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사 3부작 1 : 1848년부터 19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칼 마르크스 저, 프리드리히 엥겔스 편집, 1895년/2017년, 소나무

칼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와 철학의 발전에서 큰 획을 그은 사상가이다. 그의 정치철학과 역사철학 그리고 경제학은 인류가 신(종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존재를 깨달은 이후 세상에 대한 인류의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은 ‘계급투쟁으로서의 역사철학’을 의미한다. 인류의 역사(발전)이 신의 권능이나 영웅(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계급투쟁의 전개’로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를 신의 권능이나 개인의 ‘힘’이 아닌 (사회경제적인) 계급간의 투쟁의 과정으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1848년 2월 혁명에부터 1891년 나폴레옹 3세의 쿠테타에 이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 참여했던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은 1848년 혁명 이후 간신히 유럽대륙을 탈출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국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경험을 복기하듯 검토하면서 썼던 여러 역사서들 중 하나이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더불어 <루이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그리고 <혁명과 반혁명: 프랑스 내전> 등 세 개의 저술에서 1848년 혁명을 분석했다. 세 종의 역사서를 역자들이 엮어서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을 출간한 셈이다.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을 필자에게 강연한 이병창 교수는, (이론적으로 본다면) 마르크스가 이미 1846년 발간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역사 유물론의 기본적 원리를 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 원리는 어쩌면 철학적인 반성 끝에 나온 개념적인 원리이고 역사에 대한 대강의 스케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이론적 원리를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에서 겪은 실제 역사적 투쟁 속에서 재구성한 결과, 마르크는 마침내 ‘역사의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을 얻게 된 것이다.

엥겔스는 서문에서 <1848년부터 19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의 의미를,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견지에서 현대사의 한 토막을 주어진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설명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라고 설명한다. 혁명을 전후한 정치적 사건들을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요인들의 작용과 이에 다른 계급들의 갈등으로 소급하여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토대와 상부 구조의 연관, 사회생활에서 경제적 토대의 규정적 역할, 계급투쟁과 당파 투쟁이 지니는 의미, 역사에서 혁명적 변혁이 차지하는 위치와 인민 대중의 결정적 역할, 역사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 이념의 역할 등에 관한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원칙들이 이 저작에서 구체적이고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 있다.

1830년 7월 왕정에 대한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금융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대증권업자, 철도왕, 탄광/철광/삼림의 소유자, 일부 대지주가 주도하는 7월 왕정(오를레앙파)이 탄생하였고, 산업 부르주아지는 제도권 야당의 일부를 형성했다. 하지만 7월 왕정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금융 부르주아지의 사리사욕이 넘쳐 나고 흉작이 이어졌다. 

“두 당파는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로 정통왕조파는 부르봉의 “정통적” 군주정을 지지하는 자들이다. 부르봉 왕조는 1789년 혁명 때까지 그리고 왕정복고기(1815~30)동안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오를레앙파는 오를레앙 왕조의 지지자들로 1830년 7월 혁명기에 집권하였으며, 1848년 혁명에 의해 타도되었다. 정통왕조파는 대지주의 이익을, 오를레앙파는 은행가들과 금융귀족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1840년대 영국에서 상업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국내에서 물가가 폭등하자 프랑스 인민은 “위대한 혁명적 열정과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1848년 2월 금융 귀족과 왕족들에 맞서 부르주아지, 농민, 노동자 그리고 자영업자들이 힘을 합쳐 봉기했다. 이에 힘입은 2월의 바리케이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바리케이드의 ‘동지’들은 파리시의 모든 벽에 “프랑스 공화국! 자유, 평등, 박애!”라는 문구를 눈부시게 수놓는 것으로 혁명의 완수를 선언한다. 공화정 수립과 더불어 혁명의 결과로 노동자들은 “노동의 권리의 선언”과 “국민작업장”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국민작업장은 공황과 혁명 기간에 실업과 기근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노동 소득을 창출한 기구이다. 

"노동자들은 부르조아지와 공동으로 2월 혁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임시정부 자체내에 부르조아지의 다수파와 나란히 노동자 한 사람을 입각시켰듯이 부르조아지와 나란히 자기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 곁에서 자신들이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꼭 같이, 다른 부르조아 국가들이 존재하더라도 프랑스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자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공화국의 모토를 공존공영으로 삼았지만, 그들의 박애는 부르조아들 이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가 융화되었을 때만 가능했다. ‘노동의 권리’, ‘별도의 노동부!’, ‘노동을 조직하라!’라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외침이 부르주아지가 만들고자 했던 공화국에서 허용할 수 없는 것임이 판명되자 부르주아지는 공화국이 ‘자신들의 것’임을 선포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질서’를 외치며 국민작업장을 폐지하고, 새로운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기동대를 설립하는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응답했다.

