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최인기 빈민스토리
열사라는 칭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열사 투쟁의 의의최인기 빈민스토리(10)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6.19 19:50
  • 댓글 0
▲ 추모제 참석한 노점상

1. 추모(追慕)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기록한다는 것이다. 기록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 문제는 반복된다. 책임을 묻지 않게 되고,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악순환이 반복된다.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추모연대" 관계자는 추모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추(追)’라는 말은 추억하고 기린다는 뜻보다 ‘따른다’라는 실천적인 뜻에 훨씬 가까운 말이다. ‘모(慕)’라는 말은 마음과 정신으로 사모한다는 뜻이다.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고 계승하는 일이란 이들이 생전에 추구했던 사상과 실천을 남은 자들이 마음과 정신으로 따르는 일이 된다. 이 밖에도 열사에 대한 사전적 의미와 정의를 찾는다면 의로운 뜻을 가지고 이를 지키기 위해 굳게 싸우다 가신 분들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은 시대의 정신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인권에서도 사회권이 중요하듯이 노점상 투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분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지금껏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를 개별적이거나 우발적인 사건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록을 통해서 잊힌 이야기를 들춰내고 다시 세상에 던지는 이유는 우발적인 사건처럼 보이는 이야기의 숨겨진 이면을 통해 새롭게 추모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함이다.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후 그 이듬해 1996년 부산의 해운대 해수욕장 근처에서 노점상을 하던 장애인 노점상 이동재 씨 분신 사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반신 마비로 인해 휠체어를 이용해 살아가던 그의 분신 소식은 인터넷 시대가 시작되면서 과거 언론과 신문 기사에만 의존했던 소식들을 빠르게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노점상 단체의 활동가들은 부산으로 급히 파견되어 이 사건에 개입했다. 이를 계기로 부산지역의 해운대 해수욕장과 광안리 해수욕장 그리고 부산 사상과 부산역 등을 중심으로 조직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이후 울산 대구 등 영남권 조직을 확대해 나간다.

거리에서 쓰러지고 저항하다 유명을 달리하거나 상처를 당하는 사람은 다음 해 1997년 평택의 노점상 양승진 열사, 그리고 1998년 종로 5가의 장애인 노점상 전창옥 씨, 2002년 역시 단속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은 부산의 장애인 노점상 하재명 씨로 이어진다. 소위 군부독재 정권이 물러나도 여전히 노점상 생존권은 변하지 않았음을 이 사건들을 통해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특정 이슈를 둘러싸고 희생되거나 유명을 달리할 경우 저항의 과정은 보통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저항 주체의 역량이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역부족한 경우로, 저항이 폭발하지 않고 열사 투쟁 그 자체로 잠잠해지는 경우다. 양승진 씨는 경찰의 회유로 가족이 장례식을 서둘러 치르게 된다. 종로 5가 전창옥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건들이 개별적, 우발적으로 발생하여 저항 주체와 결합하지 못하고 소멸하는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노점상 조직은 열사가 돌아가시는 사건을 계기로 지속적이고 완강한 주체들을 형성하고 조직을 발전시켜 나갔다. 장애인 노점상 하재명 씨는 부산지역의 활동가들이 긴밀하게 결합하여 저항이 확대되는 경우였다. 그리고 이러한 탄압과 이에 대한 투쟁은 자연스레 민주화운동 과정과 결합하여 부당한 체제나 국가, 정부에 대항하는 조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대전의 장애인 노점상 윤창영 열사와 2002년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여성 노점상 최옥란 열사다.

