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의 빈민스토리(1)

연재를 시작하며 

노점상 단체가 만들어지고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노점상 문제를 이해하는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는 지적이 있었다. 다양한 사건을 중심으로 소개됐지만, 총체적으로 정리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억압받는 자들에 의해 발전해 왔다면 도시빈민의 저항은 또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고 이어져야 한다. 집 앞에 우뚝 버티고 서있는 나무처럼 익숙하기에 어찌 보면 간과했던 노점상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노점상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더불어 빈민 운동사에서 이들의 활동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다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 봤으면 한다.[필자 최인기]

 

▲ 2016년 12월 24일 광화문 촛불집회와 노점상[사진 : 최인기 제공]

1. 노점상  '노'는 이슬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노점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서히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하듯 도시도 항상 변한다.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는 것이 도시다. 그 변화의 속도에 맞춰 거리의 노점상들도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고 또 사라지기 때문이다. 

“노점상의 어원을 찾아보니 ‘길가의 한데에 물건을 벌여 놓고 하는 장사. 또는 그런 장수’라 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노점상의 첫 번째 글자 길 ‘노(路)’로 알고 있는데, 이슬 ‘노(露)’자다 그러니까 노점상(露店商)이란 이슬을 맞으며 고달프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 철거민과 노점상 단체에서 빈민운동을 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김흥겸 선배의 이야기다. 그는 그때 위암에 시달리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술은 먹지 않고, 풀어냈던 이야기다. 거리에서 이슬을 맞고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이슬 노(露)자를 써서 노숙인(露宿人)이라 부른다. 종합해보자면 ‘이슬’은 가난한 사람들의 공통된 상징이 된다.

2007년 11월 11일 경기도 고양시에서 벌어진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남편은 매일 매일 건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제가 파는 붕어빵 마차에 들렸습니다. 어제는 덩치 큰 여러 명의 용역반이 저를 둘러싸고 마차를 부수자 길가에 반죽이며 팔다 남은 붕어빵이 흩어졌어요. 이 모습을 남편이 목격했습니다. 저와 남편이 바닥에 뒹굴며 단속에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구경만 하더군요. 그리고 남편은 평소와는 다르게 밤늦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보 미안해 당신에게 정말 미안하다.’, ‘ 세상 살기 힘들다.’ ‘장사를 못하니 나라도 나가 막노동이라도 해야지…….’라며 유서를 써놓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아내의 붕어빵 마차가 단속당하는 것을 지켜본 고양시의 노점상 이근재 씨는 공원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던 것이다. 단속이라는 위협적인 상황에 놓인 노점상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일 것이다. 이미 이전에도 그동안 수차례 노점단속으로 시달려 온 상태였다. 당시 고양시는 노점단속 비용으로 31억이라는 혈세를 쏟아붓고 있었다. 한 사람의 나약한 노점상의 비관적인 자살이라고만 바라볼 문제인가? 누가 한 노점상의 가정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갔을까?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우리의 문제설정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시각에서 노점상을 이해하고 이들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들이 서로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봐야 한다. 개별적 시선을 넘어 붕어빵 노점상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가난을 더욱 부채질하는 무차별한 노점단속 때문은 아닌지, 왜 노점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 이를 먼저 보려 노력해야 한다. 어느 사업장이나 노동자들이 있듯이 한국사회속에서 노점상이란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 역사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2. 노점상의 형성과 역사

노점상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불가능하다. 아마도 오랜 예전부터 마을 장터를 중심으로 천민들이라 불리는 가난한 이들의 경제활동의 근거지가 되지 않았을까? 지방 나름의 특정 상품이 재배되고, 그 지방의 물품들이 자유롭게 거리로 나와 마을 장터가 형성되었다. 나아가 같은 품목이라 할지라도 지방마다 재배 되고 만들어지는 한정된 물품은 가격이나 가치가 천차만별이었을 것이기에 더 큰 장터가 형성되고 점차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을 것이다. 

▲ 조선후기 노점상[사진출처 : 서문당]

조선 초기 각 지방의 특산물, 농어물, 공산품들을 국가에 상납했지만, 중기 이후 세금을 쌀로 내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때문에 지방의 특산물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가 직접 혹은 지방관청을 이용해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마을 장터에서 지방 특산물이나 농작물, 공산품들이 유통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몇몇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장터가 발전된다. 이제는 생존을 위한 유통 형태에서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화된 시장은 자신의 신체 노동으로 전국을 활보하며 유통을 담당했던 보부상과 난전 상인 즉 지금의 노점상, 그리고 본격적으로 상업을 본분으로 삼고 특정 장터에서 장을 펼치던 상인으로 발전한다. 

