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 빈민스토리(15) - 삼양동 노점상 서원자 씨와 갈치 파는 노점상 박단순 열사

1. 강북구 삼양동 노점상 할머니

여기 또 한 사람의 죽음을 소개하고자 한다. 갈치 파는 노점상 박단순 열사다.

2017년 그날은 맑은 하늘에 갑자기 폭우가 억수로 쏟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격적으로 초여름에 들어가기 시작하던 6월, 북부지역 노점상의 대표를 맞고 있는 정구준씨로부터 노점상 한 분이 단속 과정에서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녀는 1956년생으로 7남매 중 맏이였다. 1978년 22살 무렵 남편과 결혼하여 집안 살림을 도맡아 왔다. 전라도에서 소작농으로 일을 했지만,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어 1981년 서울로 상경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옮겨가는 ‘이촌 향도’ 의 마지막 무렵이다. 시골보다 일자리가 풍부했지만, 박단순 씨 가족에게는 이렇다 할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아 변두리를 전전하게 된다. 그러다 1990년 강북구 삼양사거리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노점상을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노점상이 그런 거처럼 가족들이 선택한 최후의 보루였다.

‘삼각산 아래 양지바른 남쪽’이라는 뜻의 ‘삼양동’은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이 일찍이 터전을 잡고 살았던 변두리 동네다. 2018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삼양동 한 옥탑방에서 한 달간 임시 공관을 꾸리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강북구 삼양동에 산다는 것은 곧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것을 뜻했다.

▲ 노점상 서원자 씨

박단순 씨의 죽음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서원자 씨다. 그녀는 1970년도부터 삼양시장 근처에서 장사하며 노점상 단체의 삼양지부장을 11년 동안 맡아 일했던 사람이다. 서원자 씨에게 박단순 씨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였다. 그녀는 일흔이 넘었지만, 함께 장사하던 옛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서원자 씨의 기억과 행동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동일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주체의 개인적, 문화적, 계급적 조건 등에 따라 그것은 상이한 경로를 거치면서 사건 이후의 각각의 삶을 규정하는 것으로 즉 각각의 조건과 경로들은 활동 현장을 떠난 이후의 삶의 행로와 이들의 결혼과 가족관의 정향, 그리고 종교적 신념 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1)

주1) 김경일, 한국 산업화 시기 노동자의 생애와 사건: 기억의 재구성과 노동자 정체성의 형성

“박단순 씨는 1990년 즈음 만났어요. 같이 살다시피 했지요. 그러니까 이곳 시장이 사라지고 상권이 근처 마트로 옮겨가도 단순 씨를 찾는 단골이 참 많았어요. 한마디로 사람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지나가는 할머니들이 와서 쉬었다 가면 먹을 것을 나눠 먹고, 물도 나눠주고 인정이 참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이에게는 슬하에 아들 둘이 있었지만, 생활이 어려웠어요. 남편은 술을 좋아해 오래전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요. 하지만 힘들다는 내색도 그리하지 않았어요.”

서원자 씨는 1980년대 단체가 조직되면서 소위 강북지역의 여성 노점상으로 왕성하게 활동을 해 왔다. 홀로 용역에 맞서 싸우면서 붙여진 별명이 ‘욕쟁이 할머니’였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거리에서 뒹굴며 살았기에 그녀에게 어쩔 수 없이 붙은 별명이었다.

삼양동은 언제부턴가 달동네로 올라가는 길목에 개발 바람이 불고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강북구청은 보도환경을 개선한다면서 노점상을 강제 철거했다. 결국 단속을 견디지 못한 노점상이 하나둘 사라지고, 상권이 점차 위축되어 나갔다. 박단순 열사도 단속을 피해 몇몇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삼양사거리 근처 환경미화원 후생관에 양해를 구하고 계단에 앉아 갈치 장사를 했다.

“저는 십 년 전 장사를 그만둘 때까지 단순 씨와 함께 지냈어요. 서로 먹고사는 게 바빴지만, 장사가 끝나면 소주 한 잔 기울이고 그랬지요. 피는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가족처럼 지냈어요......

