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수나라 300만 대군을 물리친 대규모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당태종이 도발한 새로운 침략전쟁에 휘말렸다. 618년 수나라가 망한 이후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이연과 이세민 부자는 당나라를 세웠다. 당나라는 건국 직후에는 국내 질서를 안정시키고, 북방정세를 관리하느라 고구려에 대해서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나자 태도가 돌변해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고구려 천리장성의 축에 있는 무순지역의 신성

고구려 침략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

618년 중국대륙에서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622년 당 고조는 고구려의 환심을 사고 자국 내에서 민심을 얻을 요량으로 전쟁포로 교환을 제기했다. 원래 당 고조는 전쟁포로 교환 제기 국서에서 칭신조항(고구려왕을 당나라의 신하의 나라로 표현하는 것)을 빼자고 했는데, 배구 등 신하들이 강력히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 무슨 요동군왕이니, 대방군왕이니, 낙랑군왕이니 하는 식으로 우리나라 삼국의 왕들을 불렀다. 624년 당나라는 고구려에 전임 형부상서 심숙안을 사신으로 보내 소위 ‘책봉조서’라는 것을 전달하는 한편 천존상(도교의 최고신의 상)과 도사들을 보내 ‘노자 도덕경’을 강의하도록 했다.

626년 6월 당나라에서는 이세민의 정변이 발생했다. 이세민은 정변을 일으켜 태자 이건성을 죽이고 자신이 태자로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아버지인 당 고조를 밀어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627년 당나라 지배층들은 내외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고구려에 대한 정책을 바꿔 침략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이러저러한 내정간섭 책동을 벌였다. 당시 고구려는 고구려- 수나라 전쟁을 틈타 신라에게 빼앗겼던 땅을 되찾기 위해 계속 남으로 진출하고 있었을 때였다. 『삼국사기』에 629년 낭비성(충북 청원)에서 고구려 신라가 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620년대에 고구려가 다시 소백산 줄기 계선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또한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백제는 당시 주로 신라를 주적으로 내세우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고구려와의 적대관계도 계속됐다. 따라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당나라에 가는 것을 방해했다. 백제와 신라는 이를 빌미로 삼아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세민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626년에 주자사라는 인물을 신기시랑 직책을 부여하고, 고구려에 파견했다. 주자사의 임무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화해를 중재하는 것이었다. 말이 중재였지, 이것은 노골적인 내정간섭이었다. 외교적 강압을 통해 고구려를 굴복시키자는 심보였다. 이세민은 이때부터 고구려 침략을 결심하고 있었다.

굴욕적 타협을 추구한 영류왕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이다. 중국에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을 때 고구려에서는 수나라에 대해 강경대응정책을 펼쳤던 영양왕(재위기간 590~618년)이 죽고, 그 아우인 고건무(영류왕, 재위기간 618~642년)가 왕위에 올랐다. 고건무(영류왕)는 수나라와의 전쟁 후유증을 수습하는 한편 고구려- 수나라 때 신라가 탈취해 간 고구려 남부지역을 되찾는데 힘을 집중했다. 또한 졸본에 있는 시조 묘(사당)을 찾아가 제사도 지내고 민심을 수습하는 조치도 취했다. 하지만 그는 대당 강경노선을 취했던 영양왕과 달리 타협노선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새로 들어선 당나라의 내심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당나라가 힘이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충돌보다는 타협을 선호했다.

타협노선으로 기울어진 영류왕은 당나라의 책봉조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직접 노자 도덕경 강의를 듣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불교 도교의 이론을 배우게 해달라고 당나라에 요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영류왕과 그를 둘러싼 고위 관료들 내에 당나라에 대한 사대적이며, 투항주의적인 사상이 싹트고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고구려의 영류왕을 비롯한 고급 귀족관료들은 새로 중국대륙을 통일한 당나라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당나라의 ‘부당한 중재’를 수용했다.

당나라는 고구려가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자, 쾌재를 부르며 계속 압박하는 데로 나아갔다. 628년에는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나라의 지형을 그린 지도를 당나라에 보냈다. 물론 지도 자체야 대충 그린 것으로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당나라를 대하는 고구려 영류왕과 고급 귀족 관료들의 태도였다. 나라의 지도는 당시로서는 국가의 일급비밀에 해당되는 군사자료인데, 당나라가 요구한다고 그것을 덥석 넘겨주었다는 것 자체가 나약성과 타협성의 직접적 발로였다. 당나라 역시 이러한 점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무리한 요구를 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나약성과 타협성을 간파한 당나라는 631년에는 광주 도독부 사마 장손사를 고구려에 보내 수나라 침략군 전사자들의 해골을 걷어 모아 묻고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또 전승기념물인 경관(적군의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흙으로 덮어 놓은 것)을 헐어버리도록 강요했다.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던 영류왕은 이에 응함으로서 고구려 사람들의 애국적 기세에 찬물을 끼얹었다.

