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판문점선언이 발표된지 1년이 됐다. 1년 전 선언이 발표될 당시, 누구보다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던 사람들. 바로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가 조국이 해방된 후에도 조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재일동포들이다.

지난해 8월 도쿄 ‘4.27판문점선언 시대의 의미와 우리의 역할’이란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강이룩 조선신보사 편집국 부국장은 4월27일 그날의 동포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초중고급 학교에서, 거리에서, 온 동포사회가 판문점선언을 환영하고 경축했다. 재일동포 1세들은 물론 6.15공동선언 발표 때에 태어나지도 않은 학생들은 10년간 북남관계가 좋지 않아 통일에 대한 표상이 없을 것인데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지난 19~21일 4.27판문점선언 발표 1주년을 기념해 열린 두 번째 공동토론회를 위해 방문한 도쿄. 여전히 남과 북이 하나 된 통일된 조국을 그리며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을 만났다.

“유골은 혼자 고향땅에 가지 못 한다”

국평사(國平寺). 나라를 평안하고 평화롭게 하는 절. 일본종교법인에 등록된 일본 사찰이지만 스님은 재일조선인이다. 1964년, 스님이었던 할아버지께서 만든 국평사를 지금은 윤벽암(尹碧巖) 스님이 지키고 있다.

사찰에서 죽은 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혼을 달래는 불공을 드리듯, 국평사엔 조선인 유해가 모셔진 봉안소가 있다. 봉안소는 불국사 다보탑 모양으로 지어졌다. 벽암스님은 “할아버지가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 유골을 모으자고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모은 유해는 1천여 구가 넘는다.

벽암스님은 1천여 유해 중 95%는 남쪽 지역 출신으로 제주도·경상남도·경기도 지역 출신이 많고, 함경도·황해도·평양이 고향인 유해도 있다고 설명했다. 일제 강점기에 혼자 끌려와 희생돼 고향이 어딘지 모르는 유해도 300여구나 된다고 했다.

벽암스님과 국평사는 지난 2004년 8월15일 처음으로 조선인 유해 100여구의 고향과 가족을 찾아 남쪽에 보냈다. 유해를 고향으로 보내는 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끌려올 당시 작성된 장부와 유골을 분석해 고향을 찾는 일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가 맡고 있다.

▲ 오른쪽 빨간지붕의 건물(법당) 뒤에 보이는 다보탑 모양의 건물이 조선인 유해가 모셔진 봉안소다.

벽암스님의 고향은 경남 함양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국도 (분단 이전의)조선이다. 그러나 일본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호적(조선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재인조선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국평사를 찾아온 한 일본인은 재일조선인인 벽암스님을 보고는 “여기가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절인가?”, “왜 얼굴이 빨갛느냐”라고 묻기도 한다고 했다.

4.27판문점선언은 벽암스님에게도, 죽어서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국평사에 유해로 남은 조선인들에게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판문점선언시대가 와서 처음으로 통일국적을 받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이건 기적이다.” 할아버지께서 지금의 국평사를 만들고 조선인 유해를 모시며 죽어서까지 일본 땅에 묻히지 말라고 했듯이, 벽암스님도 하루 빨리 조국이 통일돼 고향땅에 돌아가 일본 땅이 아닌 고향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으며 그 중 최고는 우리민족이다. 우리 8천만 겨레가 곧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통일국적을 받는 날을 고대한다는 벽암스님. “조국의 통일을 위해 피땀 흘린 우리 조선인들의 유해는 혼자 고향땅에 가지 못한다. 산 사람들이 모시고 가야 한다”면서 4.27판문점선언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자고 힘줘 말했다.

▲ 4.27판문점선언 발표 1주년 기념 공동토론회를 위해 도쿄를 찾은 남측 방문단과 인사하는 벽암스님(맨오른쪽)

“판문점선언이 가져다 준 ‘민족의 봄’”

박정문 화가는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 2세다. 그 역시 일본에서 태어나 온갖 차별과 억압 속에 자랐고, 일본에선 평양사람도, 서울사람도, 일본사람도 아닌, 분단 이전의 조국을 그리며 살고 있다.

그는 북한(조선)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고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8점은 북한(조선)의 국보로 등록돼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는 지난 20일부터 24일까지 도쿄 우에노미술관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된 180여점의 그림 중에 국보로 등록된 8점은 복제본이라고 했다. “일본 반동들의 제재로 원작을 갖고 오지 못했다”는 것.

▲ 박정문 화가가 남측 방문단에게 <저고리>라는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작품엔 조국 분단의 아픔과 조국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저고리>라는 작품은 재일동포 3세인 그의 딸의 이야기, 조선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내 딸이 우리말과 글을 배우러 우리학교(조선학교)에 다니면서 저고리를 입었다.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의 상징인 저고리를 입고 학교에 가다가 ‘저고리 입은 사람들은 공화국(북한) 아이들’이라는 일본반동들로 부터 저고리가 칼로 찢겼다. 이를 고발하려고 그림을 그렸다.” 지금 조선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등교할 땐 사복을 입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저고리로 갈아입는다.

작품 속 조선학교 학생의 눈에는 ‘왜 우리가 차별받아야 하는가’라는 분노와, 조선사람으로서 신념을 갖고 살아나가겠다는 다짐을 담았다고 했다. 이 작품은 평양에서 열린 국가미술전람회 1등작이면서 북한(조선)의 국보로 등록돼 있다.

1980년 남녘땅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작품도 있다. 광주민중항쟁이 배경이다. “광주 학생들의 마음을 담아서 ‘통일’을 외치는 모습이다. 자기가 죽더라도 민주화 투쟁을 위해 어깨 걸고 나서겠다는 모습을 그렸다.”

▲ 5.18광주민중항쟁을 담은 작품 <소원은 통일>

관람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 또 하나의 작품은 4월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 <환희 2018.4.27. 민족의 봄>이다.

“매화꽃이 만발한 조선(한)반도, 나뭇가지는 군사분계선을 의미하지만 이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가지를 꺾었다. 가지 위에 앉은 두마리의 참새는 두 수뇌분들이다. 판문점에서 다정하게 이야기 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곳에 날아 들어오는 또 다른 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다. 환희에 넘쳐 만세를 부르고 있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5개월이 걸렸다. 판문점 상봉과 4.27판문점선언의 감격을 어떻게 담아낼까 고심하면서 그리느라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 <환희 2018.4.27. 민족의 봄> [사진 : 조선신보 캡쳐]

전시회 촬영차 남녘땅에서 온 한 방송국 기자가 그에게 ‘재일동포 화가로서 일본, 서울, 평양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했다.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재일동포 2세인 그에게 조국은 하나다. 분단되기 이전의 조국, 하나 된 조국이다.

박정문 화가 아버지의 고향은 남녘땅 울산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군마현에 흐르는 큰 강을 보면서 아버지는  고향(울산)이 보인다면서 ‘고향땅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다’고 크게 우셨다.” 어머니 역시 14살에 일본에 와서 다시 고향에 방문하지 못했다. 그는 하루 빨리 아버지 유해를 모시고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전시회장을 찾은 학생들을 보면서 “나의 작품을 통해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를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이 미술가로서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는 박정문 화가. 그는 조국과 민족, 그리고 동포들에게, 우리학교 아이들에게 미술가로서 ‘조국애’ ‘민족애’가 담긴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늘 고심하고 있다면서 남녘 동포들에게도 재일동포 미술가들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는 인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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