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인가 학살인가 : 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4) - 1950년 7월 2일 이천 곤지암리

국군 6사단의 예비연대였던 19연대의 3대대 10중대가 1950년 7월 2일 이천 곤지암리 사거리에서 휴식을 취하던 100여 명 규모의 인민군 보급부대를 공격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1권, 305쪽, 중대장 김두일 대위 증언) 공격을 당한 부대에 민간인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란민 대열일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이천 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이기도 했다. 

그림 1) 『한국전쟁사』 1권 305쪽. 우마차를 몰던 사람은 민간인이었을 것이다.
그림 2) 오른쪽 곤지암 사거리를 경계하던 국군의 진지는 왼쪽 산에 있었다. 2019년 3월 8일 조사.


경비병 없이 휴식하는 인민군 보급부대를 발견하다

이 공격은 국군 6사단이 이천으로 후퇴할 때 벌어졌다. 인민군 12사단의 공격으로 홍천 말고개에서 후퇴하여 6월 30일 횡성에 집결한 국군 6사단 19연대는 이후 원주로 후퇴했다가 원주를 7연대에게 넘기고 다시 이천으로 이동하라는 사단장의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공격하는 인민군과 접촉을 끊고 열차를 이용하여 일단 충주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차량과 도보로 올라오는 경로를 이용했다. 이유는 설명되어 있지 않았지만 군 수뇌부가 횡성에서 이천으로 이동하는 가장 가까운 도로가 이미 인민군에게 차단당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이 이천에 도착한 때는 7월 2일 0시였고 곧바로 곤지암 4거리가 보이는 산 능선에 방어진지 구축에 들어갔다. 능선에 따라 동에서 서로 1대대, 2대대, 3대대가 진지를 구축했으니 곤지암 사거리 쪽에는 3대대의 진지가 있었다. 
이들 국군이 방어해야 할 상대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춘천에서 남하하던 인민군 2사단이라고 추정했다. 한편,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이천과 여주로 진출한 인민군은 15사단이었다. 이들은 7월 3일 오후 늦게 음성과 충주로 진격했다고 하므로 국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이천을 통과했던 것이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324쪽) 이는 국군 19연대가 인민군 후방에서 고립될 처지에 놓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알지 못했던 것인지 △194 고지에서 진지공사를 마치고 휴식 중이던 국군 6사단 19연대 3대대 10중대는 7월 2일 아침 7시 곤지암리 4거리에서 우마차에 보급품을 가득 실은 채 경비병도 세우지 않고 민가에서 휴식하고 있는 1개 중대 규모의 인민군을 발견했다. 곤지암리 4거리는 현재 곤지암사거리를 말하고 △194고지는 여기에서 곤지암역 반대 방향에 있는 산을 말할 것이다.

그림 3) 전쟁 중인 1950년 군산읍내에 있는 우마차 대열의 모습이다. 사진 속 우마차에는 실린 짐이 없지만 이 모습은 곤지암 사거리에 주둔한 인민군 보급부대의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사진은 연합뉴스가 2010년 6월 24일 당시 주한미군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한다.


공격

인민군을 목격한 중대장 김두일 대위는 “오랜만에 적과 만난 것은 반가우나 어디에서 이 따위 보급부대를 만나게 되었느냐. 그러나 닭 잡는데도 소 잡는 칼을 휘둘러야지!”라고 하면서 2개 소대로 공격을 준비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예상되는 퇴로를 봉쇄했다고 한다. 
사격 명령이 내려진 뒤 전투 상황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그들은 중대의 기습에 놀라 민가에서 뛰어나와 도피하려 하였으나 사면초가 격인데다 중대는 위장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들은 맹목사격을 일삼다가 교전 수분 만에 전멸하고 말았다.”라고 했다. 기습을 당한 150여 명의 인민군이 총을 쏘며 저항했으나 몇 분 만에 전멸했다는 설명이었다. 
2개 소대가 공격에 가담한 이 기습전에서 국군은 100명의 인민군이 사살되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인민군 5명을 사로잡았으며 우마차가 포함된 소와 말 40필, 중화기 기관총(HMG) 15정과 실탄 40상자, 122mm 야포탄 500발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했다. 반면 이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국군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림 4) 곤지암리 4거리. 국군이 주둔했던 야산이 왼쪽 건물 뒤편에 있다.

보급부대와 민간인 피해

인민군 보급부대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 전투는 이후 벌어질 전투, 즉 충주 동락마을 전투나 음성 감우재 전투, 상주 화령장 전투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 인민군 주력이 지나고 난 뒤 후발부대를 공격한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후발부대 대부분은 보급부대로 보이는데 『한국전쟁사』는 마치 이들을 주력부대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한국전쟁사』는 이천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 대해 피습당한 인민군이 보급부대였음을 인정했으면서도 우마차를 끌었을 민간인에 대한 서술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들 인민군이 보급부대였다면 그들이 속한 부대가 인민군 2사단이었든 아니면 15사단이었든 이미 주력부대는 곤지암리를 넘어 남하했을 것이고 이는 곧 국군이 적 진영에 포위당할 위험한 처지에 놓였음을 의미한다. 이 전투에 참여한 국군으로부터 이에 대한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한편, 같은 책에서 박주근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국군 19연대는 예비연대였다.(국방부, 앞의 책 제1권, 308쪽) 예비연대라면 전선의 후방에서 부대를 정비하거나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는 부대라는 뜻인데, 이들이 적이 점령한 진영에 있으면서 보급부대를 만났다는 것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같은 국군 6사단 소속 2연대의 당시 상황은 더욱 특이하다. 위 책 김세돈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이 부대는 홍천 이후부터 충주로 후퇴할 때까지 한 번도 전투가 없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1권, 308쪽) 그가 말한 ‘전투가 없던 기간’은 홍천에서 후퇴한 날인 6월 29일부터 충주에 도착한 7월 4일까지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이 기간에 해당하는 7월 1일 6사단 헌병대 김만식 상사는 여주와 이천에 주둔하던 중 국민보도연맹원을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아 집행했다고 증언했다. 전투는 없었지만 민간인 학살은 있었다는 것이다.
이천에서 벌어진 위 사건은 인민군 점령지에 고립된 국군 6사단 19연대가 인민군 15사단의 보급부대를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포로가 있었음에도 국방부는 패전한 인민군의 소속 등을 정확히 밝히지 못했다. 사로잡혔다는 다섯 명의 인민군이 민간 피란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마차를 끌고 가던 사람들이 인민군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며 함께 있던 민간인들이 더 있을 수 있었음을 의심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공격에서 희생된 민간인들 중에 주민이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포함된 것은 아닌지 조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관련된 증언이나 문헌을 만나지 못했다.
7월 3일 새벽 인민군의 공격을 받은 국군 19연대는 안성을 거쳐 다음날 정오 음성으로, 다시 진천으로 철수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소집되었던 음성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은 7월 5일부터 본격적으로 집단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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