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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45분에도 잠 깨지 않은 적을 공격하다전쟁인가 학살인가 : 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3) - 1950년 6월 28일 홍천 복골
  • 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 승인 2019.08.2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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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에서도 앞의 파주 봉암리 경우처럼 이미 주력부대가 지나간 뒤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어떤 집단이 국군에게 공격당하는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전쟁사』에는 “예기치 않았던 기습에 허를 찔린 무리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눈을 비비며 우왕좌왕하다가 대부분의 적은 총검의 제물이 되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라고 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1권, 264~266쪽) 그런데 이 전투가 벌어진 시간이 아침 8시 45분이었으니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았다.

전투를 치른 국군은 6사단 2연대 1대대였으며 전투장소는 홍천 두촌면 철정리 복골마을, 사살당했다는 200여 명의 인민군의 소속은 12사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림 1) 『한국전쟁사』 1권 265쪽. 아침 8시 45분 국군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한 인민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6월 28일 전쟁 발발 후 불과 나흘째 되는 날이었으니 아직 전투의 긴장이 풀어질 때는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 직전에도 홍천은 최전방이었다. 전쟁 당시 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7연대를 춘천, 2연대를 홍천, 예비연대였던 19연대를 원주에 배치하고 있었다. 춘천을 방위하던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홍천을 방위하던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1949년 5월 월북했는데 이 때문인지 그들이 속해 있던 8연대는 전쟁 발발 직전 19연대와 교체되어 수도경비사령부로 배속, 이동했다.

홍천의 2연대는 6월 25일 철정리 위쪽의 어론리에서 두 대의 전차를 파괴하고 일시적이나마 인민군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후퇴 후 6월 26일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남쪽 두촌면 자은리로 철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어진 인민군의 공격으로 다시 연대 전술지휘소를 홍천경찰서 성산지서로 옮기고 화촌면 성산리 북쪽 말고개에 방어진지를 설치했다. 이제 말고개가 인민군과 대치한 최전선이 되었다.

그림 2) 왼쪽 성산지서에 국군 2연대 전술지휘소가 있었다. 지서 앞길은 말고개로 이어진다.
그림 3) 말고개는 도로 오른 쪽에 있다. 주변 산에 가려 고개 정상에서도 철정리나 자은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때 자은리까지 진출한 인민군이 돌연 공격을 중단했다. 국군 2연대를 공격했던 인민군 2군단 12사단과 603모터사이클연대의 처음 임무는 원주와 여주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여 국군의 퇴로와 증원을 차단하는 것이었는데, 춘천 전선의 병력을 강화해야 하자 일부를 이동시킨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6월 27일 춘천에 대한 인민군의 공격이 강화되었다.

한편 당시 사단 주력을 춘천에 두었던 국군 6사단장은 후방의 홍천이 점령당할 경우 주력이 포위될 것을 염려하고 후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춘천에 있던 예비 병력인 19연대를 홍천으로 이동시키려 했다고 한다. 당시 사단장은 자은리에 주둔했던 인민군 주력이 춘천으로 이동한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춘천과 홍천을 둘러싸고 국군과 인민군은 서로 마주치지 않는 전술을 택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국군은 홍천 방어를 강화하며 후퇴를 준비했고 인민군은 춘천 공격을 강화하며 홍천 공격을 약화시켰으니 국군은 춘천 방어를 포기한 결과가, 인민군은 후퇴로인 홍천 공격을 포기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퇴로 확보를 걱정하던 이때 국군 6사단장은 서울 육군본부로부터 시흥으로 이동하니 후퇴하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홍천으로 병력을 보내려 했던 국군 6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후퇴 준비의 과정으로 먼저 예비부대인 19연대를 홍천 철정리로 보내게 되었다. 이는 곧 춘천 방어 포기와 후퇴를 의미했다.

국군의 반격?

