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은 또다시 힘(power)의 정치적 희생물이 될 것인가?

그 어떤 상(賞)을 막론하고 상은 사회적 의미로 볼 때는 긍정과 부정을 동시적으로 갖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혐오주의자는 유명 지식인 샤를르 보들레르(1821년 4월9일 - 1867년 8월31일)이다. 그는 상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모든 상은 불행을 초래하는 ‘악마의 발명품’”

뭐 그렇게까지 혐오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보기에 따라서는 상이 인간 및 인간성에 상처를 주며 염치를 무디게 하는 그 무엇이 있을 수는 분명 있다. 

오늘 주제는 그런 상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노벨평화상에 관한 것이다. 이유는 이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이 노벨상이고, 틀리지 않은 인식임도 분명하다. 바로 그런 상에 트럼프를 연관해서 생각한다면 우린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이것이 오늘의 핵심 주제인 것이다. 

알다시피 작년까지 트럼프가 노벨평화상 수상 운운될 때만하더라도 ‘설마’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선무당’에서 현실가능성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말이다. 

근거도 분명하다. 깜짝 DMZ방문;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DMZ방문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동을 통한 ‘사실상’의 종전선언 의미가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하다. 

이를 필자는 <통일뉴스> “북핵 시간이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북미 새로운 관계’ 수립 시간이 빨라진다(20190701)”에서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해내었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둘 다 win-win의 승자이다. 정치적 퍼포먼스(performance)의 승자가 트럼프라면(그렇게 보는 이유가 그에게는 두 가지 이득이 있는데, 하나가 이번 깜짝 만남을 통해 재선에 유리한 정치적 활용이 가능하겠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가 노벨평화상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겠다는 그 정치적 동기 때문이었다), 김정은은 대범함과 인민의 지도자 이미지 승자이다”

실제적으로도 미국 내에서 논쟁은 뜨겁다. 켈리앤 콘웨이 미국 백악관 고문은 7월2일(현지시각) <폭스뉴스>에 출연해 “오바마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트럼프는 정말로 그걸 받는 길을 가고 있다”고 했고, 척 슈머 상원의원(민주당)은 6월 30일(현지시각) ‘판문점 회동’이 “리얼리티 쇼”이자 “미국 외교 정책과 외교사의 최악의 며칠이었다”고 비난한다.(이외에도 여러 정치인과 유명인이 찬반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결과는 분명 올 10월에 나올 것이다. (트럼프의 수상을) 낙관만도 할 수는 없다. 이유는 후보마감이 매년 2월 1일이니, 6월 말에 이뤄진 깜짝 DMZ 방문과 김정은과의 회동은 올 10월에 발표될 노벨평화상 공적으로는 반영될 수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공적이 있으니 연상 작용으로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트펌프는 그렇게 노벨평화상 수상에 한 발짝 분명 다가갔다. 동시에 수상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논쟁 그 자체가 이미 내년 재선에 유리한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이 가능해졌다. 

이렇듯 2019년 노벨평화상은 이미 트럼프의 수상여부와는 상관없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분명 정치적 자산 활용; 재선에 유리한 정치적 고지로 활용하려는 트럼프에게 이 상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는 것이 맞는가하는 그 지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른바 노벨평화상에 대한 정당성과 권위에 관한 문제이다. 즉, 트럼프의 수상 그 자체가 심각한 논란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트럼프의 그 정치적 위세에 눌려 그래야만 한다면(수상해야 한다면) 오바마 수상에 이어 또 한 번 노벨평화상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다음 해 2020년 10월은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도 김정은, 문재인, 트럼프, 이렇게 공동수상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 전제는 ‘북미 새로운 관계’수립과 ‘한반도 비핵화’에 일정한 결말이 나서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냉전질서의 종식과 ‘핵 없는 인류’를 꿈꾸게 해 준 당사자들이어야 한다는 그 전제조건에 한해서 말이다. 

그러면 그 어떤 역대 수상자들보다 영예롭게 인류역사는 이를 기억해낼 것이고, 수상해도 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2019년 트럼프의 수상은 아니다. 이유는 위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그 공적반영 시한이 매년 2월 1일이라고 한다면 올 6월의 그런 깜짝이벤트와 북과의 핵협상 진전은 다음연도 공적 반영물이지 이미 지나가버린 2월 1일까지 반영해야 되는 그런 공적사항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트럼프가 수상된다? 분명 ‘없는’ 공적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결정에 의한 노벨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노벨평화상 역설은 그렇게 하나 더 만들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거(공적)가 매우 분명한 학문분야에서의 노벨상과는 달리 노벨평화상은 자주 자격논란시비를 일으키게 되는데, 주되게는 남성중심으로 수상자가 결정되는 성차별 논란, 사회주의권에서는 단 한 명도 수상하지 못한 점, 시몬 페레스와 같은 호전적인 정치인의 수상과 오직 ‘핵 없는 인류’ 그 한마디로 수상자가 된 오바마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은 평화하면 생각나는 마하트마 간디가 수상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수치를 넘어 치욕과도 같다. 톨스토이도 예외이지 않다. 위대한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던 톨스토이도 노벨평화상 후보에 무려 4번(16번이 추천되었던 노벨문학상도 받지 못했다)이나 추천되었지만 끝내 수상하지 못했고, 후보자격 거론 그 자체가 노벨평화상에 치욕과 수모를 안겨줄 인물들도 다수 추천되었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의 전두환, 시간을 거슬려 올라가면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있다. 

노벨평화상은 이렇듯 많은 착시를 안겨준다. 받아야 될 사람은 못 받고, 받지 않아도 될 사람은 받고, 그렇게 상이 변질되어 와도 노벨평화상은 여전히 이 지구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고, 이 상의 수여자는 온 인류로부터 존경받는 인물로 큰 영예를 안는다. 

그런 상에 만약 201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트럼프가 결정된다면, 아래의 글에서 그 정치적 의미를 한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국가의 부를 소유한 이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사회경제적 질서의 좋은 면처럼 보이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막대한 부를 숨기는데 신경 쓴다. (그들은) 국회의원 및 여론 형성자들과 연대를 맺고 지배자들은 1/5과 99% 사이에 존재하는 착취 시스템을 숨기고 정당화하는 상징과 이미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노벨평화상(강조, 필자)은 이러한 노력에서 조연 역할을 할 것 같다. 시스템을 유지하는 계급의 선전과 이데올로기적 시나리오에서 노벨 평화상은 단지 상이다. 하지만 이미 이름을 떨친 인사의 머리에 성유를 발라 (다시) 저명한 지위에 올리는 것을 즐기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클 파렌티, <커먼드림즈>, 20121018).”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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