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7)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사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좌익 척결은 실제 1950년 8월이면 모두 마친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만으로도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다. 그럼에도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다시 처단 대상 55만 명을 만들어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실상을 추적해 본다.[편집자]
▲ 1940년대 사진으로 추정되는 오홍탁 선생의 모습이다.

오홍탁(1913년생)은 일제하 소작쟁의 등 농민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하다 1934년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3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당했다. 그는 체포 직전 일제 경찰에 들어가 강진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중이었으므로 현역 경찰이 포함된 항일운동조직이었다며 당시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기도 했다. 전쟁 전까지 전국의 형무소를 전전했으며, 풀려난 뒤 집에 있던 중 한국전쟁이 나자 후퇴하던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 당해 1950년 7월16일 진도 갈매기섬에서 학살당했다.

해남 산이면 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나다

오홍탁은 1913년 8월29일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에서 태어났다. 30마지기의 논을 갖고 있던 중농의 집안이었다. 1927년 해남군 마산공립보통학교 4년을 수료했다. 이후 사립 강습소에 다녔으며 1929년 4월 해남공립농업실습학교에 입학하고 1931년 졸업했다. 아들 오 씨는 이때에도 오홍탁이 독서회를 조직했는데 공개된 활동이어선지 일경의 감시 대상 명부에 올라와 있었다고 한다.

1934년 9월10일자 동아일보에는 <주모자 김홍배와 순사 오홍탁의 활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오홍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생활문제로 방향전환, 순사생활 2개월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 가난한 농가에 태어나서 18세 되던 해에 그곳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원체 집이 가난한 까닭으로 자신이 노동하면서 밤이면 중학강의록이며 기타 서적으로 꾸준히 독서하여 나왔으므로 그의 지식 정도는 외지에 유학하고 있는 연배 동모들에 비하여 못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몇몇 동모들과 같이 노동야학을 설립하여 수 년 동안에 수백 명의 아동을 꾸준히 교양하여 오던 중 전남운동협의회에 가담하여 맹렬히 활동하였으나 생활난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동시에 소화 8년8월에는 순사시험을 치렀던 바 합격되었으므로 5개월 간의 교습을 마치고 12월에 강진경찰서에 근무하는 순사가 되었다. 소화 9년 2월 중순에 그 전에 관계하였던 좌경운동이 발각되어 검거되는 동시에 순사는 해직되었다고 한다.

위 기사는 순사로 지원한 이유를 생활난 때문이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아들 오씨는 실제 중농의 집안이었으므로 기사가 사실과 다르며 이는 희생자를 폄훼하기 위해 일본 경찰이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언론에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이 되려 했던 실질적인 이유는 전남운동협의회 지도부에서 각 지역의 정보를 빨리 얻기 위해 경찰만큼 유리한 직업이 없었으므로 위장취업시켰다는 것이었다.

소작쟁의를 지도하다

1931년 해남공립농업실습학교를 졸업한 뒤 농업에 종사하면서 강습소에 다니게 되었다. 여기에서 교사 박채민의 지도로 여러 권의 좌익 문헌을 읽었으며, 김용섭과 천덕운 등의 교양을 지도하는 독서회를 조직하면서 농촌계몽활동과 소작쟁의에 지도적으로 참여했다.

1932년 11월 상공리 산기슭에서 오임탁, 박한배를 만나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갱생계를 조직하였고 사회주의사상 보급과 동지 양성을 위한 방안을 협의했다. 이는 전남운동협의회 활동의 하나였다.

1933년 4월 상공리에 있는 한 암자에서 오임탁, 오양탁 등 여러 사람과 만나 사회과학 연구모임을 조직했다.

1934년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체포되다

▲ 동아일보(1934. 9.10)는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에 연루된 총지도자 김홍배 선생과 경찰이었던 오홍탁 선생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1933년(소화 8년) 9월 전남순사교습소에 들어가 12월 졸업한 뒤 1934년 1월부터 강진경찰서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나 2월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불과 2개월 남짓 근무하던 중이었다.

오홍탁이 일제 경찰에 들어간 이유는 일제의 비밀정보를 탐지할 목적이었고, 근무지인 강진과 고향인 해남을 오가면서 해남군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산이면 지부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던 중 검거당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체포 후 3년이 되어가는 1936년 12월28일 열린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은 오홍탁에게 ‘치안유지법’과 ‘출판법’을 위반했다며 징역 1년형을 선고했다. 체포된 지 이미 2년10개월을 넘었으므로 재판 선고 당일 출소했다. 미결 구금일수를 365일로 계산하였고, 일제의 기준으로조차 억울한 옥살이에 해당되었던 1년 10개월 동안을 보상해 주지 않았다.