6월 28일 인민군은 아직까지 간헐적으로 교란 사격만 할 뿐 본격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주력이 춘천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19연대를 보강한 국군이 반격을 시작했다고 한다. 퇴로 확보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6월 28일 새벽 3시 주둔지인 화촌면 성산리를 출발하여 철정리를 향하던 국군 6사단 2연대 1대대는 철정리 내촌천을 건너면서 20명의 전초병을 사살하고 아침 8시 45분 전후 철정리 복골에 주둔하던 인민군을 역습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윽고 05:30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자욱한 농무를 헤치고 공격개시선을 약출하였다. 아무리 심한 안개라고 하나 적의 중앙을 돌파해야 했기 때문에 철저한 무소음에 의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진출속도는 우보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 점진 행동은 주효하여 △397에 전초로 나와 있던 20명의 적에게 접근하여 일거에 쳐부술 수 있었고, 08:45에는 속칭 복골을 완전히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전투를 지휘하던 대대장 김주형 소령은 1개 중대를 능선에 배치하여 엄호토록 하고 2개 중대를 풀어 양쪽에서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복골로 돌입케 하였다. 예기치 않았던 기습에 허를 찔린 무리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눈을 비비며 우왕좌왕 하다가 대부분의 적은 총검의 제물이 되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전투에서 구경미상의 포 2문, HMG(Heavy Machine Gun) 5정, 소총 37정, 기타 차량 5대분의 보급품(주로 피복과 탄약)을 노획하여 이를 현지에서 파괴하였다.”

이 전투에 대해 국군 6사단 2연대 1대대장 김주형(金柱亨) 소령은 “그때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우리가 기습한 곳은 그들의 지휘부가 아닌가 한다. 어떻든 참전자들은 이 전투에서 200명 이상의 적을 살상하였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공격당한 자들이 인민군 지휘부였다고 단언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솔직해 보일 정도이지만, 살상당한 적의 수를 추정하는 것을 보면 언제 반격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전공을 확인하기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국군이 파괴했다는 인민군의 대포와 기관총, 보급물자를 파악했다고 하니 이는 믿기지 않는다.

전투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20명의 보초, 이어 다시 200명의 본대가 기습을 당하는 동안 인민군 측의 반격은 없었다. 노획품이 현지에서 파괴되었다고 하니 이 전투의 성과를 증명할 방법은 없어졌고 일방적인 주장만 남게 되었다.

라주바예프의 보고와 비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소련 군사고문관의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6월 25일 인민군 12사단 3개 연대 중 30연대, 32연대는 홍천 방면으로, 31연대는 춘천 방면을 향했는데 춘천 동면 평촌리까지 진출한 31연대는 사단과 통신이 두절되어 공격을 중지하고 26일 하루 동안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후 인민군 12사단은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홍천 부근에서 전투를 벌였고 7월 1일 오후 4시 홍천을 점령했다고 했다.(『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제1권, 308~311쪽)

인민군 31연대가 위 춘천 평촌리에 주둔하던 때가 6월 25일이었고 홍천 철정리는 여기에서 직선거리지만 불과 15km 떨어져 있었다. 춘천 점령이 목표였던 인민군 31연대는 통신이 안 되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하루를 쉰 뒤 27일이 되어서야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국방부 ‘국군 6사단의 춘천방어 3일’ 주장의 배경이 되었을 수 있다. 한편 홍천을 향했던 인민군 30연대 또는 32연대 일부 등이 3일 뒤인 6월 28일 국군 6사단 2연대를 홍천 철정리에서 만났던 것이다.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서는 200명이나 되는 큰 병력을 일방적으로 잃어버린 위 28일 아침 전투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피란민 또는 주민이었을 가능성, 아니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 7사단 정보참모였던 이세호에 따르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 인민군이 당한 피해는 전사 219명, 부상 761명, 실종 13명 등 총 1,112명이었다고 한다.(이세호, 『한길로 섬겼던 내 조국』, 2009, 188쪽) 여기서 다룬 홍천 복골전투에서만 피해를 입은 인민군이 200명이고 앞에서 다룬 대한해협 전투에서 600명, 파주 봉암리 전투에서 50명이 전사했다고 본다면 이 세 전투의 인민군 전사자만 850명에 이른다. 이와 비교하면 위 이세호가 인용한 ‘전사 및 실종자의 수’가 200여 명과 차이가 크다.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국방부 측의 과장이 지나침을 짐작할 수 있다.

