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준에 비춰 본 한국 노동기본권 현실

‘노동기본권 위험국’, ‘노동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

최근 ILO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에 관한 논란을 보면 대한민국의 이 별칭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협약 비준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정부는 비준을 회피하던 역대 정부와 다를 바 없이 법을 먼저 고치고 난 다음에야 비준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부가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법개정을 주도하는 것도 아니다. 노사가 합의하면 정부는 뒤따르겠다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경총을 비롯한 사용자단체는 협약 비준의 대가로 협약의 취지와 정반대로 노조 할 권리 축소를 공세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경사노위 노사관계제도개선위원회는 개악과제를 놓고 합의를 도출하겠다는 상황이다. 국회는 여야 할 것 없이 법개악안을 다투어 발의하고 있다. 결사의 자유에 관한 국제 기준을 수용할 것인지가 이렇게 논란거리가 될 이유가 있는가.

한국 정부의 ILO ‘결사의 자유’ 협약 미비준은 지난 20여 년 간 국제사회의 크나큰 이슈였다. 그러나 협약 87호·98호를 정부가 비준하지 않았다고 해서 한국 노동자들이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세계인권선언 (20조, 23조), 유엔 사회권규약(8조), 유엔 난민지위협약(15조), 유엔아동권리협약(15조) 등 한국 정부가 이미 비준한 인권 협약은 결사의 자유와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ILO 역시 헌장, 필라델피아선언(1944년), 작업장에서의 기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선언(1998)을 통해 ‘결사의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ILO 회원국이 된 사실만으로 결사의 자유를 법과 관행에서 존중·실현·촉진할 의무를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시간, 임금, 사회보장, 산업안전보건, 휴일, 노동복지를 망라한 여러 국제기준을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단결하고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할 권리가 전제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 노동자들은 자국 정부의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 여부에 상관없이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에 정부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결사의 자유가 포함된 여러 유엔 인권 조약을 이행하기 위해 취한 조치를 해당 조약기구에 정기적으로 보고할 의무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절차를 통해 유엔 기구들과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한국의 노조 할 권리 보장의 현실이 국제기준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수차례 지적해왔고, 개선 방향을 여러 차례 권고해왔다. 가장 핵심적인 권고는 물론 ILO 협약 87호·98호를 비준하여 해당 협약을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규범으로 수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결사의 자유 원칙에 위배되는 법 제도 관행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 지난 2일 서울 영등포구 KDB산업은행 앞 “건설노동자 노조할 권리 보장하라!” 기자회견 [사진 : 뉴시스]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ILO 87호 협약은 “직업, 성별, 피부색,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노동자가 노조를 설립하고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오직 군대와 경찰만을 예외적으로 각국의 법률에 따라 제한을 둘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우선 전체 노동인구의 10%가 넘는 250만 명의 특수고용 노동자는 노조 할 권리를 원천적으로 부정당한다. 고용관계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가 노조할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국제기준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에서는 노동자임이 분명한 사람들을 사업자로 둔갑시켜 놓고 노동자가 아니니 노조 할 권리도 없다고 한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더라도 사용자들에게 단체교섭에 나오라고 요구하면 이를 이유로 노조 간부 및 조합원을 ‘공갈협박죄’로 구속하고, 설령 단체교섭을 해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할지라도 사용자가 이를 위반하면 법적으로 강제할 방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소방관과 교정공무원, 업무총괄자 등 군인과 경찰이 아닌 공무원에 대해서도 포괄적으로 노조가입을 금지하고 있는 현실은 국제기준과 크게 어긋난다.

87호 협약에 따르면 “모든 노동자는 사전 허가 없이 노조를 설립하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노조에 가입할 권리”를 갖는다. 또 스스로 작성한 강령과 규약에 따라 자율적으로 노조활동을 조직하고 행정당국에 의해 해산되거나 활동정지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현행 노조법은 노조설립신고 절차를 ‘신고제’로 운영한다고 하지만 설립신고서를 내면 노동부가 임의로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하거나 규약을 변경하라고 요구하며 설립신고를 반려하기 일쑤다.

노동조합이 자율적으로 작성한 규약에 의해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는 것도 법으로 금지된다. 행정당국이 자의적으로 규약을 변경할 것을 노조에 명령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을 시 ‘노조 아님’을 통보한다. 전교조가 노동부의 행정조치로 하루아침에 법외노조가 된 과정은 이러한 결사의 자유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며, ILO도 이를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정부에 시정과 해당 법 개정을 수차례 권고한 것이다. 전국건설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손으로 선출한 노동조합 대표자 이름을 노조 설립신고필증에 반영하려고 하자 행정당국이 이를 가로막았다. 특수고용노동자를 조합원에서 제외하라는 시정명령을 노동조합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진 : 뉴시스

98호 협약은 “노조활동을 이유로 한 해고 등 반노조 차별 및 사용자에 의한 지배개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보장”하며 “단체교섭을 촉진하고 노사간 자율적으로 단체교섭이 이루어지도록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한다. 노조활동을 이유로 한 해고는 일상다반사고 그룹사 차원에서 노조와해를 기획하고 종합상황실을 꾸려 실행했던 삼성전자의 사례, 노무관리 전문 컨설팅 업체를 동원해 하청업체 노사관계에 지배·개입하고 노조파괴 작전을 실행했던 현대자동차의 사례는 국제기준과 현실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삼성전자서비스에서 벌어진 부당노동행위 사건을 심의한 후 “노동자들이 전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선택에 따라 조직을 설립하고 결성할 권리는 이러한 자유가 법과 실제에서 확립되고 준수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또 이런 심각한 노조탄압 행위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정부가 이를 철저히 조사하고 이런 행위를 단념시키기에 충분한 처벌과 해당노동자에 대한 보상을 포함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파업권은 또 어떠한가.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파업이나 정부 노동정책을 변경하기 위해 파업하는 것은 ‘불법파업’이라고 규정되어 있고, 반면 파업권을 제한하는 ‘필수공익사업장’의 범위는 지나치게 넓어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합법적으로 파업하는 것이 더더욱 어렵다. 사실상 파업을 했다하면 무조건 ‘불법’으로 내몰아 형사처벌과 손배가압류로 위협하는 것이 관행이다. ILO 결사의 자유 원칙과 크게 어긋나는 현실이다.

협약 비준, ‘사회적 합의’가 아닌 ‘정부 의지’ 필요

정부의 오해와 달리 협약 비준은 ILO가 국내 법·제도·관행이 협약에 부합함을 인증하는 절차가 아니라 거꾸로 “회원국이 국내 법·제도·관행을 국제기준에 일치시킬 것과 이를 위해 ILO 감시감독절차를 수락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절차다.

현재처럼 사용자 단체가 협약비준을 반대하고 ‘사회적 합의’를 지렛대삼아 국제노동기준상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사용자 대항권’을 비준 요건으로 제시하는 상황이라면, 노동자들에게 권리를 타협하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책임지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사회적 합의 방패막이로 정부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는 일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협약 비준의 지연으로 전 세계 누구에게나 보장된 권리지만 한국 노동자들은 누리지 못하는 노동기본권, 정부가 책임지고 즉각 돌려줘야 한다. 정부는 협약 비준을 위한 절차에 즉각 돌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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