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조법 개정… 노동계가 반발하는 이유 짚어보기
고용노동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22일 미비준 상태인 핵심협약 중 3개의 협약-결사의 자유 협약(제87호·제98호, 강제노동 금지 협약(제29호)-의 비준을 외교부에 의뢰한 데 이어, “결사의 자유 협약과 관련한 입법에 대해 각계 의견수렴을 거쳐”, “지난 4월15일 발표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최종 공익위원안을 토대로 정부입법안을 마련했고”, “31일부터 입법을 예고하고, 정기국회 내에 법안을 제출하겠다”는 게 30일 고용노동부가 밝힌 입장이다.
그리고 오늘(31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입법 예고됐다.
‘ILO 핵심협약 즉각 비준’을 요구해왔던 노동계. 민주노총은 정부의 입법안을 두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폭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안”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했고, 한국노총도 “협약비준을 빌미로 한 노동법 개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가 내놓은 법안의 내용이다. 고용노동부는 입법예고에 앞서 30일 보도자료에서 노사정이 참여한 경사노위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의 최종 공익위원안이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면서 우리 노사관계 현실(관행)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균형잡힌 대안”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동계는 정부입법안이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지도 않으며, “노동개악”이라고 주장했다. 경사노위에 참여했던 한국노총은 고용노동부가 “(정부입법안은) 경사노위 논의결과(공익위원안)를 바탕으로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경사노위 논의결과가 결코 아니다”, “경사노위 공익위원안은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해 결코 합의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고 반발했다.
정부가 내놓은 입법안이 ‘국제기준에 역행’하고 ‘노동개악’이라는 노동계의 주장, 그 이유를 살펴보자.
정부의 입법안의 주요내용은 ▲실업자·해고자 노조 가입 ▲노조임원 자격 ▲근로시간면제제도 ▲공무원·교원 노조 가입 범위 확대 ▲단협 유효기간(2년→3년) 확대 ▲사업장 점거 제한 ▲교섭창구단일화제도 등이다.
1) 실업자·해고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도록 개정 2) 노조 임원자격은 자율적으로 결정(규약)하도록 하되, 기업별 노사관계 현실을 고려, 기업별 노조 임원은 재직자로 한정 3) 근로시간면제제도 개선을 통해 국가의 직접적 개입 최소화 4) 퇴직 공무원·교원, 소방공무원, 대학교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5급 이상 공무원의 가입도 허용하되, 직무특성에 따른 제한은 유지 5) 교섭절차와 관련, 개별교섭 동의제도의 문제점 개선을 위하여 사용자가 개별교섭에 동의하는 경우 모든 노조에 대한 성실 교섭 및 차별금지 의무 부여 6)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연장(현행 2년→3년)하고, 사업장 내 생산‧주요 업무 시설의 전부 또는 일부 점거 금지 |
“ILO 핵심협약과 상관없는 노동법 개악 시도”
민주노총은 ▲사업장 점거 제한과 ▲단협 유효기간(2년→3년) 확대에 대해 “ILO 핵심협약과 상관없는 노동법 개악 시도”라고 꼬집었다.
정부입법안엔 “사용자의 시설관리권과 노동조합의 쟁의권 간 조화를 위해 사업장 내 생산·주요 업무시설 등에 대한 전부 또는 일부 점거 금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ILO(국제노동기구)는 쟁의행위 시 직장점거를 정당한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미 현행법(노조법 42조·46조 등)으로 사업장 내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는 다양한 제한을 받고 있고, 사용자가 직장폐쇄를 하면 파업참가 조합원을 사업장으로부터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것까지 가능한 상황”인데도 “여기에 더해 사업장 내 직장점거를 입법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을 추가할 경우 헌법상 보장된 파업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사업장 내 평화로운 피켓팅, 위법한 대체인력 투입 감시활동 등 현행법이 인정하는 보조적 쟁의수단 행사마저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입법안은 평화로운 직장점거를 과도하게 이중·삼중 제한해 국제노동기준에 정면으로 위반할 뿐만 아니라, 사업장 내 평화로운 수단과 방법에 의한 파업조차 금지하겠다는 뜻이다.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확대하는 법안 역시 ‘노동법 개악’이며 ‘국제노동기준’에 위반된다는 주장은 어떤 내용일까?
민주노총은 “일터에서 변화하는 노동자의 이해관계와 요구사항을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필요”한데, “(유효기간 연장은)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이 지나치게 장기화 되어서는 안된다는 국제노동기준에 정면으로 위배”될 뿐만 아니라, 3년이 지나야 단체교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단체교섭권을 과도하게 제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교섭대표노조가 아닌 소수노조의 경우엔, 교섭대표노조가 결정된 후 최소 4년 이상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없게 돼 ‘소수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실질적으로 박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사업장 점거 제한과 ▲단협 유효기간 확대 법안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면서 ILO 핵심협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꼴이라는 게 민주노총의 비판이다.
노동3권 보장한다면서 노동조합 활동 제한?
국제노동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실업자·해고자 노조 가입 ▲노조임원 자격 ▲근로시간면제제도 개선 ▲공무원·교원 노조 가입 범위 확대에 대한 내용 역시 민주노총은 조목조목 비판했다.
