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 빈민스토리(11) 노점상 정책은 어떻게 변해왔나?

1. 가난을 제대로 직시하는 게 필요하다.
 
없는 사람일수록 인정이 넘친다?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가난을 제대로 직시하는 게 필요하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가난한 사람의 실제 모습은 인색하기 쉽다. 다 그렇지 않지만 작은 거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게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일지도 모른다. 가난한 이들을 무조건 미화시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오히려 가난의 문제를 은폐할 여지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가진 거라곤 일할 수 있는 몸뚱아리와 손수레뿐인 노점상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어떤 장소에서 뭘 파느냐에 따라 수입에 큰 영향을 미친다. 법의 외곽에 있기 때문에 누가 어떤 자리를 먼저 차지하느냐에 따라 갈등이 발생하고 이러한 갈등은 오랜 시기 서로의 관계에서 이전투구 하다가 서로 지켜야 할 ‘상도덕과 공존의 룰’이 암묵적으로 만들어지며 점차 상권이 형성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신도시나 새로운 상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과 경쟁은 여전히 첨예하다. 힘 있는 사람의 횡포를 일상적으로 겪기도 하며 상권 만들어지는 초기에 나타나는 역기능을 둘러싼 약점을 스스로 안고 있거나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노점상은 단속에 대응해 맞설 때 뭉치게 된다. 저항할 때 비로소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의 처지를 더욱 이해하게 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계기와 조직의 결집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공동체는 일차로 자신의 생존권서 출발하지만 나아가 사회가 발전하는 연대의 힘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정부 또는 자치단체는 이를 간파하고 노점상 힘을 약화하는 방식으로 대책을 만들어 왔다. 즉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채찍을 휘두르지만, 또 한편 당근을 던져서 길들이는' 방식으로 노점 대책이 전개된다. 이제까지 정부와 관이 추구하는 노점상 정책이 실제 현장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대부분 이들이 반발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2. 노점상 정책은 어떻게 흘러왔나? 

서술했듯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정부의 노점상 정책은 숫자를 줄이는 정책이었다. 중앙정부의 지침에 따라 국제적인 행사 일정에 맞춰 도시미화 작업의 목적으로 대대적인 단속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아 노점상이 조직화 되고 저항이 심해지자 서울시는 단속과 묵인을 반복하는 대책을 전개한다.
1989년 노점상들은 명동성당서 37일간 장기 농성에 들어간다. 농성 기간에 서울 모든 지역을 상대로 집회와 선전전을 활발히 전개해 전국적으로 합법화된 노점상 즉 ‘가로가판대’ 약 3천여 개를 허가받는다.
 
1990년대 초 높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실업률은 노점상이 점차 감소하는 원인이었기에 ‘가로가판대’ 사업과 같은 허가제가 도입되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들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확산과 더불어 IMF 구제 금융은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을 거리에 나앉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이 늘어나자 결국 거리의 노점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1995년 현재의 행정구역이 확정되면서 전국적으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동시에 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그 후 자치단체를 중심으로 공무원이 직접 거리로 나서는 단속보다 민간사설 용역업체를 동원한 폭력적인 단속을 전개하게 된다.
 
2000년대 김대중 정부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을 통해 보편적 복지의 확대가 추진된다. 하지만 경기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도시, 새만금개발 강행, 그리고 부동산규제를 완화하는 방식의 개발을 통한 경기부양책을 전개한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부동산 규제정책이 전개되지만, 도시재정비촉진을 위한 특별법(뉴타운 특별법) 제정이 되었다. 이 시기 한일 월드컵 게임과 더불어 한류 열풍은‘도시경쟁력 강화와 브랜드화를 통해 관광객과 외국 금융자본 유치에 힘쓰게 되고 개발 중심의 도시 정책은 변함없이 이어진다. 노점상에게는‘절대 금지구역과 상대 금지구역’을 설정하거나 주요 상권 또는 역세권 권을 중심으로 노점상을 할 수 없으나 이면도로에서는 묵인하는 방식을 실시한다. 한편 이명박 서울시장은 그의 주력사업인 청계천복원공사를 강행하고, 뉴타운 사업을 적극적 추진하는 등 이때부터 신개발주의가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나간다. 이 시기 대표적 사건은 2002년 8월 서울시 중구 청계천 변에서 장사를 하던 노점상 박봉규 씨가 유서를 남기고 중구청서 분신자살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청계천개발반대 투쟁의 전초전 성격이 컸다. 그 후 서울은 오세훈 시장에 이르러 '도시 디자인화'를 강조하며 서울 곳곳의 노점상은 단속 대상이 된다. 이러한 배경 아래 노점상을 둘러싼 정책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89년 이후 노점상 가로가판대를 전국적으로 약 3천여 개를 설치 운영을 하였다.
둘째, 노점상 포장마차촌과 같은 곳을 운영하였다. 위와 같은 사업들은 국제적인 행사에 맞춰 간헐적으로 추진되었다.
셋째 90년대 이후 취업을 원하는 노점상에 대해선 직업훈련학교와 사설학원 등에서 무료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넷째 노점상 유도구역 혹은 상대 금지구역과 절대 금지구역을 지정하여 잠정적 허용과 상시단속지역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다섯째 전업을 희망하거나 소규모 창업 예정자의 경우 ‘서울신용보증재단’을 통해 신용으로 2천만 원, 담보로 5천만 원까지 창업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여섯째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대책 마련으로 ‘노점상 상담 센터’를 운영하거나 인센티브 평가를 통해 자치구 지도감독을 추진한다. 
 