불과 만 23세의 나이였다. 비록 근무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현직 경관으로서 공산주의운동에 참가했다는 것은 경북 예천사건에 이어 두 번째였다고 한다.

석방된 오홍탁은 1936년 석방된 이후 일제의 감시 때문이었는지 눈에 띠는 항일운동에는 더 이상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37년 나주 출신 유양임씨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으나 1946년 5월과 6월 아내와 막내아들을 잃었다. 아들 오씨는 성장기 대부분을 할머니 손에 자랐다고 한다.

전남운동협의회와 오홍탁

전남운동협의회(또는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사건의 피해는 해남, 완도, 진도, 순천 등 전남 10개 시군에 걸쳐 있었다. 사건은 1933년 여름 강진군 병영주재소를 방화한 윤가현을 조사하면서 시작되었고 일제는 이를 계기로 전남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색농민조합 관계자들 모두를 검거할 음모를 꾸몄다.

1933년 농촌은 지난 9월 홍수로 인해 심한 흉작 상태였다.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감면하거나 분할 납부하게 해달라는 주장을 하며 소작쟁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일제가 1932년 전남노동협의회 사건으로 노동대중들의 투쟁을 탄압하자 해남의 김홍배, 완도의 황동윤이 고향으로 돌아와 해남의 오문현, 오홍탁, 완도의 이기홍, 조동선 등과 각각 농민운동을 활성화시키며 적색농민조합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1933년 5월14일 해남 북평면에 있는 절 성도암(成道庵)에 모여 전남운동협의회를 출범시켰다. 이 자리에서 사무부 김홍배, 조직부 오문현, 조사부 황동윤, 구원부 이기홍 등 각 부서와 책임자를 결정했다.

이후 중앙기관지로 <농민투쟁>을 발행했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1933년 10월 창간호, 12월 제2호를 발행하는 데 그쳤다. 1934년 1월 중순 이 때문에 강진에서 회원이 검거되는 모습을 보고 발행을 중단했다고 한다.(동아일보, 1934. 9.10)

농민들의 조직과 투쟁이 준비되던 중 1934년 2월27일 오홍탁 등 현직 경관, 교원, 농촌진흥회장, 구장이 포함된 558명이 검거되고 이중 49명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첫 재판은 검거 2년8개월만인 1936년 9월29일 열렸다. 농민운동가 황동윤은 3년 만에 만나는 동지들끼리 인사라도 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판사가 이를 거절하며 주의하라고 하자 주요 주동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홍배는 큰 소리로 “어서 사건이나 진행하라”고 고함을 쳤다.

일제 경찰은 사건 관련 농민운동에 대해, 이전 조직사건과 달리 ‘전위조직체의 결성에 주력하지 않고 하부조직부터 결성하는 전술과 문서작성을 피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사가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정작 어려움은 조직 전술과 묵비권이 아니라 억지로 사건을 조작하다보니 발생한 문제였을 것이다.

실제 1936년 12월11일 일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재판정에서 변호인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사건을 각 지방에서 경쟁적으로 검거하여 극적 광경을 나타내었다”, “의식 정도가 저급한 피고들을 코민테른과 동일시한다”며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결부시키는 시도는 범죄를 조작하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최종선고는 1936년 12월28일 있었는데 이때는 이미 구금된 지 3년에 다 되어가므로 49명 중 44명이 석방되었고 5명만 남은 형기를 채우게 되었다. 재판과정에서도 별다른 물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불법 구금일수가 500일이 넘었던 것으로 보아 사건 조작이 가능할 때까지 농민운동가들을 잡아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하 1930년대 연구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노동자 농민운동을 선행시키고 그 기초 위에 당을 재건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이로 보아 공산당의 재건운동과는 직접적인 관련 없이 농민들의 생존권에 집중했던 대중투쟁이 일제에 의해 조작·탄압 당했던 대규모 좌익조작사건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1946년 해남 추수봉기와 오홍탁

1945년 8월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해남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오홍탁은 해남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내무과장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직후 인민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해남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 산하 농민위원회에 가입된 농민만 5만 명으로 추산했을 정도였다. 해남 농민위원회의 소작료 불납, 토지 무상분배 주장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탄압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이것이 해를 넘겨 추수봉기로 이어졌다.