현재의 ‘떴다방’을 연상시키는 보부상의 역사적 문헌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물교환 형태의 소규모상인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고려 후반 조선 초부터 보부상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말이다. 
‘봇짐장수'라고도 불리는 보상은 기술적으로 발달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더 나가는 잡화를 취급하여 보자기에 싸 들고 다녔다. ‘등짐장수’라 불리는 부상은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나무, 그릇, 토기 등과 같은 생활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위주로 판매를 하였다. 그들에게는 강력한 규율과 체계를 갖춘 ‘상단’이라는 조직이 제각기 존재했다.1)  주1)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난전’이란 허가받지 않은 상태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현재의 ‘노점상’을 뜻한다. 이들을 비하하는 말로 뒤섞여 떠들어 댄다는 말의 ‘난장판’이라는 말은 난전에서 유래한다. 불법적인 거래로 상업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난전이 형성되는 장터는 상권이 만들어 지면서 공식적인 상인들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론이 모이고 흩어지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지금의 노점상처럼 난전에 대한 단속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후기 ‘금난전권(禁亂廛權)’은 말 그대로 난전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난전’을 적발할 경우 폐쇄하고 판매하던 물건도 압수했다. 일부 공식적인 시전상인은 난전 단속을 위해 ‘자경단’과 같은 자체 조직을 거느리기도 했다. 정부 역시 직접 단속에 나서기도 했는데 적발한 물품은 벌금 명목으로 몰수했고, 물품이 벌금보다 적을 경우 난전 상인을 곤장형으로 다스리기도 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황평우에 따르면 

▲ 조선후기 난전으로 불리던 노점상 [사진출처 : 서문당]

“1700년대(숙종 연간) 전쟁을 겪고 기후변화까지 겹쳐 피폐한 농민들이 한성으로 몰리자 남대문 근처에 가난한 사람들의 숙소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자신들의 물건을 사고파는 장이 형성되었다. 도시 상업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이때 본격적으로 가가(假家) 즉 임시로 지은 집인 ‘난전’이 생겨나며 상거래 행위가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결국 민중들이 스스로 만든 남대문 칠패 시장, 동대문 바깥에 이현시장 등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한다.”고 전한다. 

특히 노점상과 보부상인은 소작농이나, 저소득 상인, 가난한 천민들의 생존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 스스로 거리로 나와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소작농과 겸업 하면서 물건의 유통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농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삼고 중시한 농본주의 사회였기에 상업을 억제했다. 백성들이 이문만 쫓고 농업은 등한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가장 천시받는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상업에 대한 국가 통제가 커서 수도인 한성에서는 허가받은 상인만이 물건을 팔 수 있었다. 지정한 곳 외에 장을 개설하고 상거래 하는 것을 금지했다. 조선 후기 정부로부터 특권이 부여된 6개의 큰 시전이 종로 1가와 2가에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취급하는 물건 종류를 다른 상인이 거래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 금난전권을 부여했다. 즉 육의전은 특권적 어용 상인의 단체들이었다.2)  주2) 네이버 [지식백과] 육의전 [六矣廛] (경제학사전, 2011. 3. 9. 박은태)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토록 막강한 상업적 특권을 시전상인에게 부여했던 것일까. 
조선 시대 시전상인은 물건을 백성에게 판매하는 한편 일정한 형태의 국역을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거래세에 해당하는 상세와 시전상점을 임차한 대가로 세금을 국가에 내야 했다. 또한 왕실이나 관아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의무도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정부에서 행하는 부역에도 참여해야 했는데 국가 차원의 행사, 공공시설의 조성 및 개·보수, 환경미화 등의 사업에 시전상인이 동원됐다. 즉, 정부는 재정적·행정적 이유에서 시전상인의 역할이 필요했다.3)  주3) 한국경제 [역사 속 숨은 경제이야기] 시전상인의 독점권을 철폐한 신해통공(辛亥通共) (2016. 9. 2. 정원식)

이렇게 본격적으로 유통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생겨나고 국가는 그들에게 일부 품목에 대해 ‘독점권’을 인정하면서 지방에 국한되어 있던 상품들이 교통의 발달로 폭넓게 타지방으로 활발히 유통되거나 사재기를 통해 더 큰 이익을 보게 된다. 금속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상업 발전을 더더욱 촉진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 접어들어 양반과 상민의 계급제도 붕괴를 가속하고 자본의 성장에 원인이 된다. 

필자 최인기는 ‘민주노점상전국연합과 전국철거민연합’으로 결성된 ‘빈민해방실천연대에서 수석부위원장’ 을 겸임하고 있다. 

현장을 지키며 카메라를 드는 이유는 ‘더불어 사는 사회,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사진 책《청계천 사람들 : 리슨투더시티》외 도시빈민 관련된《가난의 시대 : 동녘 》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 동녘 》 

《그곳에 사람이 있다 : 나름북스 》공저로《누리하제 : 노나메기》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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