단순 씨가 쓰러진 그 날은 날씨가 더웠어요. 장사 자리에 놀러 가 저는 잠시 길 건너 핸드폰 충전소에 충전시키러 갔다 오니까 구청 직원이 와서 차를 대놓고 자리 치우라고 막 소리치고 난리 난리를 쳤어요. 한참 그랬는데 ‘이게 뭐냐, 얼음 다 녹는다, 뚜껑을 덮어놔야지….’ 하며 단순 씨가 갈치 상자를 옆으로 치워놓자마자 쓰러졌어요. 그리고 다리를 쭉 뻗고 꿈쩍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거예요...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박단순 동생과 김진학 씨(현 민주 노점상전국연합 북동부지역장)가 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며칠 후 허무하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어요.”

이날은 목격자가 여럿이 있었다. 강북구에서 요구르트를 판매하는 김 씨는 현장에서 목격한 이야기를 전한다. “덩치 큰 사내가 쓰러진 언니 앞에서 뭘 흔들고 있었다. 언니 팔이었던 것 같다. 놀라서 달려가 보니 언니 눈동자가 이상했다. 119 불렀냐고 묻자 용역들은 '불렀다'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급한 마음에 언니 가슴을 누르며 응급처치를 하려 했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면 오히려 가슴이 더 압박된다며 하지 말라고 했다. 119가 더럽게도 안 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왔다. 늦게나마 온 구급대원들이 언니 상태를 보더니 '사망'이라고 말했다. 이미 언니는 이 자리에서 죽은 상태로 병원에 간 거다.”2)

주2) 뉴스엔조이 2017.06.27, 사람이 죽었는데 475만 원에 합의하자고…

이렇게 박단순 열사는 2017년 6월 19일, 강북구청에서 나온 단속반에게 단속을 받던 도중 쇼크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25일 오후 3시 30분경 생을 마감한다. 김진학 씨에 따르면 강북구청에서 당시 박 씨가 입원해있던 중환자실로 찾아와서 고인의 아들에게 "자네 나이가 몇 살인가?, 어머니는?” 딱 두 마디 하고 5분 정도 앉아 있다 자리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기초생활 수급자로 임대주택에서 살았다. 남편은 알코올중독으로 15년 전 정신병원에 입원해 매달 70만 원씩 병원비를 대면서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근근이 목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친정어머니도 병환으로 몸져눕게 되어 그 병간호와 부양도 감당해야 했으며, 친정어머니도 1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번에는 단속과 함께 그녀의 운명마저도 이승에서 더 버티지 못하고 떠난 셈이다. 죽음마저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온다.

2. 2017년 뜨거웠던 여름날 박단순열사 투쟁

▲ 상여를 들고 박단순 열사의 죽음에 항의하는 노점상

6월 22일 서울 북부권의 시민사회단체와 여러 진보정당 그리고 노점상단체가 모여 ‘강북구청 노점 살인 단속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과 용역 깡패 해체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6월 26일 노점 살인 단속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과 용역 깡패 해체를 위한 1차 투쟁결의대회를 강북구청에서 개최하며 농성에 돌입한다. 노점상 박단순 씨의 사건이 알려지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전국농민회총연맹 그리고 한국진보연대 및 빈민해방실천연대와 빈곤사회연대,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 등 시민사회 단체와 빈민단체의 조문이 이어졌다.

6월 27일 전국단체를 중심으로 확대된 대책기구인 ‘강북구청 노점 살인 단속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과 용역 깡패 해체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서울 도봉구 한일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상황실이 마련하고 ‘사과와 진상규명 그리고 책임자 처벌, 노점상에 대한 폭력적인 단속 중단과 용역 깡패 해체’를 요구한다.

그러나 6월 29일 강북구청은 ‘강압적 행위가 없었다. 매뉴얼대로 했기 때문에 법적 책임이 없다’ 는 입장을 내놓는다. 다음 날 강북구청 관계자들이 찾아와 가족들에게 병원비와 장례비, 위로금이라며 475만원’을 내밀었다. 그러자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보상금 475만 원은 특별한 액수가 아니라며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긴급 의료급여와 장제급여' 그리고 위로금 300만 원으로 구성된다며 유가족을 기만하고 사건을 덮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월 30일 2차 투쟁결의대회가 개최된다. 이날 민주노총의 ‘사회적 총파업’에 참여해 노동자를 상대로 노점상의 억울한 죽음을 알려내고 모금을 진행하였다. 7월 5일 3차 투쟁결의대회는 ‘청와대’ 앞에서 진행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 특히 노점상의 죽음을 성토’ 하며 정부를 규탄하고 청와대에 항의서한을 전달하였다. 폭염 속에서도 매일 촛불집회와 일인시위가 구청 앞에서 전개되었다.

