 바다를 건너면 쉽게 오갈 수 있는 북규슈의 북단 이또지마 반도에 있던 가야계통 왜소국이었고, 여기에는 가야계통의 지명과 유적 유물, 조선식 산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4세기말~5세기 초 광개토왕릉비문에 반영된 대전쟁시기의 마구류를 비롯한 선진 공농구들이 묻혀있다는 것을 들어 <일나일본부>설을 격파한 것이다.

마지막 제4장 “<임나일본부>는 기비 지방에”에서 조희승은 <임나일본부>는 기비 지방에 있으며, 기비 지방에 존재한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 소국들의 위치들에 대해 비정한다.
그러면서 야마또 정권에서 말하는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 일본 주류사학계와 국내 식민사학, 강단사학자들에게 친절하게 논증하여 밝혀준다.


“<일본서기>에서 주장하는 웅략기요, 흠명기요 하는 조작된 《천황》의 시대인  5~6세기에 기비라는 지방국명은 없었다. 하지만 8세기 《일본서기》 편찬 당시에는 ‘기비’라는 지방국명은 있었으며 그 시점에서 본 임나관계 기사의 내용은 조선에서 있었던 사실을 적은 것이 아니라 서부 일본 기비지방에 ‘임나(미마나-가야)’, ‘시라기(신라)’를 비롯한 조선 소국들과 기내 야마또정권 사이에 있었던 사실들을 서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기비노오미(기비의 장관)가 기비 지방에서 《임나일본부》를 하였다는 것-이것이 《일본서기》 임나관계기사의 실체였다. 다시 말하여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가야(임나)국에 설치된 일본부(야마또노미꼬또모찌)라는 뜻인데 일본(야마또)이란 말과 부(府-미꼬또모찌)라는 말은 그 당시(5-6세기)에는 없었다. 그것들은 8세기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개념이였다.

 

서부일본을 통합하는 과정에 야마또 정권은 자기의 대리인을 기비 지방에 있던 가야(임나)에 보냈던 것이다. 그것도 그곳 실정을 잘 아는 기비지방 토호 출신 인물들을 《임나국사》 혹은 《임나일본부》로 임명 파견한 것이다.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기비지방 임나가라에 설치된 야냐마또 정권의 전권대표격인 행정적 출장기관 또는 그 기관을 책임진 관리였다. 이것이 기내 야마또 정권이 파견한 《임나일본부》의 실체이고 정체였다.”(265쪽)

조희승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북한으로 건너가 한일고대사 연구에 매진한 북한 역사학자다. 임나는 가야계가 일본 열도에 건설한 소국, 분국이라는 김석형의 분국설을 계승한 학자다. 1988년 《초기조일관계사(상)》에서 지금의 오까야마(岡山) 기비(吉備) 지역에 가야의 분국인 임나가 있었다고 논증했다. 

《임나일본부 해부》는 분국설을 일반 독자들에게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2012년 간행한 책이다.
조희승에 의하면, 북한은 일제가 패망한 직후인 1947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며 조작했던 <임나일본부>설과 <한4군 한반도설> 등을 격파하기 위해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사회주의 계열 사학자들이 함께 연구에 매진하여 괄목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한국은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과 일제의 대학, 연구소에서 친일행위를 하던 학자놈들이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하에 한국 사학계를 장악한 이후 현재까지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 강단사학계의 식민사관 의존성은 조희승 등 북한 사학계의 논문과 이론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면서 일본 사학계의 주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화는 현실이 웅변해준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유독 국내 강단사학계에서는 진보나 보수의 경계가 없이 친일사학자들의 계보와 인맥이 이어지면서 “친일 사학 적폐 집단”으로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추종자들과 뉴라이트 집단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 조희승이 <임나일본부 해부>를 출간한 이유는 서문에 담겨 있다. 독자들이 북한 역사학자인 조희승이 어떤 태도와 관점에서 임나일본부를 해부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 역사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국내 기득권 강단사학자들이 두 눈 똑바로 뜨고 깨달아야 할 한민족 구성원의 목소리다.

“일제가 패망한 지도 근 70년을 가까이 한다. 과거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특대형 반인륜범죄는 력사에 전무후무한 것으로서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원한의 응어리로 남아있다. 그런데 일제가 외곡 조작하여 조선침략과 조선민족말살의 리론적 근거로 악용하였던 《임나일본부》설은 그 허황성, 비과학성이 낱낱이 까밝혀 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일본사회에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각급 력사교과서들에서는 계속 종전대로의 반동적 《임나설》을 고집하고 있으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과거 《임나일본부》설이 왜 나오게 되였는지 또 그 위험한 독소가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이러한 실정은 필자[조희승]로 하여금 통칭 《임나설》이라고 부르는 이 사이비학설이 어떠한 사회력사적 배경하에서 나오게 되였고 그것이 디디고 선 《학술적 근거》란 것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가에 대하여, 기비 가야국의 실체에 대하여 력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알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글이 있어야 한다는 마음속 충동을 느끼고 이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그런데 《임나일본부》설의 제창자들은 자기의 자주적인 국권을 가지고 오래 동안 존재한 가야국에 기내 야마또정권이 4세기 중말엽경으로부터 6세기 중엽 사이의 200년간이나 《미야께》를 설치하고 식민지 지배하였던 것으로, 이 《미야께》는 후세의 조선총독부와 근사한 정치적 성격과 권능을 가졌던 것으로 외곡 날조하였던 것이다.”(42쪽)

