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적 경제민주화의 길(14)] 한국재벌형성의 역사④ 개방경제와 재벌
수출주도형 경제성장과 차관도입을 통한 중화학공업화정책을 추진한 박정희정권은 70년대 후반 유신체제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함께 경제위기상황에 직면했다. 2차 오일쇼크로 인한 수출의 둔화,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 외채위기 등이 중첩되어 한국경제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내몰렸다. 결국 박정희정권은 경제위기상황에 따른 민심이반과 야당총재 제명 등 무리한 정치탄압으로 10.26사건을 맞아 종말을 고했다.
군사쿠데타로 박정희정권을 계승하여 등장한 전두환정권의 경제정책은 물가안정을 중시하고(안정), 정부통제 대신 시장기능을 중시하며(자율), 자국산업 보호에서 개방을 통한 경쟁촉진(개방)으로 전환했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확산과 맞물려 개방을 통한 경제적 종속의 심화와 재별중심 경제체제의 심화로 귀결되었다.
우선 전두환정권은 경제자유화정책에 따라 은행의 민영화조치를 취했다.
1980년 12월 금융자율화방안을 내놓은데 이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한일은행, 서울신탁은행, 제일은행, 조흥은행의 정부보유주식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은행을 민영화했다. 그 결과 현대그룹이 한일은행·서울신탁은행·제일은행주식을 삼성그룹이 상업은행·조흥은행주식을, LG그룹(당시 럭키금성그룹)이 제일은행·한일은행·조흥은행주식을, 대우그룹이 제일은행주식을 대규모로 소유하게 되었다.
전두환정권의 은행 민영화조치는 관치금융 청산의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제 정권의 지배개입은 지속되었으며 주요 금융기관이 재벌의 사금고로 전락하여 80년대 재벌의 급속한 경제력성장에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90년대 후반 외환위기시에 외국투기자본이 한국금융을 급속하게 장악하는 통로가 되었다.
다음으로 전두환정권은 경제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전두환정권은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며 경제개방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미국이 신자유주의정책을 강요한 측면과 함께 박정희정권이 추진한 차관도입이 외환위기를 불러오자 외국인직접투자를 통해 외환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두환정권은 1980년 9월 외자도입법을 고쳐 외국인투자업종을 확대하고 투자비율도 제한없이 허용했으며 과실송금의 제한도 완화했다. 이런 정책에 기초해 80년대에 GM, 포드를 포함하여 미국, 일본의 다국적기업이 한국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으며 재벌기업은 이들과 손을 잡고 제조업영역에서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하위파트너의 역할과 함께 기술력을 축적했다.
또한 전두환정권하에서 금융시장, 상품시장의 개방과 함께 농산물시장의 개방으로 한국농업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박정희정권시절부터 꾸준히 진행된 국유기업(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재벌들은 주요 산업, 업종에 진출하며 급속하게 몸집을 키웠다.
70년대 초 박정희정권은 대한항공, 대한통운, 인천제철 등 거대 공기업을 민영화했으며 이를 인수한 한진, 현대 등은 독점시장과 독점이윤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전두환정권하에서는 은행에 대한 민영화를 통해 재벌들이 은행을 사금고화했으며 대한석유공사의 민영화는 SK(당시 선경그룹)의 재계서열을 단숨에 끌어올리게 되었다.
두산그룹은 90년대 후반 한국중공업 민영화를 통해 식음료등 소비재중심 그룹에서 중화학공업분야에 본격 진출하게 되었다.
국민세금으로 기업을 세우고 독점적 시장을 확보한 공기업을 민영화함으로써 재벌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80년대 한국경제에서 특징적인 것은 80년대 중반이후 소위 3저호황(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에 힘입어 자동차, 반도체, 전기전자, 석유화학등 중화학산업영역에서 수출경쟁력을 강화했으며 이들 업종에 진출한 재벌의 경제력이 급속하게 강화되었다.
경제호황과 함께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저임금체계가 혁파되면서 내수, 건설투자와 설비투자가 확대되면서 한국경제의 전반적인 선순환성장구조가 형성되었다.
80년대를 거치면서 수출경쟁력과 독자적인 자본조달능력을 확보한 재벌들은 정권에 대한 일방적 종속에서 벗어나 한국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