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의 빈민스토리(7)

1. 노점상 죽음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노점상 이야기를 할 때 단속 과정에서 희생당한 상인을 빠트릴 수 없다. 그만큼 이사회에서 노점상이란 존재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위 한국사회의 성장과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희생자가 계실 거라 짐작되지만 그 존재조차 알 수 없거나 때로는 서서히 잊히고 있지는 않은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료를 찾고 정리할수록 새로운 희생자의 이야기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모두 소중한 사람이지만, 글을 통해 소개되는 사람은 그 죽음이 정세 속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파장이 크며 단체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분단과 군부 독재체제, 반민중적 수탈에 맞서 하나뿐인 생명을 던져 투쟁을 일구어 온 사람들을 우리는 희생자를 넘어 ‘열사’라는 칭호를 쓴다. 이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운동의 역사를 대변한다.

남은 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기록하고 추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흐를수록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정체성이 무엇이며, 가꾸어나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희생당한 사람들을 살펴보고, 각각의 사건이 담고 있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고 후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자살률은 2003년 아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고수하고 있다. OECD가 2015년에 발표한 ‘건강 통계 2015’에 따르면, 2013년 기준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은 29.1명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OECD 회원국의 자살 평균 사망률인 12.0명보다 훨씬 높다. 더 큰 문제는 다른 OECD 회원국들의 자살률 통계는 점점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은 2000년을 기점으로 오히려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살자 가운데 생계형 자살자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비록 열사라는 칭호는 받지 못할지라도 우리 사회의 빈곤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이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지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동안 파악된 도시빈민의 투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열사분들을 살펴보면 노점상과 철거민을 중심으로 대략 50여 분이 넘게 계신다. 이 가운데 철거민은 2천 년대 들어 용산참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노점상은 단속 과정에서 운명하신 분 약 10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물론 사회적 주목을 받은 사건을 토대로 살펴봤을 경우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열사라는 개념을 둘러싼 사회적 합의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단속과 철거로 희생당하신 분을 포함하면 실질적으로 그 숫자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제 빈민 열사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의미를 넘어 우리 시대 희생자들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점검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2. 이재식 열사, 아버지의 길을 따라서

▲ 이재식 열사 투쟁{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노점상 희생자 가운데 조직적으로 처음 대응한 분이 이재식 열사다. 1989년 거제에서 분신해 돌아가신 이재식 열사의 따님의 글은 사건 전후와 최근까지 어떻게 아빠와 시대를 바라봤는지 그 심정이 잘 그려져 있다.

‘부산 해동병원에서 내 열 번째 겨울은 시작되었고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학교 담임선생님은 말한다.

"조퇴하고 어서 집에 가거라."
"왜요? 선생님"
"아버지가 몹시 아프시다는 구나..."
"우리 아빠 안 아픈데... 내일 뵙겠습니다!"

집으로 간 저는 엄마가 너무 슬퍼하는 걸 보고 영문도 모른 채 함께 울었다. 그리고 부산으로 갔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선 아이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리고 병실에 들어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든 사람을 엄마는 아빠라고 말해준다. 나는 믿기지 않아 엄마에게 묻는다.

"왜 아빠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어?"
"아빠 정말 맞아? 아빠 많이 아픈 거야? 왜? 왜 아픈 건데?"

저는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엄마와 함께 병실을 나온다. 그렇게 아빠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89일 동안을 병원에서 보낸다. 그리고 아빠와 인사도 나누지 못했는데 어린 저는 열사의 딸이 되어 버렸다. 왜 아빠는 떠나고 나는 열사의 딸이 되어야만 했을까? 아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저는 살아야 했다. 엄마가 왜 최루탄을 마시면서 힘든 싸움을 하는지, 왜 아빠처럼 죽어간 사람들이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아버지의 얼굴이 몹시 그리워졌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애를 써보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저는 울어버린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어서 울어버린다.

"항상 나에 대한 소개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럴 때마다 그래 나는 열사의 딸이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나 그럭저럭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나의 이야기다.’