실업자·해고자의 노조 가입을 인정했지만, 이들의 조합활동은 ‘사용자의 효율적인 사업운영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라는 제한을 둬 ILO 제87호 협약(결사의 자유) “실업자·해고자도 어떠한 차별 없이 결사의 자유, 조합활동이 보장돼야 한다” 조항을 위반하고 있으며, 기업별 노조의 경우 노조 임원 및 대의원의 자격을 ‘재직자’로 한정한 것 역시 “스스로 정한 규약·규칙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선출할 권리를 가진다”, “사전 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 단체를 설립·가입하고 활동을 조직할 권리를 가진다”는 ILO 제87호 협약에 반하는 내용이다.
노조 전임자 급여지급과 근로시간면제제도 역시 ILO는 ‘국가가 관여하지 말고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입법안엔 ‘근로시간면제제 범위’에 한도를 두고, 한도를 초과하는 내용의 단체협약 또는 사용자의 동의를 무효로 하는 규정을 신설하겠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국가의 직접적 개입 최소화’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여전히 노사 자율이 아닌 ‘국가가 전임자 급여지급 문제에 관여하겠다’는 것이라고 민주노총은 지적했다.
또, 공무원·교원의 노조 가입범위를 확대하며 단결권은 보장했지만 단체교섭권과 쟁의권(단체행동권)의 내용은 빠졌다.
이뿐만 아니다. 특수고용노동자와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노조 할 권리 보장의 내용은 입법안에 누락됐다.
핵심협약 제87호는 “모든 노동자 및 사용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전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 단체설립, 가입 및 활동할 권한이 있다”고 명시돼 있지만, 우리 노조법 2조 1항으로 인해 특수고용노동자는 노동자성이 부정돼 노조설립신고가 계속 반려되고 있고, 노조법 2조 2항은 사내하청, 간접고용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원청의 사용자성을 부정하고 있어 간접고용노동자는 노동3권을 누릴 수 없는 상황이지만 노조법 2조 개정은 정부 입법안에선 담기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또, 최소한의 노동권을 규정하고 있는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는 정부가 “당장 할 수 있고, 해야 할 문제는 방치하고 국회에 법안만 제출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가 대표적이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 직권취소는 ILO가 지속적으로 촉구한 사항이었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전교조는 30일 “과연 정부가 ILO 노동 존중 정신에 대한 이해와 핵심협약 비준의 진정성이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고 개탄했다.
국제기준에 못 미쳐도 갈 길은 간다?
한국노총이 주장하는 “(정부입법안은)경사노위 논의결과가 결코 아니”라는 주장을 고용노동부도 인정하고 있는 눈치다. 고용노동부는 30일 보도자료에서 “노사 및 전문가들은, ILO 핵심협약 비준은 노사 간 갈등이 큰 과제여서, 노사 간에 더 이상의 논의 진전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며 ‘노사의 첨예한 대립 상황임’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책임있는 이행”을 다해야 하고, 정기국회 내 법안제출을 위해선 “시일이 촉박한 점”을 들며 입법을 예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강변했다. 한국노총은 “지금까지 경사노위에 책임을 미루고 수수방관하다가 고작 마련한 것이 공익위원안이란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이렇게 ILO핵심협약 비준과 입법안을 발표한 배경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한-EU(유럽연합) FTA 분쟁’ 상황을 거론했다.
“최근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노동권 보장 문제가 강조되고 있는 추세에서, 유럽연합(EU)이 한-EU FTA에 근거해 우리의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전문가 패널 소집’을 요청하고 있어, 수출비중이 큰 우리나라로서는 EU와의 분쟁이 현재의 경제 불확실성을 더욱 가중시키지 않을까 우려가 큰 상황”으로 “EU와의 FTA 관련한 잠재적 분쟁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30일 “사회적 대화를 통한 노사정 합의가 최선이었겠지만, 더 이상의 합의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법안을 마련했다”며 “노사가 조금씩 양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한-EU(유럽연합) FTA 분쟁 속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이 미흡하다는 지적을 면하고자 노사정이 합의되지 않은 법안을 제출하니 노사가 조금씩 양보해 줬으면 좋겠다”는 것 다름 아니다.
결과적으로 고용노동부는 서두에 ‘노동권 보장 문제가 강조되고 있는 추세’라고 이야기하며 입법 개정안을 내놓았지만 노동계 안에선 정부입법안을 두고 “노동3권 부정”, “노동법 개악”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형국이다.
노동계가 “EU와의 전문가 패널을 앞두고 대놓고 약속을 위반할 테니 무역 보복할 테면 하라는 자세인가”, “전 세계로부터 노동 후진국이라는 손가락질을 감수하면서까지 재벌과 보수 세력 편을 들 각오가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추궁하는 이유다.
☞ 민주노총 <ILO 핵심협약 관련 정부입법안 검토> 전체보기 : https://drive.google.com/file/d/17UkT5DwHOAj27FiCQ2Mx71kTJGhAYfvC/view?usp=sha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