하지만 두 계급의 날카로운 대립을 당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명료하게 인식할 수 없었다. 1848년 5월 4일 직접 보통 선거로 선출된 국민의회, 그리고 그들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 즉 보통 선거권은 “프랑스인 전체를, 아니 적어도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을 동일한 이해관계와 동일한 견해 등을 가진 공민”으로 보이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5월 제헌국민의회 선거에서 부르주아 공화파들이 승리했다. 정통 왕조파와 오를레앙파는 부르주아 공화파의 가면을 쓰고 처신해야 했고, 프롤레타리아트와 프티 부르주아는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는 관념이나 공상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아직 부르주아 공화국을 극복할 능력이 없었으며 실제로 행동하게 되었을 때 모든 곳에서 부르주아 공화정에 봉사하는 행동을 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보증된 약속이 새 공화국에게는 유지할 수 없는 위험이 되었으며 임시정부는 존립 기간 내내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하였다.”

박애, 공존공영, 보통선거권을 통하여 가려져 있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두 계급의 날카로운 대립은 ‘1848년 6월 22일 노동자들의 봉기’를 통해 드러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회를 가르고 있는 두 계급 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대전투의 날이 벌어진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프티부르주아지와 연대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을 진압했다.

2월을 수놓은 ‘박애’의 외침 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계급관계는 단지 공상속에서만이 그랬던 것이었다. 그날의 혁명은 계급대립이 감춰졌기에 아름다웠던 혁명이었다. 하지만 사실 2월 이후의 “박애의 진정하고 순수한 산문적 표현은 내전, 그것도 가장 가공할 형태의 내전인 자본과 노동간의 전쟁”이었으며, 부르주아지의 빠리가 2월의 혁명과 함께 빛나던 순간, 그들이 ‘추악한 혁명’이라고 부른 6월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빠리는 불타고 피흘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결국 1848년 2월 혁명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쟁취한 것은 해방이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적 해방을 위한 투쟁의 진지만을 얻은 것이다. 바로 부르주아지의 공화국이라는 투쟁의 진지 말이다. 1848년 6월 혁명을 통하여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사실을 깨닫고, 대담하고도 혁명적인 투쟁 구호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부르주아지 타도! 노동자 계급의 독재!”

1848년 6월 프롤레타리아트의 불만과 혁명을 제압한 부르주아지의 임시정부는 프티 부르주아지의와의 타협을 거부했다. 중소 자영업자들이 요구한 부채탕감은 거부되었고 자영업자들은 줄줄이 파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임시정부가 설립되자마자 부과한 직접세는 프랑스 농민들이 혁명에서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제헌국민의회가 선포한 헌법으로 실시된 1848년 12월 대통령 선거의 승리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3세에게 돌아갔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한 카베냐크가 얻은 표의 6배에 달하는 600만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진압당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배신당한 프티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임시정부의 직접세를 거부하며 나폴레옹 1세에게 향수를 느끼는 농민계급에 의해 가능했다.

나폴레옹 3세는 어느 계급의 대변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에 선포되자 수상, 파리시의 경찰국장, 체신청장, 검찰총장, 파시 시장 등 부르주아 공화파 인물들을 정부에서 제거한 후 구왕정의 인물들로 교체하였다. 국민방위군과 기동대 그리고 상비군 1사단의 통합 지휘권을 정통 왕조파인 샹가르니에를 임명하였다.
프랑스는 공화국 정립 시기에서 벗어나 입헌공화국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부르주아 공화정을 흔드는 나폴레옹 3세와 정통 왕조파의 반혁명 공세에 저항하여 1849년 6월 프티 부르주아 계급은 산악당을 통해 입법의회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던졌으나 부결되었다. 이후 프티 부르주아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연대를 호소하며 국민방위군을 중심으로 평화적인 시위에 나섰으나 나폴레옹 정부의 기동대와 정규군에 의해 공격을 받고 무참하게 짓밟혔다. 파리 포병대와 국민방위군 대부분은 강제 해체되었고, 이로써 프티 부르주아는 무력을 박탈당했다.

