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 당 645년 전쟁 그 첫 번째

▲ 백암성의 현재 모습

당나라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 전쟁은 이미 620년대 말부터 계획됐다. 정권을 장악한 당 태종은 국내 질서가 안정되자 눈을 고구려에 돌렸다. 그는 수나라의 실패를 교훈 삼아 고구려 침공 준비를 매우 치밀하게 해나갔다. 644년에 태상경 위정을 궤운사로 임명해 하북지방의 절도(총지휘)권을 줘 군량을 유주로 운반토록 했다. 당 태종은 또한 소경 소예를 시켜 하남지방의 곡식을 산동 반도에 가까운 바다가운데 있는 ‘옛 대인성’(사마의가 238년 산동성 등주에 인접한 섬에 성을 쌓아 놓고 여기에 물자를 저장해 놓고 배로 요동지역으로 운반했는데, 이 성을 대인성이라고 한다)으로 운반토록 했다. 또 7월에는 장작대감 염립덕 등을 홍주(오늘의 강소성 남창), 요주(파양), 강주(구강)로 보내 400척의 배를 만들어 군량을 운반토록 했는데, 이는 수군함선 건조를 겸한 것이었다. 또 영주도독 장검 등에게 유주 영주 산하의 군대들과 거란족, 해족, 말갈족 군사들을 끌어들여 요동에 대한 위력정찰을 해 고구려의 반응을 떠보도록 했다.

대당강경노선을 취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당나라의 전쟁준비 과정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 고구려 지도부는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전쟁을 막으려는 노력을 인내성 있게 벌여나갔다. 전쟁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당나라 군대의 위력정찰에 군사적 대응을 삼갔으며, 9월에는 백금 선물보따리를 든 50명의 사신단을 당나라에 파견했다. 당나라는 부당한 구실을 내세워 사신단 50명을 모두 대리시(형벌을 담당하는 관청) 감옥에 불법 구금해버렸다. 고구려는 당나라 사신 장엄을 토굴 속에 감금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고구려 사신 구금사건은 고구려 침공 확정의 신호였다. 고구려는 당나라 침공에 대비해 당나라의 북방에 있던 설연타의 추장 진주극한과 비밀접촉을 벌여 당나라가 전쟁을 일으키면 그 후방을 쳐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당나라의 침공은 이제 막을 수 없는 현실로 됐다. 당 태종은 웅주(장안)의 노인 1,100명을 불러다 놓고 고구려 침략전쟁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면서 청장년들을 전쟁마당에 내보낼 것을 강박했다. 당 태종은 그 해 11월 낙양에 도착했다. 그는 수나라 침략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정원숙을 만나 고구려 침공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요동은 길이 멀어 군량운반이 간고하고 힘들며, 동이(고구려사람)는 성을 잘 지키기 때문에 공격해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답했다. 당태종은 그의 말을 뭉개면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 무렵 선봉장 장검이 돌아온 후 당 태종은 최종적으로 고구려 침략군의 대오 편성을 마쳤다.

당 태종이 편성한 편성표에 따르면 수륙군은 도합 10만명이라고 나와 있으나, 이는 실제 병력수를 크게 축소한 것이다. 〈책부원귀〉에 따르면 토번왕이 당태종에게 보낸 글에는 100만 대군으로 나와 있다고 한다. 당태종이 편성한 수륙군 구성 도표를 보면 수로군, 육로군의 행군총관이 14명이었다. 이것은 14개 군단이 고구려 침략전쟁에 동원됐다는 것을 뜻하는데, 한 개 군단에 편성된 전투원의 수가 통상 5만명이라고 할 때 전투부대만 70만명이 동원됐다고 봐야 한다. 이밖에도 24군 등이 있으니 그 총수가 100만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태종이 10만명이라고 병력수를 크게 축소 발표한 것은 수나라 때와는 달리 자기는 작은 병력을 가지고도 능히 고구려를 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랑하려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11월 30일 전체 군사들을 유주에 집결시켰으며, 행군총관 강행본 등을 시켜 사닥다리와 충차를 만들게 했다. 출정에 앞서 당태종은 조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연개소문의 정변을 핑계로 삼아 침략을 정당화했다. 12월 14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당나라 군사에게 출격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에게도 고구려를 공격토록 요구했다. 이로서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전쟁의 막이 올랐다.

