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사 3부작 3 - 프랑스 내전>

1848년 혁명 이후 간신히 유럽 대륙을 탈출한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영국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경험을 복기하듯 검토하면서 썼던 역사서와 파리코뮌에 대한 역사서가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이다. 

바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그리고 <혁명과 반혁명: 프랑스 내전> 등 3 작품에서 1848년 혁명과 1871년 파리코뮌을 분석했다. 
이 역사서에서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에서의 계급투쟁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내전>은 1871년 파리코뮌에 대한 평가를 담은 마르크스의 연설문 모음집이다. 코뮌 패배 직후 마르크스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승인을 받아 몇 차례 발표하였다. 

1871년 3월 파리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역사상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수립 선포되었다. 그러나 두 달 조금 넘게 버텼다. 혁명 실패의 결과는 무차별 학살이었다. 

코뮌 실패 후, 많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비관주의와 염세주의로 흉흉했지만 마르크스의 평가는 달랐다. “노동자들의 파리는 코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영광된 선구자로서 영원히 찬양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1851년 프랑스 제정의 황제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내 계급들의 혼란을 이용해 쿠테타로 권력을 탈취했고 그 이후 파리코뮌이 발생하기까지 정기적으로 외국과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영속화하려 했다.

그는 전쟁이란 이름 아래에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탄압하고 착취했으며, 전쟁을 통해 폭력으로 새로운 이권을 독식했기 때문에, 전쟁은 그 자체로 이미 범죄에 다름없었다.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프랑스와 독일(프로이센)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마르크스가 첫 번째 연설문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의 귀추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제2제정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은 이미 파리에서 울려 퍼졌다”라고 주장한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채 두 달도 안 된 9월 2일, 프랑스 군은 스당에서 프로이센 군에게 대패하여 황제 자신이 포로가 되었고 이틀 뒤 프랑스에서 소위 ‘국민 방위 정부’라는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국민 방위 정부’는 공화정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구체제인 오를레앙 왕조로의 복귀를 갈망하는 자들이 주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독일의 지배계급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황제 복귀 가능성을 내비치며 임시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파리로 진격해 오는 프로이센군의 위협에 파리의 노동자계급은 프랑스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자비로 무장한 국민방위대를 조직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국민 방위 정부’는 스스로 말한 국민적 의무와 자신의 계급적 이해 사이에서 재빠르게 후자를 선택하며 ‘국민 배반 정부’로 변절하였고 이듬해 1월 28일 비스마르크와 휴전을 체결하며 내전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노동자계급이 구체제의 기득권자들과 부르주아지들이 원하는 파멸로부터 구원받으려면 정치사회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를 포위한 프로이센군의 대포 앞에서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는 다음의 선언을 발표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배계급의 실패와 반역의 와중에서 공무 집행에 개입함으로써 시국을 수습할 때가 도래하였음을 깨달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스스로를 자기 운명의 주관자로 간주하는 것이 자신의 절박한 과제이며 자신의 절대적 권리임을 깨달았다.”(402쪽)

이로써 파리코뮌이 등장했다. 마르크스가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부이고, 착취자 계급에 대한 생산자계급의 투쟁의 소산이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완수하기 위한,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라고 밝힌 ‘파리코뮌’이 도래한 순간이었다.

파리코뮌은 노동자국가의 중요한 특성들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그 특성들은 다음과 같다.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는 파리 노동자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즉각 계엄 종식을 선언함과 동시에 야전 군사법정을 폐지하고 모든 정치범의 사면을 발표했다. 

그와 동시에 구정부가 갖는 물리력의 요소인 상비군과 경찰을 해체하고 모든 교육 시설을 무상으로 개방했으며 지방 치안판사와 재판관 등 공직의 선출과 소환을 실현하고 코뮌의원을 필두로 모든 공직은 노동자 임금수준의 급여를 받고 수행되도록 했다. 

이렇듯 파리코뮌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철저히 실현하는 정치형태였고, 따라서 “철저히 확장될 수 있는 정치형태”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파리코뮌은 티에르 등 베르사유 정부가 독일의 비스마르크 정부와 교섭으로 돌려받은 40만 군대와 지방 징집병의 탈환작전으로 72일 만에 붕괴하고 만다. 베르사유 정부군은 코뮌 점령 후 코뮌평의회 및 국민방위대 그리고 지지자 약 3만 명을 처형했다.(코뮌 집권시기 처형자 수십 명, 파리 전투시 정부군 피해자 1천여 명)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부르주아지의 관료적 국가 기구와 낡은 군대 및 경찰, 그리고 행정 및 사법 기관을 폐지한 것은 파리코뮌의 위대한 역사적 행위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모든 생산 대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은 부르주아지의 국가 기구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파리코뮌이 실천에 옮겼다고 찬양하였다. 

마르크르스를 계승하는 사회주의 성향의 학자와 정치가들은 <프랑스 내전>을 통해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국가를 사회주의적 목적에 이용할 수 있다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깨뜨렸다고 평가한다.