▲ 문순 신성산(고이산성)에서 바라본 만주 벌판

굴욕적 타협노선은 당나라의 침략야욕만 키워

계속된 양보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의 침략적 야욕이 노골화되자 고구려의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 위협에 대처해 방어시설을 꾸리고 강화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631년부터 646년까지 16년간에 걸쳐 부여성(농안)에서부터 서남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1000여리 구간에 장성을 쌓았다. 천리장성 축조는 전국의 남자 장정들을 총동원한 방대한 공사였다. 이밖에도 요동지방, 서북조선 지방의 여러 성들을 보수 개축하였다. 고구려 민중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축성공사에 힘을 다 바쳤으나 영류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은 계속 나약한 입장을 버리지 않았고, 이것은 역으로 당 태종의 침략 야욕만을 키워줄 뿐이었다. 640년 영류왕은 세자 환권을 당나라에 보냈으며, 또 고구려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고구려 침략을 마음속으로 굳힌 당 태종은 641년 직방랑중 진대덕을 ‘사신’으로 분장시켜 고구려의 성곽 방어시설을 탐지해오도록 조치했다. 직방랑중은 병부 산하 부서의 벼슬로서 천하의 지도, 성곽, 진수(방어요충지)의 숫자들과 군, 국까지의 거리 그리고 사방의 이민족들의 귀화사무를 맡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군사비밀을 탐지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구려에 와서 산수구경이라는 미명하에 관리들에게 뇌물을 퍼부어 주면서 전국 각지를 다 세세히 관찰하고 다양한 군사기밀들을 탐지해 갔다. 그는 당나라로 돌아간 후 정탐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고 당태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타협노선에 분개한 연개소문의 정변

당시 고구려 민중들은 영류왕을 비롯한 집권 세력들의 대당 투항주의적이고 타협적인 정책에 분개했다. 귀족들 내부에서도 당나라에 대한 굴욕적 평화유지정책, 투항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다. 당시 서부대인이었던 연개소문은 그중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성격이 과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연태조(연나부 대인이며 막리지)가 죽은 이후 서부대인 후계자를 뽑을 때 서부 귀족들이 반대해 뽑히지 못했다. 그 후 연개소문이 다시는 난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자 비로소 서부대인으로 뽑혔다. 그는 이처럼 성격이 과격했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만은 드높았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한 집권층들의 투항주의적 태도를 증오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귀족들을 은밀히 모아나갔다.

642년 초 국왕과 측근들은 연개소문의 이러한 행동을 간파하고 그를 중앙정계에서 멀리 떼 놓기 위해 천리장성 축조를 책임진 감역관으로 임명해 지방으로 내쫓았다.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 감역관으로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간 이후에도 계속 자파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그해 10월 연개소문은 평양으로 돌아왔다. 연개소문이 돌아오자, 영류왕을 비롯한 대당 타협노선 추종세력들은 그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연개소문은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당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선수를 쳐 부병(자신의 관할 부대 병사들)의 열병식을 개최하고, 귀족관료들을 모두 초청했다. 열병식 행사이후 술판을 크게 벌여 놓고, 귀족들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갈 때를 노려 정변을 단행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한 대당 타협노선을 추종하는 귀족 관료 100여명을 그 자리에서 처단해 버리고, 영류와의 조카를 왕으로 내세웠다. 이 왕이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이다. 그리고 자신은 막리지가 돼 국가의 주요 실권을 장악했다.

연개소문의 정변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두고 여러 가지 논의가 가능하다. 분명히 권력 쟁탈전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권력을 쥐기 위한 것으로만 봐서도 안된다. 무엇보다도 당시 내외 정세를 둘러싸고 두 개의 대립되는 흐름이 존재했다. 당나라가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대당 강경 투쟁노선과 대당 타협 투항노선이 충돌하고 있었다. 당시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 투쟁노선을 대표하는 귀족관료로서 대당 타협 투항노선을 일소하고 나라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단순한 권력 쟁탈전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권을 옹호 고수하려는 진보적 정변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고구려는 당나라에 당당하게 맞섰으며, 고구려- 수나라 전쟁시기 신라가 점령했던 죽령 이북 500리 땅을 대부분 되찾은 성과를 거뒀다. 또한 백제와의 해묵은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협력관계를 구축해 신라- 당 연합세력에 맞섰다. 그 결과 645년, 647년, 648년 당나라의 연이은 침략전쟁에서 번번이 승리해, 고구려의 힘과 기개를 널리 떨쳤다. 또한 650년대에 있었던 당나라 군대의 침입도 제때에 격퇴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연개소문이 나라 안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었던 661년말~662년초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대군이 평양성 근처까지 침략했을 때에도 침략자들을 여지없이 깨부수고 승리했다. 이처럼 연개소문이 살아 있었을 때에는 고구려는 동방에 우뚝 솟은 군사강국으로서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동아시아의 최대 강자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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