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인가 학살인가 : 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2)

피란민들이 공격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전투가 가장 먼저 벌어진 곳은 파주 봉암리였다. 『한국전쟁사』는 신원을 알 수 없는 50여 명의 무리가 새벽녘 “경계의 빛도 없이 이북의 방언을 마구 쓰면서 도로변에 나오자” 이들을 적으로 직감한 28명의 국군 1사단 특공대가 집중 사격을 가해 전멸시켰다고 적었다.(제1권, 441~442쪽)

그림 1) 『한국전쟁사』 1권 441쪽.

사람을 알아 볼 수 없는 어두운 새벽녘이었으므로 이들을 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이북의 방언”이었다고 했다. 당시 국군이 매복하고 있던 도로는 지금의 통일로였다. 당시 수많은 피란민이 이 도로를 통해 내려오던 시기였고 피란민 대부분은 이북의 방언을 쓰던 사람들이었다. 과연 특공대는 누구에게 총을 쐈던 것일까?

탱크부터 막아라

전쟁 발발 당시 국군 1사단(사단장 백선엽) 사령부는 11연대, 6야전포병대대와 함께 수색에 주둔했으며, 12연대는 청단, 개성, 대원리, 13연대는 문산, 고랑포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인민군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정보에도 불구하고 1사단은 월급날인 6월 24일 병력의 3분의 1에게 휴가를 주었고 나머지 병력 중 3분의 1에게 외출과 외박을 허용했다. 전쟁 발발 순간 절반 가까운 병사들이 전선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시흥보병학교 교육과정에 들어가 있던 사단장도 서울 신당동에 살고 있었으므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서울 자택에서 아침 7시에 받게 되었다.

6월 25일 전선에서 후퇴하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6월 26일 오전 임진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저녁 7시를 기해 파주 월롱면 위전리 일대에 제2방어전선을 구축하며 밤 9시 30분이 돼서야 사단전방지휘소를 파주 봉일천초등학교에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공병대대는 대전차 공격을 위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1번 도로(통일로)에서 적 전차의 침공을 격퇴하라”는 명령도 함께 내렸다고 한다. 적정에 대한 판단이나 연관된 방어 계획도 없이, 말 그대로 밑도 끝도 없이 일단 “탱크부터 막아라”라는 명령이었다.

탱크를 만나지 못한 탱크 특공대

사단장의 명령을 받은 사단공병대대장 장치은 소령은 대대본부에 돌아온 후 부대대장 김영석 소령에게 인민군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특공대 편성을 지시했다. 김 소령이 이 지시를 받았던 곳이 봉일천 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대대본부였다고 하니 때는 밤 9시 30분을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영석 소령은 자신을 대장으로 23명의 특공대를 결성하고 대전차 공격에 유리하다고 판단된 파주읍 봉암리 도로변에서 전차를 기다렸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대전차공격에 유리하다고 판단된 봉암리(문산 남쪽 5km)에서 차를 돌려보낸 뒤 북으로 700미터 거리에 있는 △82 서록(서쪽능선, 편집자 주)에 연한 도로변에 개인호를 파고 적 전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라고 썼다.

파주읍 봉암리는 현재 경의선 전철역인 파주역 부근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700미터 떨어져 있는 도로변에 23명의 특공대가 참호를 파고 전차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들의 진지는 사단 전방지휘소가 있던 봉일천초등학교에서 약 9km떨어진 곳이었다.

자정이 넘고 27일 동이 틀 무렵에도 전차는 오지 않았다. 인민군은 이미 방어선을 넘어간 뒤였으니 전차가 올 리 없었지만 이들이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림 2) 국군 1사단 공병대 23명의 대전차특공대가 개인호를 파고 전차를 기다렸다는 장소로 보인다. 지금도 길 건너편으로 참호를 볼 수 있으며 굽은 길 오른쪽으로 산에서 도로로 내려오는 길이 있다.

탱크는 오지 않고

적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 밤이었다고 했다. 전차가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밤을 새워 전차를 기다리던 중 새벽이 왔다. 이때,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구별할 수 없는 1개 소대 규모, 즉 50여 명의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북의 사투리를 쓰고 있었으므로 인민군이라고 판단한 특공대가 일제히 사격을 가해 10여 분만에 모두 사살했다. 『한국전쟁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날 자정을 넘기고 어느덧 불효(拂曉, 동이 틀 무렵)가 되었을 때 돌연 △82 정상에서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1개 소대 규모의 병력이 산록을 향하여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에 김영석 소령은 즉각 각 개인호에 전달하여 명령일하에 일격필살의 태세를 취한 다음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산록에 도달한 그들은 경계의 빛도 없이 이북의 방언을 마구 쓰면서 도로변에 나오자 이에 김 소령 등은 즉각 적이라고 직감하고 20~30m 거리에 모여든 그들을 향하여 김 소령의 총성 일발의 사격 신호에 따라 일제 사격을 가하였는데 이에 그들은 미처 도망할 틈도 없이 마치 표적을 넘어뜨리듯 주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불과 10분 안팎의 총성이었다.”

특공대는 날이 밝은 후 일대를 수색하여 수냉식 기관총 1정, 다발총 8정, 소련제 소총 5정, 권총 2정 등 모두 16정의 무기를 모았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사살당한 인민군이 몇 명이었으며 어디 소속이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철수

김 소령은 이 전투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인민군이 내려왔던 △82고지 정상에 올라 봉일천에 있던 대대본부와 무선교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아침 9시 고지 정상에서는 멀리 1번 도로인 통일로로 문산까지 바라다 볼 수 있었는데 전차는 물론 어떠한 적의 이동 모습도 관측할 수 없었으니 “전차 공격” 임무를 마쳤다고 판단하고 마을에서 수레를 얻어 노획품을 싣고 대대본부로 철수했다.