전쟁의 초기 양상

645년 정초부터 당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로 고구려를 향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당태종은 2월 초에 백제왕더러 신라로 가는 당나라 사신을 보호해줄 것을 강박했고 신라왕에게는 정예병을 뽑아 출전토록 독촉했다. 2월 12일 당태종은 친위군 6군을 거느리고 낙양을 떠났고,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세적에게는 2월안에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에서 1,600리 떨어진 유주(베이징)에 도착하도록 명했다. 이세적은 행군을 계속해 3월에는 영주를 떠나 고구려의 국경을 넘어 회원진으로 가는 척 하다가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통정진(신민부근)으로 나왔다. 그는 4월 초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는데, 현도성에 있던 고구려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수호했다. 4월 5일에는 부총관 이도종이 수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성에 도착했으나 신성 역시 성문을 굳게 닫고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4월 15일 이세적 이도종은 신성 서남에 있는 개모성을 공격했다. 이 성은 2만 여명의 군민과 10만여 석의 양곡이 비축돼 있었고 면적은 20리 남짓한 평지성이었다. 개모성의 군민들은 당나라 군대 수만명의 공격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함으로써 당나라 행군총관 강행본을 사살하는 등 많은 손실을 안겼다. 하지만 역량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4월 26일에 함락됐다.

개모성 함락이후 당나라 강하군왕 이도종과 행군총관 장군예 부대는 신성 부근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부대 앞에 새로운 고구려 부대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새로운 고구려 부대를 맞은 당나라 군대는 당황해 급하게 참호를 파고 방어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고구려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나라의 행군총관 장군예는 패하고 도망쳤으며, 당나라 군대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 때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서 정황을 살피던 이도종은 고구려의 일부부대가 채 대오를 정비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포착하고 수하부대를 급파해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고구려 군대 천여 명이 살상 당했다. 당나라 역사가들은 이도종이 고구려군 천여명을 살상한 것을 두고 645년 고구려- 당 전쟁의 3대전투로 내세우면서 당나라군의 대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승자는 당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였다. 고구려군은 천여명이 살상 당했지만, 당나라 군대는 수천명이 살상 당했을 뿐 아니라, 이 전투의 지휘자였던 당나라 행군총관 장군예는 전투에 지고 도망가 겨우 살아남았다. 이 전투의 승자가 누구인가는 장군예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다는 사실로서도 충분이 입증된다. 이후에도 신성일대에서는 양자간의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됐다.(신성전투)

영주도독 장검은 요하를 건너 건안성으로 갔다. 건안성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군은 용맹스럽게 싸워 당나라 군대 수천 명을 요절냈다. 한편 장량의 수로군은 3월 말경 산동반도를 떠나 요동반도 끝에 있는 비사성(요녕성 대련시 금주구에 있는 고구려 성)을 공격했다. 행군총관 정명진의 부대 수만명이 이 공격에 가담했으나 난공불락의 요새라 공격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이 성안에는 군대와 백성을 합쳐 불과 8000명밖에 없었다. 이 성의 방위자들은 30여일이나 성을 방어해 당나라 침략군에게 커다란 손실을 끼쳤다. 비사성 군민들의 영웅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역량의 격차가 너무 심해 5월 2일에 성을 내주고 말았다.

비록 비사성을 내주었지만, 비사성 북쪽에 조밀하게 포진돼 있었던 고구려의 임고산성, 위패산성(현 오고산성, 요녕성 신금현 동쪽 성태향 ), 고려성자( 현 고려성산성, 요녕성 신금현 서쪽 묵반향), 노백산성( 요녕성 신금현 서쪽 원태향) 등 수많은 성들은 당나라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장량의 수로군은 다시 바다를 통해 요하 하구에 도착해 건안성 서쪽에 상륙했다. 상륙한 장량의 군대가 진을 치고 성을 공격할 진지를 꾸리고 있을 때 고구려군대의 기습을 받았다. 장검의 군대를 쳐서 크게 승리했던 건안성의 고구려군은 기세등등해서 새로 나타난 장량의 수로군을 불시에 기습공격을 가했다. 본래 비겁한 자였던 장량은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얼이 빠져 그저 호상(휴대용 접이의자)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기만 했다. 멀리서 그를 바라보던 그의 부하들은 그가 대담해서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는 줄로 착각하고 부총관 장금수의 지휘를 받아 겨우 대오를 수습했다고 한다. 장량의 수로군은 수천 명의 손실을 내고 가까스로 퇴각해 도로 배를 타고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장량은 후에 이 전투 패전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당나라 역사가들은 건안성 전투를 3대 전투의 하나로 규정하고 마치 자신들이 승리한 전투처럼 내세웠지만 그 전투 양상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할 수는 없었다(건안성 전투).