2. 윤창영 열사 이야기

오래전 대전역 근처의 가락국수 포장마차는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고 출출한 배를 채우던 곳이었다. 오래전 대전역 광장을 가로질러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웅크려 장사하던 장애인 한 분이 계셨다. 3살 때부터 자신의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왼쪽 다리와 양손이 반쯤 마비된 2급 장애인으로 언어마저도 매끄럽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윤창영 씨로 대전역 광장을 배회하던 노숙자들에게는 큰형님으로 불렸다. 윤창영 씨는 매주 일요일 물을 끓여서 주변 노숙자에게 컵라면을 나누어주고 틈틈이 용돈까지 보태주었다. 불우한 그가 또 다른 불우한 이웃을 도왔던 셈이다. 그는 어눌한 목소리로 허리띠, 라이터와 같은 물건들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가장 밑바닥 삶을 온몸으로 기어 하루하루 버텨냈다. 그러던 1999년 7월 7일 오전 9시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노점 물품을 구청 직원들이 압수해 갔다. 이미 그 전날에도 한 차례 물품을 단속받은 상태였다. 대전역 근처에서 장애인으로서 장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려 연일 그에게만 계속되던 소위 "표적 단속"이었다. 그는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 평소 거칠게 구청에 저항하고 항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창영 씨는 동구청을 방문하여 내 물건을 돌려 달라 애원하자 구청 직원과 용역반은 비웃는 눈초리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다. 어찌 보면 사람은 누구나 절박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처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만 이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격분한 윤창영 씨는 온몸에 불을 붙였다. 온몸에 김이 모락모락 나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장애인의 생계를 보장하라! 장애인도 노점상도 인간이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라고 외치며 쓰러졌다. 분신 직후 대전의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해 서울의 한강 성심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창영아 제발 죽지만 마라!” 가족들은 절규하며 며칠 밤을 새웠다. 윤창영 씨는 임종하기 직전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집에 가서 죽고 싶다. 어머니 곁에 묻어달라.”는 짧은 유언을 남기고 7월 10일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우리는 노점상 단체 의장과 한강성심병원에서 임종을 지켜봤다. 이미 대전에서 올라온 경찰과 몇몇 공무원으로 보이는 직원들이 유가족과 장례 문제를 급히 협의하기 시작했다. 시신은 다시 대전으로 옮겨졌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어둑어둑 해 질 무렵 대전 충남대 병원 장례식장 주변에 윤창영의 분신자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포장마차 하는 아주머니, 잔업을 마치고 온 노동자, 그리고 청년 학생, 한쪽 팔이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목발을 짚은 사람, 그리고 거리에서 아무렇게 뒹굴던 노숙자까지 하나둘 모여들었다.

노점상단체는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에 연락을 취해 ‘비상대책위’를 서둘러 꾸렸다. 대자보를 붙이고, 현장에 모인 학생과 청년들을 모아 사수대를 조직했다. 일부는 모금함을 들고 거리 선전전을 펼쳤다. 그리고 7월 15일 대전역 광장에 모여 노점상 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대전지역은 노점상 단체가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노점상을 상대로 유인물을 돌려 윤창영 씨의 분신 사망 소식을 전달하고 자발적 참여를 호소했다. 유인물을 받아 든 대전역 주변에서 노점을 하는 김지현 씨는 “구청 직원이 몰려와서 물건을 실었습니다. 울면서 봐달라고 하자 햇빛도 못 보게 징역을 보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지금도 저의 물건은 강제로 빼앗겨 구청에 있습니다. 이제 곧 장마고 IMF 이후 장사도 안 되는데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노점상 결의대회에 참석한 시위대를 대상으로 경찰은 집시법을 들먹이며 거리진출을 막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곤봉과 함께 사람들은 넘어지고, 옷이 찢기고, 신발이 벗겨졌다.

하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영안실을 지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특히 8.15대 회를 앞두고 전국을 순회하던 대학생 통일선봉대가 합류하자 집회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대전 동구청에서는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둘러 사과를 하고 ‘비상대책위’와 함께 대책 마련에 들어가 유가족과 합의에 이른다.

마침내 7월 20일 윤창영 열사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행렬은 고인의 영결식 장소인 광장을 벗어나 동구청과 대전 시청까지 행진했다. 이날은 노점상이 관의 눈치나 보면서 쫓겨나는 그런 날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며 대전지역 노점상들이 장례행렬에 선두에 섰다. 검은 만장이 물결을 이루며 대전 거리를 뒤덮고 출렁였다. 동양백화점을 지나 도청과 대전 시청 앞에 다다르자 시위대에 의해 현관 유리창이 박살 나기도 했다. 격렬해진 노점상의 분노를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윤창영 열사의 혼이 담긴 꽃상여를 실은 영구차는 그의 고향인 금강의 묘역으로 향했다. 대전의 장애인 노점상 윤창영 열사의 성과로 전국철거민연합과 함께 가난한 이들의 연대체 ‘전국빈민연합’을 다시 결성하기에 이른다. 1999년 뜨거웠던 여름날의 이야기다.

3. 최옥란 열사 이야기

서른일곱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장애인 노점상 최옥란 열사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따라 그 죽음은 정의를 세우는 소중한 역사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열사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사회구조를 이해하고 더불어 모순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처지와 실정에 차이가 있겠으나 이들이 살았던 삶처럼 실천하는 것이 박제된 삶이 아닐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때문에 이들의 삶과 정체성을 끊임없이 조명하고 이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최옥란열사 10주기

그런 측면에서 최옥란 열사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옥란 씨는 1998년 청계천 8가에서 장난감과 치약, 구제 옷 등을 팔던 노점상이었다. 최정환 열사 투쟁 이후 장애인과 노점상이 함께 만든 ‘장애인 자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자 여기에 합류했다. 함께 장사하던 조성남 씨에 따르면 “옥란 씨도 노점상 자리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누구도 그녀의 삶의 의지를 쉽게 꺽진 못했지요.” 전경과 단속반도 그녀를 피해갔고, 경찰서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고 회상한다.

