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의 빈민스토리(6)

1. 1980년대 이후 노점상

▲ 1980년대 노점상[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0년대 이후 노점상 문제를 집약해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김순희(여 79세) 씨의 삶을 통해 당시의 삶을 돌아보자.

"남편을 여의고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서 월세방을 얻어 1남 1녀와 살았어요. 새벽에 경동시장에 나가 야채나 과일 같은 걸 떼어다가 길음역 근처에 펼쳐 놓고 팔았지요. 그런데 부근에 대형 슈퍼마켓이 생기고 장사가 안되어 도봉산 등산로 입구로 옮겨 다시 소라와 옥수수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장사를 마치고 인근 시장에 나가 소라를 사다가 집에서 삶아 다음 날 10시쯤 도봉산으로 올라갔지요. 이것도 한철이라 여름에는 소라가 팔리지 않아 다른 품목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적당한 품목도 없고, 장마까지 겹쳐 사다 놓은 물건마저 모두 날렸버렸습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단속 때 잘 봐 달라고 노점상들끼리 걷어 상납한 돈과 왔다 갔다 차비, 점심값을 떼고 나면 손에 들어오는 것은 그야말로 몇 푼 없었어요."

이러한 김 씨에게 한 줄기 빛처럼 희망이 생겼다. 바로 노점상 단체다. 전국의 노점상이 하나 되어 서로의 생존권을 지켜 주고 어려울 때 도와줄 조직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고 얼마나 도와줄까 망설였어요. 또 이번에도 속는 셈 치고 주변 몇 사람과 단체 가입했지요. 하지만 서로 함께 도와주며 사는 삶에 감동하였지요. 단속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며 새롭게 조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녁때는 나도 모르게 단체 사무실로 달려가는 거예요. 밥도 같이 지어 먹으면서 다른 지역 노점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유하고 단속이 나오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참여했어요. 집회에서 서로의 생활을 고민하고 함께 걱정하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비록 하루 종일 장사 하다 보면 몸은 피곤하고 지쳐도 마음은 언제나 뿌듯하고 활기찼어요. 노점상단체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호루라기 소리와 완장을 찬 사람만 나타나도 허급지급 뒷골목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으니까요. 매일매일 올림픽이다 뭐다 대로변 도로의 장사를 전부 금지시켜 생계가 막막하기도 했었어요.”

정동익의 도시빈민운동(아침 출판사)의 자료에 따르면, 1983년 7월11일부터 18일까지 집중적으로 단속된 전국의 노점상은 모두 3천2백82건으로 집계되었다. 이 가운데 2백52건이 수거되고 33명이 고발당했으며 2백22명이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받았다. 포장마차의 경우 모두 3백52대가 단속되었고 그 가운데 2백대가 단속 차량에 의해 수거되어 1백62대가 현장에서 폐기되었다. 1983년 7월 19일 오전 1시부터 시청 앞 광장에 노점상 1천여명이 모여 당국의 무차별 단속에 항의하며 ‘정부는 노점의 생계를 보장하라, 생활 대책을 세워 달라’ 고 쓴 플래카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여 시청 앞 일대 교통이 큰 혼잡을 빚게 되었다. 시위가 점차 격렬해지자 기동 경찰 200여명이 출동, 앞장서서 구호를 외치던 노점상 50여명을 강제로 버스에 태워 연행하였다.

그리고 노점상 양복임(여 37세)씨가 자살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양 씨는 그해 8월 3일 단속을 나온 종로구청 소속 단속 반원과 실랑이를 벌이다. 아스팔트에 넘어지면서 뇌를 다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종로구청은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르고서도 아무런 대책 없이 양 씨를 버려두었다. 이에 항의하여 종로 노점상 200여명이 양 씨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대 병원 영안실에 몰려가 농성을 벌였다.1)
주1) 정동익 도시빈민연구 200쪽-201쪽

단속은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 대구에서는 칠성 시장 노점상 1백여 명이 북구청에 몰려가 계속 장사할 수 있도록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였고, 부산에서도 노점상 200여명이 부산 중구청 단속반 30여명과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이 밖에도 같은 시기 서울의 성동구 마장동 우시장 입구 노점상 90여명이 노점 철거에 항의하여 구청 직원과 전경 등 100여명과 충돌하여 부상자가 발생하고 노점상 12명이 연행되었다. 경찰과 단속반에 의해 폭력적인 진압을 당하자 노점상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빈 병과 돌 등을 던지며 항의하였다.