1989년 노점상을 하다가 노태우 정권에 이 몸 불살라 경고한다며 분신한 이재식 열사 딸 이근혜의 이야기다. 철모르던 아이는 자라서 아빠의 장례식을 치른 노점상단체에서 일한다. 그 후 명동 향린교회 근처 네팔 음식점 포탈라궁를 운영하지만, 또 개발에 헐리게 된다. 어려서는 노점상 열사의 딸로 결혼해 어른이 되어서는 또 철거민이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재식 씨는 당시 37세였다. 1985년에 ‘성흥사’에 입사하여 ‘노동조합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노조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모두 기억하듯이 1987년은 노동자 투쟁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해 9월 한국의장에 재취업했던 이재식 씨는 다음 해인 1988년 5월 노조결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합 활동 감시와 해고 위협으로 현장 노동자 생활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새벽에는 당시 창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겨레신문 거제지국 총무를. 낮에는 노점 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그의 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근처의 대우조선 노동자의 파업이 전개되자 동지들을 규합해 농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재식 씨는 고향 충북에서 삶터를 찾아 거제로 들어와 성실히 살려고 노력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밝게 웃으며 가난을 표 내지 않았다. 주변의 인간관계도 원만하여 항상 사람이 들끓었다. 그는 타고난 활동가이자 노동자이며 노점상이었다. 하지만 몇십만 원이나 밑천을 들여 차린 노점 손수레는 몇 푼 모아보지도 못한 채 뒤집히기 일쑤였다. 1989년 10월 16일 신현읍 개발과장을 반장으로 한 거제시 노점단속반이 농촌지도소 앞 호떡 손수레를 끌고 가버렸다. 부인인 황귀남 씨가 빼앗긴 손수례를 돌려 달라며 호소하였다. 밀가루 반죽을 오토바이에 싣고 온 남편 이재식 씨도 함께 통사정했다. 읍장은 뒤늦게 나타나 콧방귀만 뀌며 무책임한 태도로 비웃었다. 손수레를 뺏긴 분노도 컸지만,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자존심이 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고 유린당하는 슬픔, 그것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부인인 황귀남씨의 말에 따르면 남편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산송장처럼 보였다고 한다. 말없이 사라진 남편은 12시 40분경 조용히 사이다병에 휘발유를 담아 몸에 끼얹고 “이 몸 불살라 노태우 정권에 경고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불을 댕겼다.

이를 본 직원들이 멍하니 보는 사이에 3도에 이르는 치명적인 화상을 입게 된다. 거제 기독병원, 마산 고려병원, 부산대병원 등을 찾아갔으나 모두 진료를 포기한다. 누구든 손끝을 조금이라도 데이게 되면 그 상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두 달 가까이 영도 해동병원에서 생사를 헤매다 12월 11일 새벽 마침내 운명한다. 일면식도 없던 노점상이 전국에서 그 소식을 듣고 몰려들었다. 이재식 열사의 분신은 곧 자신의 문제처럼 느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점상단체는 한 단계 성장하고 발전한다. 자신의 문제를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아빠의 죽음을 경험한 소녀는 세상을 일찍 알아 버렸다고 한다. 어른이 되자 세상 앞에 당당히 섰다.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는 운동가로서, 광화문에서, 종묘에서, 거리 곳곳에서 저항의 물결을 만났다. 이재식 열사의 딸 이근혜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것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으면 어느덧 바다가 되고 성난 파도가 되었다고 회상한다. 한 노점상의 죽음이 개인의 비극에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의 가슴에 열사로 남게 되었다.

3. 최정환 노점상 장애인 열사

▲ 최정환 열사[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집권하게 된다.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불렀다. 임기 초 군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하며 군부독재와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금융실명제 실시 등을 통해 개혁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세계화를 적극 주장했다. 이윽고 세계 경제체제가 WTO(세계무역기구) 체제로 재편되면서 개방화 물결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진보적인 운동진영을 탄압하는 것은 김영삼 정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4년 북한(조선)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곧바로 공안정국이 몰아친다.

1995년 3월이었다. 당시 필자는 청년단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직 봄이라고 하긴 서늘한 날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강남의 한 노점상이 분신했다는 소식이었다. 청년단체 회원들과 서울 강남구 삼성동 강남시립병원으로 달려갔다. 장례식장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정환은 1급 1호의 중증장애인이었다. 어렸을 때 척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고 보육원과 애덕의 집 등 장애인 시설을 전전했다. 동료 장애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85년에 어렵사리 아버지를 찾았지요. 하지만 또다시 아버지도 외면합니다. 법적으로 존재하는 아버지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조차 선정되지 못합니다. 한 번도 서글픈데 두 번씩이나 버림받았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달리 선택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작은 리어카에 의지해 길거리에서 껌도 팔고 구걸도 하고 수세미나 고무줄 같은 것도 팔았습니다. 엎친 데 겹친 교통사고마저 당해 죽음의 사선을 오르내렸습니다. 세상은 지독하게 그에게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희망은 단속으로 여지없이 깨져버리고 생계마저 막막했다. 불시에 들이닥치는 단속으로 94년 6월 한쪽 다리마저 부러지고 말았다. 1994년부터 서초구 방배역 근처에서 오토바이에 가판을 달고 테이프 노점상을 시작하여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서초구청은 내버려 두지 않았다. 노점상 단속으로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웠다. 그러던 중 95년 3월 8일 서초구청의 단속에 스피커와 밧데리 통을 빼앗겨 구청을 방문했다. 담당자를 면담한 후 물품을 되찾으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돌아와야 했다.