마르크스가 설명한 대로 부르주아 국가는, 그것이 군주정이든 보나파르트 체제건 혹은 의회주의적 공화정이든 간에, 그 착취적 본질은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병창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에서 중요하게 다룬 무상교육, 상비군 폐지와 민중의 군대, 관료조직 해체, 노동자 직접경영, 공직자 선출과 소환, 코뮌 의회의 집행기관적 성격, 공직자의 노동자 임금 수준 등은 1917년 레닌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노동자 국가를 구상하는데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연보]

<제3공화정-파리코뮌>

1870년 9월 4일 파리의 시위, 공화정 선포, 파리 20개구 중앙위원회 대표들 선거, 경찰국가폐지, 전프랑스 인민의 무장요구, 파리에서 선출된 입법의원들 국민방위정부를 만들고 트로쉬를 수반으로 선출
9월 18일 독일군의 파리 공방전 시작
9월 28일 바쿠닌의 리용봉기 실패
10월 30일 티에르 유럽황실에 전쟁조정을 의뢰하는 순회여행에서 귀국
10월 31일 ‘국민방위정부’를 타도하려는 파리 민중봉기 와해
11월 3일 파리의 인민투표(국민방위정부 승인)
11월 5일 파리의 구역장과 부구역장의 선거(20명중 12명 정부파, 8명 꼬뮌파)
1871년 1월 5일 파리에 대한 포격 개시
1월 19일 뜨로쉬의 비장바르 출격
1월 21일 뜨로쉬 파면
1월 22일 국민방위군 대대들의 무장시위-뜨로쉬의 후임자 비누아에 의해서 진압
1월 23일 클럽금지, 17개 신문정간
1월 28일 국민방위정부, 파리항복협정 조인, 휴전
2월 1일 파리의 휴전저항 시도 실패
2월 8일 국민의회 선거(대다수 정통왕조파, 파리의 43명 중 극우파 6명)
2월 15일 국민의회 개최
2월 17일 띠에르, 의회에서 행정수반으로 선출됨
3월 15일 국민 방위군 공화연맹 중앙위원회가 정식으로 성립
3월 16일 띠에르 정부의 파리이전
3월 18일 띠에르와 비누아, 파리의 대포탈취 기도, 실패, 정부 베르사이유로 도주, 파리봉기

<파리꼬뮌>

3월 19일 중앙위원회, 꼬뮌의 선거 고시
3월 26일 파리코뮌 선거(중앙위원회파 65명, 구역장파 19명)
3월 27일 파리코뮌의 선언
3월 29일 꼬뮌 10개 의원회 설치/ 집세면제 포고령, 상비군폐지, 공무원 연봉 상항선 포고령
4월 2일 베르사이유 군과 전투 개시
4월 10일 부인들을 위한 시영 작업장의 개설
4월 12일 지불기한에 관한 포고, 일체의 채무소송 정지
4월 13일 방돔광장 전승기념탑 파괴에 관한 포고령
4월 16일 버려진 공장을 노동자의 손으로 조업 재개시키는 건에 관한 포고령
4월 18일 상업어음의 지불기한에 관한 포고령, 의학교의 개조
4월 19일 ‘프랑스 민중에게’ 선언으로 꼬뮌의 강령 제시
4월 22일 혁명재판소 설치
4월 27일 노동자 벌금형 금지 포고령
4월 28일 빵공장의 노동자 야업금지령, 비종교적 초등교육과 직업교육을 위한 위원회 구성, 농민에게 보내는 선언채택.
4월 30일 띠에르, 지방장치선거 실시
5월 1일 베르사이유군의 파리 공격 실시
5월 4일 배반 때문에 물랑사께의 방벽이 베르사이유군의 수중에 덜어짐
5월 8일 띠에르, 파리 시민에게 최후 통첩
5월 10일 띠에르,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과 강화조약 조인(채무기간 단축, 독일군 주둔인정, 프랑스 정부군 포로 이송) 의회 인준
5월 13일 베르사이유군 방브 요새 점령
5월 21일 베르사이유군 피리 진입
5월 22일 베르사이유군 샹제리제 점령, 몽마르트 점령, 파리 중앙부와 라땡 구역 점령
5월 27일 뻬르 라 세즈 묘지의 전투, 사로잡힌 꼬뮌 전사, ‘연맹병의 벽’ 앞에서 대량학살됨(6월초까지 계속)
5월 28일 제11구와 제12구의 최후의 바리케이트에서 오후 2시 꼬뮌파의 최후 총성이 멎음.
5월 29일 꼬뮌측의 전사자와 전투 후에 총살된 자 약 3만여 명, 베르사이유군 전사자 877면, 행방불명자 183명, 베르사이유 정부의 군법 회의는 1874년 말까지 80명의 아동, 132명의 부인을 포함한 피고인들에게 사형 270명(부인 8명), 무기징역 410명(부인 29명), 요새유형 4016명, 보통유형 3507명, 금고 및 징역 1,333명, 국외추방 322명, 구금 8407명의 형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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