1849년 6월 이후 나폴레옹 정부와 질서당이 장악한 국민의회는 계엄선포를 정부의 재량에 맡기고 언론의 입을 굳게 다물게 하고 결사권을 폐지시키는 법을 제정하였다. 파리 감옥은 초만원 사태를 이루었고 정치 망명가들은 추방당했다.

처음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다음 프티 부르주아를 그리고 마지막에 부르주아 공화파를 권력에서 차례로 몰아낸 나폴레옹 3세와 구왕당파의 입헌공화정 내부는 나폴레옹과 정통 왕조파 그리고 오를레앙파로 갈라져 서로 갈등하게 된다.
이틈을 비집고 프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는 1850년 3월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회에 재진입하게 되었다. 그것도 1848년 6월 폭동에서 사면되지 않은 인물들이 당선된 것이다.
이로써 입헌 공화정은 새로운 국면인 해체 국면에 돌입하게 된다. 

이에 대항하여 나폴레옹 3세와 왕정파가 주도한 국민의회는, 1850년 5월 자신들을 선출한 보통선거를 폐지해버렸다. 부르주아 공화파와 프티 부르주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런 반혁명에 대해 목소리 높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파리의 15만 명의 군대, 보통선거권 폐지 결정의 오랜 유보, 혼란을 무마하려는 언론의 태도, 산악당과 새로 선출된 의원들의 무기력, 프티 부르주아지의 무거운 침묵, 그러나 무엇보다도 상공업의 번영이 프롤레타리아트 측의 어떠한 혁명적 기도도 방해했다.”

엥겔스는 <1848년부터 19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에서 마르크스와 자신이 1848년 ~ 1850년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얻은 교훈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역사는 우리와 우리처럼 생각했던 사람들 모두가 틀렸음을 입증하였다. 역사는 그 당시 대륙의 경제발전 수준이 대체로 자본주의적 생산을 제거할 만큼은 성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즉 역사는 1848년 이래 대륙 전역을 휩쓸었으며 처음으로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최근에는 러시아에 진정한 대공업을 뿌리내리게 한 경제혁명에 의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였다.

한편 경제혁명으로 인하여 독일은 자본주의적 토대의 모든 면에서 제1급의 산업국가가 되었으며 그러므로 독일은 1848년에는 아직 팽창할 수 있는 엄청난 수용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산업혁명 때문에 모든 곳에서 처음으로 명백한 계급관계가 나타나고 수공업 시대나 더욱이 동유럽의 길드 수공업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수많은 이행기적 형태들이 제거되었으며 진정한 부르주아지와 대규모의 진정한 산업프롤레타리아트가 발생했으며, 그들이 사회발전의 전면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을 제외한다면 1848년에는 오직 빠리나 아니면 기껏해야 소수의 대규모 산업중심지에서 나타났던 이러한 두 계급 간의 투쟁은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으며 1948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격렬한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오래 전부터 필자에게 마르크스의 역사철학 고전으로 알려진 프랑스 혁명 관련 3부작은 ‘읽어야 할 고전’에 속했다. 마침 <4.27 시대 연구원> 주최로 이병창 교수의 신간 <우리가 몰랐던 마르크스>(2018.12 먼빛으로)에 대한 강연을 듣게 되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마르크스의 저작은 소련이나 동독에서 출판된 교과서에서 나온 원리(교과서 번역본)가 대부분이었다. 그 결과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역사에서의 계급투쟁”을 설명하는 방식도 정형화된 결론을 해설하는 저서가 다수였다. 

필자는 그런 과정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본가라면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고, 노동자라면 당연히 저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이해한 셈이다. 단순한 대입, 단순한 계산이 역사를 지배한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자본가 속에서도 여러 계층이 있었고 노동자 속에서도 여러 계층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존재를 자기의 의식을 통해 바라보지만 그들의 존재가 단순히 의식을 수동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과거부터 통용된 낡은 사고방식 또는 막연한 느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았고 결과적으로는 왜곡된 방식으로 자신의 현실을 이해했다. 

이런 왜곡된 의식 때문에 역사 속에 그들의 행위는 현실과 부딪히고,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고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실패는 실패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각 계급은 이런 역사적 실패를 통해 실천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니, 이런 깨달음은 그 다음번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논리가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며 역사철학인 셈이다.

이병창 교수는 2019년 1월 10일 <우리가 몰랐던 마르크스> 첫 강연에서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 대선에서의 트럼프 당선, 그리고 한국 정치에서 이명박근혜의 몰락과 문재인의 당선 역시 ‘계급 투쟁’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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