3.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노점상 정책의 변화
 
오세훈 서울시장의 노점정책은 이제까지의 단속 위주의 방식에서 노점정책의 패러다임이 크게 변하게 된다. 우선 2003년 이후 청계천 복원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 일대 노점상의 저항은 노점상 문제를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단속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여론이 형성된다. 이 시기 협치, 상생 그리고 대화와 소통은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정책적 키워드가 된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들어서고 2007년 ‘디자인 수도로 서울’이 선정되면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설 계획을 내오지만, 이 주변 수많은 노점상은 단체로 조직화 되어있어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단속만으로 거리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없게 만든다.
 
2007년 9월 서울시는 서울의 디자인 거리 10곳을 선정하였으며 2008년 1월 시간제, 규격화 노점 거리 확대추진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서울시 디자인 거리 20곳에 대해 추가로 선정하고 “디자인 서울 거리는 거리의 시설물 설치를 최소화하고 저밀도 고효율의 디자인을 지향하는 ‘비우는 디자인 서울’, 모든 가로시설물이 디자인 가이드라인에 의해 통합 조정되는 ‘통합 디자인 서울’, 건물주와 점포주, 시민,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더불어 디자인하는 서울’ 지속적인 관리로 불법 간판, 불법 노점상 등을 예방하는 ‘지속 가능한 디자인 서울’” 이라는 디자인 서울의 4대 기본전략을 발표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핵심공약인 ‘디자인 서울 정책’이 발표됨과 동시에 바로 기자회견을 개최하여 ‘노점관리대책 추진계획’을 내놓는다. ‘노점 대책 기본방향’에 따르면 지역 실정에 맞게 노점 현안(관리 정비) 해결 창구 개설 운영하고, 신 발생, 기업형 노점 행위 강력정비 그리고 노점 시간제 규격화 시범사업을 통한 단계적 보완추진 그리고 이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라는 방향을 제시한다. 역대 서울시장과 다르게 세부추진계획까지 비교적 상세히 노점상 문제가 서술되어 있고 이후 ‘노점관리대책’의 방향이 된다.
 

▲ 서울시 노점대책 기자설명회와 서울시노점거리 확대 기자설명회 자료

2007년 서울시 노점 정비 추진계획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하철역 및 지하상가 출입구, 횡단보도에서 및 택시 승차대로부터 버스정류장 구역 전후방 3m 구간은 절대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기업형 노점의 기준으로 포장마차 점용면적 3m×2.5m 이상, 리어카 2m×1.5m 이상, 체인점, 종업원 고용노점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2008. 6월 들어 노점 거리 7개 지역(종로, 명동 포함)에 대해 조성을 완료하고 7월 들어서 전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이 발표되었다. 당시 서울시 관계 공무원에 따르면 서울 전역의 노점상 1만 8천여 개를 약 1만여 개 수준으로 줄이면 향후 서울 전역의 노점상에 대한 단속은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노점상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일부를 '노점관리대책'으로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노점상에 대한 기존의 단속 위주의 정책에서 규제를 동반한 허가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러한 정책은 당시 서울연구원의 전신인 시정개발연구원에 소속되어 있던 소위 진보적인 ’도시연구가’의 주도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들은 이후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책 브레인으로 등장하여 노점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노점조례제정을 목표로 노점개선 자율위원회 (이후 상생위원회로 명칭변경)'을 제안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행정관료에 의해 노점상 총량제 다시 말해 노점상 감축정책으로 나아가게 된다. 한편 당시 노점상 단체는 2007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붕어빵을 팔다 단속으로 자살한 고 이근재 열사 투쟁으로 중앙집행부 대부분이 수배 상태에 놓이거나 구속되기에 이른다.
 