최옥란 열사를 이야기 회상할 때 장애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이혼 이후 아들 준우를 키울 수도 없었다. 전 남편의 위자료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다 아들조차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1999년 재판장에게 면접 교섭권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장문의 글을 쓴다. “…재판장님 저의 간절한 소망을 이해하시고 꼭 나의 아들 준우를 만나게 해주세요. 냉정하게 판단해 주세요. 지금 저의 형편이 어렵습니다. 노점상을 하기에는 너무 체력적으로 힘이 듭니다. 남편의 형편도 알지만 나보다 나은 조건입니다. 나머지 주어진 삷을 좌절하지 않고 살 수 있게끔 희망을 주세요…”

그녀의 건강도 그를 괴롭히는 요인이었다. 1999년 12월 서울 동대문구의 한 병원에서 자궁 원추 절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병원의 의료과실로 의료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건대 민중병원 진료 기록에 따르면 머리에 혹이 생겨 약 6개월가량 약물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 많은 장애인이 ‘이동권’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는데 옥란씨는 이 과정에서 전경과의 충돌로 쓰러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병원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2001년 10월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생활 유지능력이 없거나 어려운 사람에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 아래 필요한 급여 등을 제공하여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신설된 법률이다. 기존의 복지제도를 혁신했다는 정책은 정작 옥란 씨의 형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수급자가 되기 위한 소득의 기준선은 33만원이었다. 그녀는 기초 생활 보장제도가 시행되면서 수급자가 되었지만 약간의 수입원이었던 노점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최저생계비를 초과해 수급비와 의료비 그리고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의료보장마저 지원받을 수 없었다.

2001년 12월 3일, 뇌성마비 1급 중증 여성장애인 최옥란 열사는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해 명동성당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가난한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된 제도가 생계를 위협하는 이상한 제도가 되었다. 노점에서 버는 돈이 추정소득으로 잡혀 수급권자에서 탈락할 처지가 되자 최저생계비의 현실을 알리고자 일주일간 명동성당에서 텐트 농성을 하게 된다.

“당신도 장애인이면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이 저의 작은 꿈들을 다 잃게 했습니다. 노동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그나마 노점 해서 돈을 벌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을 찾으려고 힘이 들어도 참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장사도 못 하게 해 이제는 더 살 수 없는 심정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구걸하더라도 치사해서 수급권을 못 받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국무총리에게 26만 원을 반납하러 갑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말로 저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며 26만 원을 반납하기에 이른다.

2001년 어머니에게도 남긴 유서에 따르면 “엄마, 엄마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그리고 용서해 주세요. 힘이 많이 들어요.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나를 죽음으로 가게끔 하는군요. 엄마, 엄마. 목이 메어 글 쓸 수가 없네요. 엄마. 우리 좋은 세상에서 만나요. 언니 오빠 동생 모두에게 미안해.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적혀 있다.1)
주1) 시대를 울린 여자 최옥란 평전 seoul post 230쪽

약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 달 생계급여를 받으며 생활하던 중 수급권마저 빼앗긴 뇌성마비 중증 장애 여성의 어눌한 외침은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002년 2월 아직 봄이 오기 전 최옥란 씨는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져 치료를 받던 중 3월 26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3월이면 아직 추운 날씨였다. 겨울이 가고 봄은 아무렇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한 사람을 보고서야 서럽게 봄을 맞이했다.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정책과 기초생활보호법이 실시된 이후 이 법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보장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을 고착화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려낸 투쟁이었다.

아쉽게도 당시 노점상 단체는 최옥란 열사가 유명을 달리한 그 시간 인도에서 열린 ‘국제노점상연합’ 창립을 앞두고 국제회의 일정으로 적극적인 참석을 하지 못했다. 유명을 달리한 이후에도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따른 적극적인 공감이 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을 또 한 사람 장애인의 슬픔 소식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 후 반빈곤연대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운동적 각성이 있었다. 최옥란 열사의 장례식에 참여했던 손을 잡고 새로운 연대기구 결성을 도모하기 시작하고 그 후 "빈곤사회연대"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최옥란“ 이름 석 자는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이름이 되었다. 어떤 이름은 이렇게 죽어서도 투쟁한다.

4. 열사라는 칭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누구나 경험했을 테지만 작은 성냥불에 손끝을 데어도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일시적인 아픔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이 흐른 뒤 일그러진 형태로 그리고 후유증으로 이어진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노점상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저항은 자신의 몸에 불을 댕긴다는 것이고 그 고통은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전이되어 두고두고 남는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 죽음의 행렬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이 죽음의 공통점은 장애인으로서 노점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주기적으로 2~3년에 한 번씩 열사 투쟁을 치렀다.