눈앞이 막막했다. 그리고 분노가 몰려 왔을 것이다. 서초구청 앞에서 다시 선 그는 9시 45분경 몸에 지니고 있던 시너를 붙고 몸에 불을 붙였다. 얼굴 3도 화상과 온몸 88%의 중화상을 입고 강남시립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화상의 고통은 지옥을 오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 '4백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목숨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1995년 3월 21일 세상을 떠난다. 분신 13일 만에 고달픈 삶을 마감한 것이다. 

숨을 거두자, 노점상단체와 장애인 단체가 주도해 비상대책위가 만들어졌다. 막 건설된 노동자들의 전국조직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중조직과 사회단체들이 합류했다. 
성균관대에 모였던 장애인과 노점상이 정문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서울 시내 곳곳에서 김영삼 정부 규탄 시위가 열렸다. 강남시립병원 주변을 에워싼 전투경찰과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비상대책위는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 빈민장례위원회'로 전환하고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병원 주변엔 각목과 마스크를 쓴 학생 그리고 사수대가 시신을 뺏길지도 모른 상태에 대비했다. 25일 새벽 2시 35분께 공권력이 병원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정보에 장례위원회는 시신을 새벽에 이동시키려다 1차로 저지당한다.

장애인 노점상 150여명이 빈민장이 열릴 예정이던 연세대로 가기 위해 주검을 1톤 트럭에 싣고 병원을 나오던 중 경찰의 불심검문에 주검을 탈취당한다. 경찰은 장례를 불허하며 영안실을 봉쇄했다. 노점상과 장애인 그리고 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서초구청으로 몰려가 차량을 불태우고 강남경찰서로 몰려가 주검 반환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오전 7시 30분께 법정 시신 인도자인 홍남호 (당시 44세) 씨가 경찰에 "빈민장의 영결식과 노제를 포기한다" 는 각서를 써준다. 주검을 되찾고 돌아오는 도중 한강 다리 위에서 장애인들이 격렬한 차량시위를 벌인다.

연세대의 노천극장에는 열사의 시신조차 없이 커다란 영정과 만장을 세운 채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영결식은 연세대 정문에서부터 시청까지 노제를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정문에서 원천 봉쇄되자 경찰추산 2천여 명의 시위대가 도심으로 진출하기 위해 각목으로 무장한 채 화염병을 들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점차 어두워지면서 그날의 싸움은 끝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2011년 3월 당시 함께 투쟁하고 장례를 치렀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 열사’단’ 김종완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정환 열사의 묘역이 발견된 거 같다는 소식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최정환 열사를 입에 떠올렸지만 정작 그의 묘역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경기도에 있는 용인 카톨릭공원묘원에 조용히 묻혀 있었다. 

‘가난과 장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동정, 봉사, 그리고 영웅담이 아닐까. 얼마나 살기 어려운지 비참한지 이들이 겪는 모습을 통해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로 넘쳐난다. 당연히 이러한 시선은 가난과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는 이웃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미담은 마치 우리 사회가 삭막하지만,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는 식이다. 그리고 가난과 장애인의 문제를 불굴의 투지로 극복하고 성공한 영웅담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도 이들처럼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이러한 시혜와 동정, 봉사, 영웅담이라는 삼박자는 우리 사회가 가난과 장애를 바라보는 오래된 보편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고 문제를 오히려 고착화한다. 군부독재가 물러나고 김영삼 정권도 이러한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과거 정부가 내놓은 틀에서 혁신적으로 나가기 위해 장애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들고 싸워나갔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희망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최정환 열사의 투쟁은 노점상뿐만 아니라 장애인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삶에 대한 희망으로 끈질기게 쏘아 올렸던 작은 공이 참으로 모질게 캄캄한 허공을 가로질렀다고 모두 한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김영삼 정권은 세계화 시대를 맞아 성장주의에서 탈피해 삶의 질을 높이는 방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복지정책의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기 중반에 한보 비리 사건이 터지고 아들 김현철의 구속, 노동법 날치기 등으로 지지율이 급전직하한다. 1995년에는 세계화 원년으로 정하여 금융을 개방하고 기업들의 단기차입 한도를 확대했다. 그러나 이는 1997년 IMF 구제금융을 받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IMF는 한국사회경제를 길고 깊은 수렁으로 빠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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