“《임나일본부》에 관한 문헌적 근거는 바로 이 《일본서기》가 유일무이한 것이다. 조선의 세 나라에 대하여 쓴 력사책들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또 당시의 금석문들에도 미야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없는 사실을 조작한 여기에 근대일본의 죄행이 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불리우는 불철저한 부르죠아 혁명과 더불어 조선침략의 길에 나선 일본은 조선과 대륙침략의 구실로서 력사학을 택하였다. 그들은 조선침략구실의 리론적 근거로서 《일본서기》의 기사를 과대확장하여 그럴듯한 학설을 만들 것을 착안하였다. 이렇게 창출된 것이《임나일본부》설이였다. ”(48~49쪽)

“《동조동근》론은 장차 《내선일체》론으로 번져지게 될 사상적, 리론적 기초가 된 사이비학설이였다. 《동조동근》론에 《임나일본부》설이 깔려있다는 것은 물론이다. 20세기 초 일제에 의한 조선강점이 현실화된 시점을 전후하여 《동조동근》론이 미친 듯이 선전되였다. 광기어린 《동조동근》론의 앞장에 선 것이 바로 일본의 어용사가들이였다.”(55쪽)

“그렇다면 발굴의 결과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였던가? 《임나일본부》의 칡뿌리 만한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었는가? 대답은 간단하였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 땅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와서 조사에 떨쳐나섰던 고고학자, 력사가들은 당황하였다. 조사를 하느라 막대한 국록을 탕진해놓고도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찾지 못했으니 말이다.“(110쪽)

“기서 이상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일본사학계는 왜 패망 이후에도 계속 별로 타당성과 근거도 없는 《임나설》을 붙들고 늘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 리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패망 후 일본학자들이 《황국사관》을 뿌리 뽑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지로는 《황국사관》을 비롯한 일제사상 잔재, 이른바 《선배학자》들이 세워놓은 학설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있다. 다음으로 《임나설》이 유지되여야 일본 렬도 내에 있는 방대한 조선문화를 저들에게 유리하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114쪽)

“이또지마 가야소국의 군사력이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 신라를 한편으로 하고 백제 가야, 왜를 한편으로 한 조선반도의 풍운의 력사에 말려들어갔고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고국 가야 편에서 고구려, 신라와 싸운 왜였다고 보는 것은 공화국 력사학계의 새롭고 참신한 제기로서 이제는 정설로 되였다. 일본학계에도 그것은 론문 소재가 되었다.”(166쪽)

“공화국학계는 이미 오래전에 일본 땅에 있는 고대 산성유적이야말로 조선계통 이주민들이 형성한 소국의 상징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력사과학》 1963년 4호 18페지) 이 주장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으며 일본에서의 고고학적 발굴과 정리에 의하여 더욱더 실증되고 있다.
일본학계는 고대조선식 산성유적의 축조시기를 7세기 이후로 몰밀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이 성유적의 주재자를 야마또 중심사관의 견지에서 고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력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독선적 판단이다. 조선식 산성은 말 그대로 조선사람의 성이다.”(218~219쪽)

“필자[조희승]는 언권을 요청하여 5분간 발언하였다.

《첫째로,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야마또의 왜라고 하였는데 그래 고고학적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야마또의 사회군사적 단계라는 것은 서부일본을 통합 못한 단계에 처해있다. 고고학적으도 볼 때도 무로노오오하까(室大墓), 찌노오까(乳岡)고분 등이 주술적 색채가 강한 유물들을 부장한 것들인데 이것을 보고 어떻게 야마또의 정권이 조선에 군사출병할 사회경제적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야마또정권이 서부일본을 통합하였다고 하면서 그 실례로서 인덕(仁德다이센), 응신(應神곤다야마) 두 왕릉을 들었는데 이 두 초대형고분이 과연 5세기 초에 존재해있었는가. 우리가 알기에는 다이센, 곤다야마고분이라는 것은 대체로 5세기 말~6세기 초의 축조로 안다. 아리야마, 야쭈(野中)고분을 보아도 그것은 일목료연하다.》”(241쪽)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기비지방 임나가라에 설치된 야냐마또정권의 전권대표격인 행정적 출장기관 또는 그 기관을 책임진 관리였다. 이것이 기내 야마또정권이 파견한 《임나일본부》의 실체이고 정체였다.”(263쪽)

[ 2019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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