▲ 노점관리 개선대책 합의서 (안)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개발사업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등 건설경기 부양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며 이에 편승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디자인 서울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도시 디자인을 위해서는 서울 전역의 노점상이 걸림돌이 되었고 이를 정비하는 문제가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탄압과 단속으로 노점상을 더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2007년 서울시에서 노점상 대책 안을 노점상단체와 사전협의 없이 기습적으로 언론을 통해 발표한다. ‘2007년 동대문 운동장 공원화 사업 및 디자인 플라자’를 계획하고 있던 서울시로써는 단속 위주의 정책보다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노점상을 합리적으로 줄여나가는 정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노점상 당사자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치기보다는 서울시의 일방적인 결정이었기에 여론의 비난에 직면했고 일반 노점상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자 2009년 3월 서울시는 공식적으로 노점상단체 상층을 회유하기 시작한다. 서울시는 밀실 합의를 통해 노점상 간부의 노점상 이기주의와 실리주의적 관점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결국 당시의 노점상단체는 서울시와 함께 '노점관리대책'에 대한 합의문을 작성하고 2009년 하반기까지 서울시 전 지역에 노점상을 강제 이주시킨 거리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내놓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위에서 살펴본 80년대 말 나왔던 대책인 가로가판대 사업 및 90년대 이후 추진되었던 ‘노점상 유도구역과 절대 금지 구역’을 적절히 혼합한 사업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노점상 대책이라는 명분 아래 서울시 관리와 통제지침에서 벗어나는 노점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용역단속 비용의 예산을 들여 대대적인 단속을 병행하였다. 대표적으로 강남 서초구의 노점상 단속은 다른 지역의 단속보다 더욱 격렬하게 전개된다. 당시 노점상단체는 경기도 고양의 이근재 열사 투쟁 이후 탄압에서 회복되기 전이었다. 2009년 용산 참사로 철거민 다섯이 망루 위에서 희생당했으며 철거민 가운데 한 명은 같은 노점상이었으나 도시빈민의 참사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회피했으며 같은 해 간부 임원 선거 시 규약을 어기는 문제로 조직이 분화되었다.

4. 박원순 서울시장의 노점상 정책?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3년 12월부터 '서울시 거리 가게 상생 정책 자문단'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노점상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도시 재생사업과 공간의 역사 문화에 역점을 두는 정책을 추진하며 노점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노점상 조례제정을 목표로 ‘상생위원회’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노점상 조례안은 많은 노점상과 특히 상인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2017년 10월 조례안을 철회하고 대신 기존의 방식을 수정 보완해 ‘노점상 가이드라인’을 제출하여 현재에 이른다.
 
