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57/끝)
1) 현대철학의 흐름
이제 결론을 지을 때가 왔다. 앞에서 자유의지의 여러 형태 가운데 자주성은 최종적인 형태라 했다. 이런 논의는 주체철학을 현대철학의 여러 흐름들 속에서 자리 잡게 해준다. 간단하게 우리 철학의 흐름을 살펴보면 이 점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80년대는 마르크스주의와 계몽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인식된 것을 자율적으로 실행하려 했다. 90년대부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바람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자율성을 강제라 보면서 기피했고, 감각과 욕망을 해방하자는 구호에 끌려 들어갔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반발하면서 무정부의가 바람을 일으켰다. 한때 마르크스적 계몽주의자였던 사람들(이진경, 조정환)이 들뢰즈나 네그리 등의 무정부주의 철학을 받아들였다. 그 철학이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한 철학이다.
앞에서 자주성 개념이 자유주의, 자율성, 자발성 등과 관계해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보았다. 이런 관점을 통해 주체철학은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들뢰즈 및 네그리 등의 철학과 서로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 극복
이제 우리가 본래 제기했던 근본 문제로 돌아가자. 마르크스주의는 60년대 이후 혁명성을 상실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원인이 지금까지 제시되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마르크스주의는 도덕적 차원에서 자율성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사회적인 요구, 즉 계급해방은 가장 가치 있는 것, 즉 우리가 실현해야 할 이념이다.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민중에 대한 계몽이 필요하다.
여기서 계몽의 원리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욕망에 호소하는 것이다. 즉 그런 계급해방이 당신과 당신의 아들, 딸에게 이익을 준다, 이런 식이다. 합리적인 설득이니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계몽은 허점을 갖고 있다. 그런 계몽은 결국 사람의 이익과 욕망에 호소하는 것이니, 계몽은 자기의 이익과 욕망에 대한 기대를 더욱 강화한다. 그 결과 자기 이익이나 욕망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힘든 계급해방보다는 차라리 쉬운 현실 안주를 택하고 만다.
이런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철학은 자주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곧 어떤 결과를 통해 얻는 즐거움보다 그 행위 하는 과정 속에서 얻는 즐거움을 말한다. 행위의 즐거움, 이를 위해 자기가 선택한 것을 스스로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체철학이 인간론 특히 실천적 의지에서 자주성을 강조하더라도 세계관이나 역사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님을 잘 이해해야 한다. 주체철학은 100년에 걸친 마르크스주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다.
3) 진리는 개시성이다
이제 사람들이 이런 자주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 점과 관련해 나는 딱 한 가지만 마지막으로 말하려 한다. 그것은 지도자의 역할이다.
이 마지막 부분은 상세하게 설명하기보다 철학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려 한다. 하이덱거는 진리는 ‘개시성(開示性, Erschlossenheit)’이라 했다. 어떤 사물이 어떤 사물인지 알려면 그것을 비추는 빛이 있어야 한다. 빛 바깥에 어둠 속에서는 사물은 있어도 무엇인지 모르며, 나아가서는 심지어 존재하는가도 의심스럽다. 빛 속에 들어올 때 비로소 사물은 존재하고 동시에 그 빛을 받아 어떤 사물인지 드러난다.
그 빛, 그것을 철학자 하이덱거는 ‘개시성’이라 말한다. 개시성이란 무언가를 열어주는 것(개: 開), 보여주는 것(시: 示)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열어주고 보이도록 하는 빛, 그것이 모든 진리를 넘어선 진정한 진리라는 말이다.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집단이나 대중은 자주적으로 활동하기를 기대한다. 대중의 자주성은 자유롭게 방임한다고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자주성을 발휘하도록 해주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도자는 대중의 자발성을 열고, 보이게 만든다. 하이덱거적으로 표현하자면 개시한다.
개시성으로서 빛이 사물을 해치지 않듯이 지도자가 대중의 자주성을 개시한다고 해서, 대중의 자주성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빛이 사물을 사물로 만들듯 지도자는 대중의 자주성을 자주성으로 만든다.
비유적으로 말해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른다. 그 정도 이제 오랫동안 끌고 온 마르크스 백문백답을 마치고자 한다. 그동안 읽어준 독자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 지난 2017년 11월부터 1년2개월 동안 연재를 허락해준 이병창 교수님 고맙습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