이 시기 노점을 하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유치장에서 구류를 사는 게 비일비재 했다고 김순희 씨는 증언한다.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 아이들끼리 집을 지키고 있을 생각을 하면 불안해서 가슴이 미어졌어요. 즉결 처분을 받고 나와 또 하루 벌어 하루 먹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는 올림픽이 축제였지만 우리에겐 지옥이었습니다."2)
주2) 이 시기 노점상단체의 결성을 둘러싼 내용은 ‘가난의 시대 : 동력출판사’ 102쪽부터 121쪽 까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2. 6.13대회와 노점상 운동

▲ 1987년 도시노점상연합회 개소식 장면

1980년대는 전두환과 노태우 군부독재의 공안 통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다. 1985년 IMF(국제통화기금), IBRD(세계은행) 총회를 앞두고 진행된 단속을 계기로 '노점상 생존대책위'라는 형태의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86아시안게임을 끝내고 12월 29일 노점상 양연수 씨를 중심으로 ‘도시노점상복지연합회’가 만들어지게 된다. 처음 이 단체는 노점상 간의 친목과 상호부조 및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출발하였지만 ‘87년 저항의 시대’에 맞게 조직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올림픽은 소중한 역사적 책무였기에 자고 일어나면 마치 모든 사람이 그 일정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살아가는 듯싶었다. 중앙정부의 지침에 따라 도시미화 사업의 미명 아래 일제 단속이 전개되었다. 1987년 5월 20일 몇몇 노점상은 등사잉크로 제작한 유인물을 들고 서울 곳곳을 돌며 노점상에게 명동성당으로 모일 것을 요청하였다. 양 연수 씨의 기억에 따르면 처음엔 제대로 모일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성당 계단에 수백여 명의 노점상이 모여 집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그 후 노점상 집행부와 양연수 씨가 구속되는 것을 계기로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1987년 거리를 달구었던 시민들의 항쟁은 6.29선언을 끌어내고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의 바람이 분다. 그 영향으로 노점상을 조직하는데 유리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어 10월 19일 ‘도시노점상연합회’로 명칭을 바꾼 후 '노점상 및 영세상인 보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12월에 '노점상 양성화 촉구대회'가 명동성당에서 개최되었다.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노점상 수백여 명이 참가하였다. 노점상단체는 87년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하면서 노점상 문제를 사회화시켜내며 자신을 얻게 되었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해가 바뀌어도 군사정권은 청산되지 않고 노태우 정권으로 갈아탔다. 서울 올림픽은 전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였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는 학생들의 집회로 술렁였다. 정권의 노점상 정책은 바뀌지 않고 노점상 숫자를 줄이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구청, 시청, 단속반, 게다가 경찰, 방범대원, 까지 단속으로 노점상들은 시달렸다. 조직되지 않았던 일반 노점상은 이들에게 상납 형태로 갈취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독재정권 아래 관료들 그리고 그 하부조직까지 부패되어 있어 실제 단속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일 뿐이었다.

▲ 1988년 노점상 6.13대회 장면

노태우 정권은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노점상 싹쓸이 단속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 시기 노점상들은 더는 예전의 노점상이 아니었다. 조직적으로 단속에 맞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88년 4월 18일 우리도 올림픽에 하나의 주최자로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도시 노점상 생존권과 88올림픽에 관한 공청회’를 각계각층의 참여 속에 개최한다. 그러자 노태우 정권은 그해 6월부터 손수레 보관소 폐쇄를 포함하여 성화봉송로 주변에 대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한다. ‘도시노점상연합회’로 결집한 노점상들은 올림픽을 얼마 앞둔 6월 13일 성균관대학교 금잔디 광장에서 3천여 명이 모여 '노점상 생존권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한다. 집회를 마친 노점상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5천여 명으로 늘어난다. 분노한 시위대가 투쟁을 결의하며 성균관대 교문을 박차고 시청으로 진출하자 곧바로 ‘군부독재 퇴진과 노점상 생존권’ 쟁취가 터져 나왔다. 이를 가로막는 전투경찰과 백골단의 진압으로 노점상 17명이 다쳐 병원에 실려 갔다. 벼랑 끝에 놓인 노점상들은 6월16일까지 무려 3일 동안 쉬지 않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마침 여론도 노점상에 대해 생존권 보장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우호적이었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강경한 노점단속 방침을 유보하고 손수레 보관소 폐쇄 계획을 보류하게 된다. 1988년 8월 4일 서울시는 일시적으로 노점단속 중단을, 8월 29일에는 국무총리가 노점단속 중단을 발표하였다. 마침내 조직되고 단결한 노점상들이 최초로 구체적인 승리를 쟁취한 순간이었다. 6.13대회를 계기로 노점상 생존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여론화되면서 노점상은 하나의 저항세력으로 사회 운동진영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날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점상조직들은 매년 6월 13일에 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노점상이 조직적으로 사회 운동세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6.13 대회는 노점상의 대항쟁이었던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노점상들이 88올림픽이 가난한 이들을 몰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치뤄져야 한다며 9월17일 경희대에서 '도시노점상올림픽'을 개최하며 뭉치고 생존권의 정당성을 알려냈다. 이런 사업과 실천을 바탕으로 1988년 10월 드디어 '전국조직'을 결성하여 체계적이고 탄탄한 조직 위상을 갖추게 된다.