노점상 숫자는 점차 감소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2007년 서울시 노점 대책 기자설명회 자료에 따르면 89년 2만 3천여 개 또는 비공식 통계 약 3만여 개가 넘는 노점상이 있었다. 97년 약 1만 3천여 개까지 감소하였다가 IMF 이후 1만 8천 4백여 개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최근 서울시 건설행정과 그리고 서울시 보도환경 개선과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14년 8,662개, 2016년 7,716개로 집계되고 있다. 2018년 6,669명으로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 한편 노점상 숫자에 대해서는 정의하는 기준을 넓히고, 전통시장 주변 노점상으로까지 확대 적용하면 위의 숫자보다 약 2배 이상 집계되지만, 실제 많은 수의 노점상이 줄어든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노점상이 줄어드는 가장 큰 이유는 장기침체라는 경제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여전히 단속이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며‘노점상 재구성’이라 할 수 있는 기존 노점상은 줄이되 ‘푸드트럭’과 ‘노점상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신규노점상으로 재편하는 것을 정부와 자치단체가 추진하고 있으며, 오세훈 시절부터 시행된 약 10년 이상 시행된 노점상 관리대책이 현장의 노점상을 거리에서 밀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모든 걸 상품으로 전환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돈이 되면 ‘개똥도 상품’으로 만드는 게 이 사회의 특징이다. 무질서하고 보행권을 침해한다는 식의 악의적인 선전도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 관리대상으로 바뀌면서 미화된다. 이렇게 노점 박스 제작 업체와 푸드트럭 제작업체 그리고 노점 물건 공급업체 등등의 상업자본과의 결합해 도시 공간 내 상품으로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 서울시는 하절기 여의도와 청계광장, 그리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그리고 광화문 광장과 뚝섬 등에 집중적으로 야시장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주변 광장은 주말 야시장이 열리고 간혹 공연무대 위에서 다양한 공연이 펼쳐져 축제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곳에서 기존의 노점 물품인 귀걸이·팔찌 등 액세서리부터 향초, 머그잔 등 다양한 제품들을 통해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주변은 대형 쇼핑몰이 몰려 있어 외국인들의 야간 관광 코스로 이어지기도 한다. 청계광장의 야시장은 매월 한 차례 남미, 멕시코, 아프리카 등의 세계 전통 공연이 열리고 기존의 먹거리 음식인 닭꼬치, 떡볶이, 어묵 등과 피자, 샌드위치는 물론 터키의 케밥, 일본의 초밥 또는 다코야키 동남아시아의 국수류, 남미의 타코, 브리토, 나초와 같은 세계 각국의 이색 먹을거리를 판매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서울시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벼룩시장을 홍보하고 명소로 부각시킨 지 오래다. 여의도 둔치의 잔디밭에서는 여름밤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거나 종종 아이돌 가수들의 공연도 만나볼 수 있어 흥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노점상 천국이나 마찬가지여야 하지만 또 다른 한쪽에는 여전히 노점 물건은 내 팽 겨 쳐지고 사람들은 쫓겨나는 이중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위와 같은 야시장은 기존 조직화한 노점상을 단속한 이후 새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오래된 전통 노점상은 단속과 탄압의 대상이 되지만, 자치단체가 관리하는 신흥 노점상은 보호 대상이며 홍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노점상은 무조건 단속의 대상에서 도시 공간 내 틈새시장으로 새롭게 재편되는 과도기에 놓여있다. 

언어란 같은 대상을 어떻게 호명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 ‘노점상’이란 이름은 오래전 이리 쫓기고 내몰리던 ‘잡상인’이라는 단어를 거부하고 단속에 맞서 싸우는 저항의 주체로써 자신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지난 30년 넘는 오랜 시기 조직화 되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노점상이란 단어는 한편 ‘무질서, 불법, 단속, 용역, 시위’ 등 과격한 이미지가 비치기도 한다. 대신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거리 가게, 푸드트럭 또는 야시장’은 세련된 새로운 이미지로 변신하여 소비자의 정서에 인입되어 나간다. 하지만 서울시 주도의 새로운 야시장 또는 푸드트럭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착실한 관리대상이 된다. 모든 허가 기준은 자치단체가 쥐고 있으며 이들은 상업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거나 물건을 공급하는 업체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소위 창조경제의 이름으로 졸속 처리된 ‘푸드트럭’ 합법화는 감당하기 어려운 초기비용과 더불어 지금도 자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면이 존재한다. 게다가 식품위생법 등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법적인 문제가 있다. 노점상의 ‘상품 가치’를 이용해 ‘푸드트럭’을 허가하는 정책을 내고 있지만 정작 혜택을 받는 쪽은 제작업체와 공급업체일 뿐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혜택이 돌아가지 못한 한계가 있다. 게다가 서울시는 한쪽에서 노점상을 단속의 대상으로 또 한쪽에서는 푸드트럭을 운영하며 이용료를 받아 내고 있다. 이처럼 노점상은 포섭과 배제의 이중 잣대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민주노점상전국연합‘노점관리대책’반대를 기치로 단체가 출발하였다. 이들은 위와 같은‘모순’을 여러 차례 경험하였고, 칼의 양면처럼 자칫 독이 되리라 판단하였다. 이 정책이 추진될 당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플라자 건설을 앞두고 진행된 단속과 강남서 벌어진 단속에서 알 수 있듯이 한쪽은 용역 깡패를 고용해 반인권적 철거를 강행하고, 도로교통법, 식품위생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과태료를 부과하며 노점상의 삶을 빼앗아 갔다, 같은 시간 또 다른 한쪽 노점상에게 ‘상생위원회’를 제시하고 실태조사를 통한 이전배치를 약속했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는 비단 노점상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난 10여 년 동안 노점상 관리 정책의 결과는 7천여 개로 대폭 줄어든 노점상의 현실이다. 이는 노점상의 미래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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