7월 12일에는 고인의 장사 현장인 삼양동사거리 ‘강북구 보훈회관’ 앞에서 강북구청까지 4km가 넘는 거리를 약 50여 명이 소복을 입고 행진을 하였다. 약 2,000여 명의 시위대가 열사를 추모하는 집회에 참석한다.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자 7월 14일 오전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고인의 장례식장을 찾아와 조문하고 가족 앞에 사죄하며 가족과 대책위의 요구 조건에 합의 하기에 이른다. 같은 날 오후 7시 어두워질 무렵 강북구청 앞 서원자 씨는 살아생전 고인과 함께했던 시간과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마침내 박단순 열사의 영결식이 열린 것이다.

3. 문재인 정부 아래서도 누군가 신음하고 또 죽고 있다

▲ 2017년 1월 박원순 서울시장의 친필 서명

이 글을 쓰던 2019년 여름을 앞두고 용산참사 생존 철거민 김**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용산4구역 철거민으로 망루 농성에 참여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구속당한 후 출소한 그는 최근까지 우울증 치료받던 중 6월 22일 49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 끊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로 잠을 잘 이루지 못했고, 간혹 우울 등 트라우마 증세를 보이며 높은 건물로 배달 일을 하러 갈 때는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으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가족에게 전화로 ‘내가 잘못되어도 자책하지 마라’고 연락한 후 도봉산에서 목을 맨 시신으로 6월 23일 오후 발견되었다. 박단순 열사가 돌아가신 지 꼭 2년째 되는 해다. 문재인 정부에서 경찰과 검찰의 과거사 조사를 진행하였다. ‘과잉진압과 편파 수사’의 일부가 드러났지만 결국 ‘공소시효가 지났고,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용산참사 10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2017년 박단순 씨의 죽음 이후 8월 14일 인근의 도봉구청은 ‘구민의 보행 환경 및 도시 미관 개선 상생을 위한 창동역 거리 가게 개선사업 협약’을 노점상과 체결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8일 구청에서 ‘철거 후 새로 제작되는 부스가 기존 위치에 원활히 설치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공문을 노점상에게 보낸다. 게다가 구의회에서 창동역 개선사업 관련 예산까지 통과시켰다. 노점상들은 같은 해 10월 30일까지 모든 마차를 자진 철거했다. 그 후 구청의 실태조사 요구도 들어줬다. 실태조사는 자신의 모든 정보를 자치단체에 공개해 주는 일종의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그리고 도봉구청이 요구한 고가도로 밑에서 장사를 해도 안전상 문제가 없는지 서울교통공사에서 ‘행위신고서’를 받아 제출까지 한다.

하지만 그 후 도봉구청의 태도는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공사가 끝날 때까지 장사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또 주민과의 협의가 더 필요했다. 그리고 지방선거가 끝나면 자리를 배치한다고 했다. 노점상은 일 년 넘게 구청의 말만 믿고 속수무책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2018년 8월 8일 폭염이 전국을 휩쓸던 날 노점상이 장사해야 할 곳에 도봉구청에서 기습적으로 화단을 가져다 놓으려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노점상들은 반발했다. 이날 새벽부터 노점상들은 약속을 지키라며 도봉구청을 점거하며 기나긴 투쟁에 돌입한다. 민주노점상전국연합 북동부지역 김진학 씨에 따르면 도봉구청은 슬며시 ‘거리 가게 재배치 변경계획 알림’이란 공문을 보내 노점상 자리를 다른 곳으로 재배치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한다. 창동역 2번 출구 노점상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이 철저히 기만을 당한 것에 분노하자 구청을 상대로 싸우게 된다.

노점관리대책 등장 10년 후 누군가는 노점상을 둘러싼 갈등은 이제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집단이기주의나 떼를 쓰는 존재로 치부한다. 2017년 지방자치단체에서는 100억 원 이상의 노점상 강제 철거 예산을 편성하였다. 지금도 이 숫자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 된다. 서울시의 노점관리대책이 실제 어떻게 현장에서 관철되고 있는지, ‘국가폭력’으로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유린당하고 있는지, 박단순 열사와 그의 지인 서원자 씨의 고단했던 삶을 통해 조금이나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겠다, 인권을 확대하겠다, 천명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도 비통한 심정으로 이렇게 누군가를 보내고 있다. 한때 ‘사람이 철거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라고 친필 서명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글귀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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