승전의 증거는 16정의 무기였다고 하는데 50여 명이 무장한 장비로는 빈약하며 이조차도 제대로 보고되었을지 의문이다. 아무런 근거 없는 일방적인 주장일 수도 있었다.

그림 3) △82 고지에서 내려오는 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전투에 대한 다른 기억

2019년 2월 18일 봉암리를 방문하여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봉암리 마을에서 북쪽으로 700미터 올라갔다면 위 사진의 장소일 것이다. 다가오는 전차로서는 산모퉁이에 가려 국군이 매복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는 위치였다. 마을과 떨어져 있어선지 봉암리 주민들은 이 전투에 대해 기억하지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날 있었던 공병대 특공대의 전차 파괴 작전은 무모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27일 아침 9시 특공대가 무선교신을 시도한 대대본부는 9km나 뒤에 떨어져있는 봉일천에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사』는 이들이 모두 유서를 남기면서 죽음을 각오했으므로 특공대가 아니라 결사대로 불러야 한다면서 칭송했지만 정작 목숨을 건 이들의 작전 계획은 전차를 파괴한다는 것 외에 아무런 군사적 전술적 의미를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수백 미터 이내에 이들의 희생 가치를 배가시킬 수 있는 공격부대가 준비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편, 주민들의 기억이나 또 다른 입장은 이보다 합리적이다. 봉암리의 후방인 월롱면 위전리에 다른 부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제 전투가 있었는지도 확인되어야 한다. 이 사건은 파주 지역사 관련 문헌이나 육군본부가 간행한 『육군전사』 등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글쓴이는 2019년 봉암리를 방문하여 특공대가 있었다는 진지와 50여 명의 인민군이 내려왔다는 △82고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마을 주민들은 전쟁 초기 봉암리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를 기억하지 못했으며 인민군의 시체도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전쟁 초기 시체가 많았던 곳은 월롱역 부근이었는데 인민군이 아니라 국군의 것이었다고 했다.

당시 사단장 백선엽은 “제17연대는 해주에 돌입했고, 타 연대들이 원산에 상륙하였는데 제1사단만 공격이 지연되었다”고 하여 임진강까지 다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며, 국군 1사단 11연대 1대대 4중대 소대장이었던 홍정표 중위는 6월 26일 금촌에서 인민군과 전투한 뒤 27일 오후 다시 임진강변까지 전진했다가 이미 후방인 녹번리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정보를 듣고 분산 후퇴했다고 한다.(『6‧25전쟁 참전자 증언록 제1권』, 국방부, 2003, 73~76쪽.) 이때 반격에 참여했던 부대 중에 이들 공병대 특공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북 역사학자 허종호는 “한강 이북의 괴뢰군들은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더는 도망칠 수 없게 되자 서울과 봉일천리 일대에서 절망적인 반항을 하였다.”라고 하면서 “인민군련합부대들이 서울해방작전을 진행하고 있을 때 서울 서쪽에서 진격하던 한 인민군보병련합부대는 림진강을 도하하고 28일에는 김포를 해방함으로써 서울해방전투를 진행하는 부대들의 익측을 보장하였으며 다른 한 련합부대는 6월 27일 아침 문산을 해방하고 서울방향으로 진격하다가 봉일천리(문산 남쪽 약 15키로메터 지점) 일대에서 발악하는 적을 소탕하기 위한 치렬한 전투를 벌리였다”라고 했다.(허종호,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 제1권, 150~154쪽) 봉일천 부근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은 이북의 전쟁사가 역시 지적하고 있지만 이들에게도 봉암리에서 벌어진 전투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피란민을 공격한 것이 아닐까?

금촌은 봉암리에서 후방으로 7km 떨어진 곳이다. 6월 26일 인민군은 이미 봉암리 너머에 진주하고 있었으므로 금촌의 국군이 포위당한 형상이 되고 말았다. 역으로 판단하면 당시 인민군이 봉암리를 통과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그것도 50여 명이 독립적으로 활동할 이유는 더더군다나 없어 보인다. 선발대의 가치도 없었을 테니 그 가능성도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음 문제는 피란민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는 피란민이 몰려 내려오던 시기였다. 국군 1사단 병기장교였던 공덕수는 6월 25일 “문산까지 가니까 벌써 피란민들이 소를 몰고 나오고 있었다”고 했다.(『625전쟁 참전자 증언록』 제1권, 444쪽) 6월 27일 전투의 희생자들 역시 새벽 일찍 피란길을 떠난 이북지역 주민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민군 측의 무기를 노획했다고 하지만 피습 당시 이들의 대응 사격은 없었다는 점도 이들이 정말 인민군이었는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거기에다 죽은 사람들이 인민군 측의 시신이었는지 또는 사망자들이 몇 명이나 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더군다나 이후 전차는 물론 본대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1개 소대 규모의 인민군이 독립적으로 특정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위 주장은 김영석 소령의 증언록을 기초로 작성된 일방적인 내용으로 보인다.

이상을 종합해 판단해 볼 때, 전투가 있었다면 상대는 인민군이라기보다는 장단 방면에서 내려오던 피란민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