라주바예프의 보고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군사고문관의 입장에서 인민군의 패배라고 해서 은폐하거나 옹호하는 서술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보고서를 신뢰한다면 이 전투의 피살자 200명은 피란민 또는 주민이었거나 아니면 허위 또는 과장된 서술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시 국군 방어선인 말고개에서 철정리 복골마을까지 직선거리는 약 6km였다. 20명의 전초병을 무찔렀다는 내촌천까지 약 4km. 새벽 3시에 출발한 2연대 1대대가 복골마을에 도착한 시간이 8시 45분이었다고 하니, 길도 없는 깊은 산속 6km를 이동하는데 6시간 가까이 걸린 것은 그리 느렸다고 할 수 없어 보인다. 필자가 살펴보기에는 낮에도 방향 찾기가 쉽지 않은 산속에서 그것도 어두운 새벽녘 산행에서 길을 잃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이 상황에서 이동 도중에 내촌천에서 인민군 초병 20명과 전투까지 치렀다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의문점은 『한국전쟁사』의 전투상황도에서 발견된다. 인민군을 만났다는 지점이 복골마을이 아니라 내촌천 부근만을 표시하고 있어 의문이다. 일방적인 공격이었다고 해도 복골마을에 인민군 주둔지가 표시되지 않은 점은 의문이다. 이 상황도로 봐선 마치 정찰부대가 복골마을까지 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인민군의 공격을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림 4) 국군 6사단 2연대 1대대의 전투 상황도이다. 『한국전쟁사』 제 1권, 265쪽. 철정리 복골에 들렸다가 전투없이 철수도중 인민군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읽힌다.
그림 5) 아홉사리로 고개 정상의 모습. 위 상황도 제8호에서 복골을 공격하고 돌아오던 국군이 인민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표시되어 있는 지점 부근이다.

『한국전쟁사』가 이 전투를 치른 아군의 피해 사실을 적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이다. 인민군 측의 반격이 없었다고 하니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던 것일까? 증강된 대대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전투에 참여한 국군 1대대의 규모는 500명이 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촌천에서 초병 20명을 공격했다고 한다. 20명이나 되는 보초병이 내촌천을 건너는 500명의 국군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 있지만 이동하는 국군 역시 인민군 보초병이 어디에 배치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거의 영화 속 상상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초기 아군 피해 없이 200명의 인민군을 무찌른 전과는 26일 새벽 600명을 무찌른 대한해협 전투에 이어 두 번째 규모의 승전이며, 이후 보게 될 충주 동락리 전투나 상주 화령장 전투의 일일전투 성과가 200명에서 300명 정도였다는 것과 비교할 때도 결코 이에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전투가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필자만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아침 8시 45분에 있었던 공격에서 인민군 측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눈을 비비며”라는 내용이 단지 과장된 묘사가 아니라면 이 전투의 사망자들 역시 피란민이나 주민들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홍천군지』 등 지역사 관련 자료에서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으며, 필자 역시 아직까지 200명의 인민군이 사살당할 당시를 목격한 복골마을 주민들을 만나지 못했다. 곧 사망자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길 고대한다.

이후 국군은 다음날인 6월 29일 새벽 6시 인민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아침 8시 50분 홍천읍내로 후퇴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전날 있었던 전투의 공격자와 방어자가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횡성과 원주, 여주와 이천을 거쳐 충주 방면으로 후퇴하던 국군 6사단은 주둔하는 지역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일으켰다. 횡성에서는 1950년 6월 28일 후퇴하던 국군 6사단 헌병대가 100여 명의 횡성읍 주민들을 추동리 고내미 고개와 곡교리 민가에서 살해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중에는 국군 6사단 19연대가 청원군 오창면에서 저지른 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후퇴하던 중 7월 10일 충북 청원 오창군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 300여 명을 그 자리에서 중기관총을 이용해 학살했다. 전선의 남하와 함께 민간인 학살도 본격화되고 있었고 여기에는 국군 6사단의 역할이 컸음이 확인된다.

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webmaster@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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