2005년 8월 국회 앞마당에서 분신한 장애인 노점상이 있었다.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서 온몸이 일그러진 채 응급실에 누워있는 장애인 노점상. 그의 이름은 황효선 씨다. 55세로 한국장애인문화협회 부천 이동상담소 소장이었다. 기자들은 연신 분신한 이유에 관해서 묻고 사진을 찍었다. 그동안 죽지 못해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분신이 있기 한 달 전에도 이미 부천 북부역에서는 장애인 노점상 부부가 동반 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 7월 10일 새벽 3시경 쇠망치와 파이프로 무장한 150여 명의 용역반이 부천역으로 들이닥쳤다. 새벽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포장마차를 상대로 무차별 단속과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노점상들은 아스팔트 위로 나동그라졌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후 부천역 광장 한쪽에서 자신의 승용차를 걸어 잠그고 언어장애인 노점상 부부가 석유를 부어 분신을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검은 연기와 불이 활활 타오르자 새벽에 행인이 차 문을 부수고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2006년 6월 20일, 인천시 부평구에서 지체 장애 2급인 장애인 노점상 주수길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평공원 야시장 내 단속과정에서 난투극 끝에 사람이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오후 3시경 250여 명의 용역이 부평공원으로 몰려들었다. 난투극 현장은 부평 경찰관이 현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30분 이상 진행되었고, 약 20여 개의 노점상을 철거하는 과정이었다. 이날 용역 가운데 장애인 용역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애인 노점상을 장애인 용역이 단속하는 것이다. 목격자에 의하면 고 주수길 씨는 ‘맥주병에 맞아 힘없이 쓰러졌다’고 진술하고 있다. 주수길 씨는 119에 의해 부평구청 맞은편 세림병원에 실려 갔지만, 병원에 사람들이 많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병원 측에서는 사망 시간을 대집행이 일어난 날 저녁 시간으로 추정하였으며 뇌진탕 증세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용역과의 대치과정 중 싸움이 그 원인이었다.

지자체는 장애인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을 용역으로 고용하였다. 그들의 신체적인 장애를 이용하여 길거리로 나와 장사 할 수밖에 없는 즉 노점상을 단속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는 결국 저항하는 한 장애인을 죽음의 길로 몰게 한 것이다. 빈곤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노점상을 하다 숨진 장애인이나 어쩔 수 없이 단속반으로 나선 장애인이나 공통으로 사회적 폭력의 희생자였다. 주수길 씨의 사망 사건은 그의 누나가 대표로 경찰 입회 아래 장례식을 치르기로 전격 합의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투쟁은 서둘러 끝난다. 이 시기 서울은 재개발 재건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뉴타운 사업이 현란하게 전개되었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골목길은 헐리고 자고 나면 새 빌딩과 아파트로 빼곡히 들어찼다. 누군가는 들어오고 또 그만큼 누군가는 어디론가 떠났다. 서울 사람들은 고향이 없다는 이야기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한때 서울 어딘가에 집 한 채 갖고 있던 사람조차 보금자리에서 내몰릴 위협에 처했다. 개발은 집을 갖고 있던 사람이나 집 없이 세 들어 사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삶의 기초를 위협했다.

5. 글을 마치며

자신을 버리고 전체를 살리며 생존권을 지켰던 사람들의 삶은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노점상 이야기를 다루는 데도 자의든 타이든 유명을 달리한 사람의 삶을 살펴보고 이들 삶에 의미를 제대로 조명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도리라 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합법적 공간이 확대되면서 열사의 죽음을 둘러싼 진상이 부분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명예회복과 정신계승사업도 제도권 차원에서 일정 정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덕인 열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 근본적 문제 해결이 안 된 부분도 있다. 국가폭력이라 할 수 있는 용역 깡패에 의한 폭력적인 개발과 단속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빈민운동진영은 종종 빈민 열사 추모제 개최를 한 바 있으나 지속해서 이어지지는 못했다. 최근 들어서 개별 열사 추모 행사나 묘역을 방문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몇몇 유가족을 제외하고 관계도 점차 단절되고 있다. ‘열사 추모사업’의 복원과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족과의 상호소통이 지속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 과정을 연계한 프로그램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개별화되지 않고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계승사업은 시기마다 다양한 빈민, 반빈곤 의제들의 흐름과 결합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려는 연장선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과거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삶에 역동적 의미를 살펴보고 "점“ 하나하나가 모여 선으로 이어지듯 민주주의의 개념을 사회권 일반으로 확대하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혹은 수많은 의문사’에 대한 올바른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으로 나가야 한다. 열사는 삶의 길을 찾던 누군가에게 희생으로 다가간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길을 닦고 또 그 길을 걷는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news.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