물론 노태우 정권은 올림픽을 앞두고 소나기를 피해가자는 심정이었다. 1989년 올림픽이 끝난 후 이어지는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4월과 6월 또다시 노점상 전면 단속을 발표한다. 명동 성당에 3천여 명이 모여 다시 농성에 돌입한다. 노점상의 투쟁 전술도 한 단계 성장하였다. 명동에서 시청으로 그리고 서울시 전역으로 기습시위와 선전전을 벌이다가 대학교로 들어가 대열을 정비하고 학생들과 함께 다시 거리로 나와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부독재 타도와 생존권 쟁취’는 하나의 구호가 되었고 노점상 가슴에 깊게 각인되었다.

3. 1990년대 노점단속과 정책

1990년 10월 들어서는 사회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특별선언 ‘범죄와의 전쟁’이 발표된다. 과거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이후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던 점. 그리고 전두환 정권 시절 ‘삼청교육대’와 같이 범죄와의 전쟁은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불법과 무질서 그리고 과소비와 투기 또는 퇴폐와 향락 근절 아래 폭압 통치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었다. 노점상도 ‘민생침해사범’으로 규정하여 노점상에 기생하는 폭력배들을 도려내겠다는 것을 빌미로 단속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범죄로부터의 불안감은 반짝 줄어들 뿐이지만 사회안전망 확충, 복지정책 등이 동반되지 않는 범죄예방 정책의 성공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1993년 군부 출신이 아닌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이 1995년 확정되면서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뽑게 되었다. 이제 노점단속은 기존의 중앙정부에서 자치단체로 그리고 공무원의 직접 단속에서 용역을 동원한 단속으로 바뀌었다. 단속권과 철거 권한을 민간으로 이양하면서, 범죄와의 전쟁으로 철퇴를 맞은 폭력조직이 합법적인 은신처로 거대한 용역 민간업체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서울시가 단속으로만 일관하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조직화한 노점상을 사회적으로 분리하고 스스로 규율을 강제하는 방식도 병행한다. 사회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아 노점상이 조직화 되고 저항이 심해지자 서울시는 노점상 ‘절대 금지구역과 상대 금지구역’을 지정하였다. 그 내용은 역세권을 중심으로 노점상을 할 수 없으나 이면도로에서는 묵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존 ‘가로가판대 사업’을 확대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융자 500만 원으로 전업을 알선하고 젊은 사람을 중심으로 기술교육을 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는 노점상에게 맞춤형으로 특화된 대책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실업 대책을 응용한 것이었다. 다만 구두닦이와 버스토큰 가판대등 가로가판대 1016곳을 추가로 허용하거나 풍물시장 설립과 함께 전국 100여 곳의 시영아파트 지하상가 입주권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른 고용안정과 낮은 실업률은 노점상이 점차 자연 감소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경제적 토대 아래 개량적인 정책을 모색했다. 그러나 지하상가 입주는 유야무야되거나 풍물시장은 훗날 10년도 안 되어 모두 사라지면서 이주 대책 사업은 임시방편일 뿐 현실성 없는 대책임 드러났다. 개량적인 정책은 앙상한 물거품이라는 게 증명된다.

6공화국 5년간 노점단속으로 인해 3만 339개의 노점상 강제철거, 이중 5천 662개의 손수레파손 및 물품 파손이 발생했고, 이로 인한 재산피해액 45억 6천 4백4십9만2천원으로 집계 되고 있다.3)
주3) 14대 대통령선거 도시빈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

노점상들은 생존권 투쟁은 스스로 질서를 지킨다는 취지의 '자율질서' 사업을 전면에 걸고 노점상마차 규격화 사업과 거리환경개선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가 터졌다. MF 구제 금융사태는 한국사회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경제침체와 더불어 급격히 늘어난 실업자 대열은 전국적으로 노점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노점상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시기였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유연화 정책이 지속하고 한미FTA 협상을 통한 금융 자유화 조치 등으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확대되면서 새롭게 신빈곤층이 확산하여 나가기 시작했던 것도 1990년대 후반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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