1946년 11월 해남에서 미군정의 쌀 공출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추수봉기가 발생했다. 피살된 농민이 54명, 부상 농민 61명, 연행자 357명에 달했을 정도의 격렬한 충돌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의 피해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각 지역에서 파견된 경찰토벌대가 마을을 공격하여 봉기 가담자로 의심되는 농민들을 총살하거나 연행했다.

해방 후에도 산이면 상공리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항일운동을 함께 해온 오홍탁이 오임탁, 오장록과 함께 활동했다. 아들 오원록은 부친 오홍탁이 추수봉기 과정에서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말렸다고 들었으며, 이후 경찰들이 집에 쳐들어와 가구를 부시고 방마다 뒤지면서 방구들을 까내고 처마를 망가트리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여 기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이 먼 산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정확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으나 이 시기에 오홍탁 역시 피신하다 어디선가 체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오씨는 늦은 밤 몰래 집에 들어와 자신의 손을 꼭 쥐어주고 사라지던 부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추수봉기 등 농민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다시 해방된 조국의 법원인 목포지원에서 재판을 받고 공주형무소를 거쳐 김천형무소 재소자가 되어야 했다. 아들 오씨는 달변 웅변가였던 부친이 형무소에 있으면서도 모일 때마다 사상강연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949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폭압에서 살아남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사람들은 해남에서만 6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들 오씨는 전쟁 전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나오면서 신고 있던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을 기억한다고 한다. 석방된 뒤 많은 정치인들이 집을 찾아왔던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석방 시기는 1950년 5월 총선거 직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의 남진이 본격화될 무렵 해남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로 소집되었다. 산이면의 오홍탁도 1950년 7월13일경 해남경찰서로 잡혀갔는데 그가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석방된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가입하고 말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를 끌어가던 경찰들은 심부름을 시키는 등 도망갈 기회를 여러 차례 줬지만 그는 “혼자 살아서 뭐 하겠냐”며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1950년 7월16일 화산면 해창항에서 배에 실려 진도 의신면 구자도리 갈명도(갈매기섬)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경찰의 감시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유족들은 1964년 4월 생존자 박상배의 길 안내를 받아 갈매기섬에 도착했다. 현장 생존자였던 박씨는 산이면 상공리 사람들이 일렬로 총살당했던 장소를 찾았다. 일행은 여기서 8명의 희생자 뼈를 수습한 뒤 고향 마을 선산에 안치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갈매기섬의 유해를 발굴하였는데 땅 속에 매장되지 않은 상태로 심하게 훼손되어 그 상태로 부위나 개체 확인이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유해와 함께 탄피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근거리 확인 사살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출토된 유골은 19구로 모두 남성들이었다고 보고하였다.

▲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진도 갈매기섬에서 발굴된 유골. 출처, 《2008년 유해발굴보고서 1》, 375쪽.

수복 후에도 해남의 피해는 계속되었다

섬이 많은 해남지역은 국군 11사단의 토벌작전 구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주로 경찰의 공격으로 피해를 많이 입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해남경찰서가 해남읍에서 80여 명, 계곡지서 50여 명, 마산지서 60명, 문내면 우수영지서 50여 명, 북평면 남창지서 100여 명, 산이지서 50여 명, 삼산지서 50여 명, 송지면 산정지서 400여 명, 현산지서 50여 명, 화산지서 50여 명, 옥천지서 2명, 화원지서 10여 명을 살해했다.

과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좌익계열의 항일운동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남아 있다. 특히 한국전쟁 전후 학살당한 항일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좌익계열의 항일운동을 인정하기 힘든 것이라기보다 민간인학살 범죄를 부인하려는 국가의 회피 경향이 더 심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오홍탁은 해방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국가보훈처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대규모로 조작된 항일운동사건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으로 3년 가까이 감옥생활한 사실이 명백하다. 이미 검증된 바 있으므로 지체 없이 항일운동가로 서훈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친일파와 전쟁범죄자들이 국가유공자로 남아 있는 우리 사회의 참상을 보면 이 조차 서두를 일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들 오씨는 1964년 갈매기 섬에서 유골을 화장한 일을 후회하고 있다. 죄 지은 자처럼 쫓기듯 독재권력의 눈치를 보며 급하게 처리한 결과 유골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제 추모비라도 하나 만들어 부친의 행적을 정리하는 것이 늙고 병든 아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며 불편한 몸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은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를 다닌 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과 고양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또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등 제노사이드의 공통점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멈춘시간 1950>, <전쟁범죄>,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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