▲ 요동성의 구도

4월 26일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은 5월 2일에 요동성을 포위했다. 한편 당태종은 4월 10일 유주를 떠나 10일후에는 북평(우북평군)에 도착했고, 이어 5월 3일에는 요하하구 200리 진펄지대에 들어섰으며, 사흘 만에 그 곳을 지나 5월 10일에는 요하를 건넜다. 요하를 건넌 당태종은 다리들을 철거하고 배수진을 침으로서 자기 군사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요동성 서남쪽에 있는 마수산에서 요동성 공격전투를 지휘했다. 요동성이 포위됐다는 소식을 접한 고구려 총지휘부에서는 5월 8일에 국내성과 신성 방면에 있던 보병과 기병 4만명을 보내 요동성을 지원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요동성 지원은 수많은 적군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있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요동성 군민들은 수나라 침공 때의 기세를 잃지 않고 결사 항전했다.

요동성 포위전투는 맹렬하게 진행됐다. 당태종은 5월 12일 중무장한 기병을 데리고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적군은 요동성을 수십 겹으로 포위했으며, 제1군 총관 장사귀는 성 서쪽에서 공격하고 그 일부는 흙은 날라다가 요동성 주위의 해자를 메꾸었으며, 포차로 300근 짜리 돌을 날려 성벽을 파괴했다. 이에 맞서 고구려군은 성위에 나무를 쌓아 성벽을 만들어 그것을 막았다. 그러자 당나라군은 당차(충차)를 갖고 성벽위에 있는 다락집들을 파괴했다. 이와 함께 지하로 굴을 파서 성벽을 허물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고구려군에게 발각돼 실패했다. 이러한 공방전은 보름이상 계속됐다.

치열한 공방전이 보름이상 계속되고 있었던 중 5월 17일에 이르러 당나라 침략군은 세차게 불어오는 남풍을 이용해 여러 대의 불화살을 날려 요동성 서남쪽 각루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어 불길이 급속히 번졌으며, 주위는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침략군은 성벽을 타고 넘어갔다. 성안으로 침략군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고 성안 곳곳에서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요동성 군민들은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수십만 명의 당나라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요동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17일 동안 버틴 것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주변 일대 고구려 성들에서 방어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줬다. 요동성 전투가 끝난 후 당 태종은 그곳에 요주를 둔다고 선포했으며, 고구려 군민들 중 일부를 당나라로 끌고 갈려 했다. 이것은 침략의 목적이 고구려 땅을 빼앗아 당나라 영토로 만들고 고구려 민중들을 노예화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실토해 주었다(요동성 전투).

▲ 아직도 튼튼히 남아 있는 백암성의 모습

당나라 침략군은 안시성을 공략한 이후 5월 28일에는 백암성(연주성)을 공격했다. 백암성은 둘레가 2,600m되는 그리 크지 않은 성이지만, 태자하를 자연해자로 삼고 그 북쪽에 있는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쌓은 견고한 요새로서 사람이 들어서서 공격할만한 곳은 서남쪽 50보밖에 되지 않는다. 당나라 군대는 백암성에서도 포차와 충차를 동원해 백암성을 공격했다. 당시 성내에는 2000여명의 군민들만이 있었으나 용감하게 싸웠다. 이 때 오골성(수암)에 있던 고구려군 1만여명이 백암성을 지원하려고 달려왔다. 이에 고무 받은 성안의 군사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 성밖으로 나가 당나라군대를 포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의 용사 고돌발은 당나라 행군총관으로 용장으로 이름났던 설필하력의 허리를 짧은 창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또한 적의 우위대장군 이사마는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원병들은 당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백암성내로 진입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지원군이 백암성내로 진입하는데 실패하자, 백암성주 손벌음은 비겁하게도 적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당태종은 백암성을 암주로 고치고 손벌음을 그 자사로 임명했다(백암성 전투).

전쟁의 초기 양상은 요동성, 백암성 등 몇몇 중요한 고구려 성들이 함락됐지만, 신성을 비롯한 천리장성 계선의 여러 성들에서 치열한 대결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요동성과 백암성의 함락은 고구려에게 하나의 커다란 위기였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양측의 공방전은 전 전역에서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었고, 적아간의 힘의 우열이 결정적으로 가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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