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고구려- 수 전쟁, 그 첫번째

612년 수양제는 300만 대군을 동원해 자기가 직접 참가한 고구려 2차 침공을 개시했다. 이 전쟁은 수나라의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략전쟁 중에서 가장 격렬하고 치열하게 전개된 전쟁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영웅적이고 빛나는 승리를 쟁취했던 전쟁이다. 이 전쟁의 승리로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널리 시위함으로서, 민족사를 뜨겁게 빛냈다. 그 전쟁의 갈피갈피를 여기에 상세히 기록한다.

▲ 요양시에 있는 요양시 유지로 요동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됨

수양제의 침공준비

수양제는 598년 1차 고구려 침공의 패배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패배의 수치를 씻는다면서 새로운 침략전쟁 준비에 미쳐 날뛰었다. 수양제는 605년 농업과 교통운수를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장안에서 강도(양주)까지 대운하 건설을 밀어붙였다. 대운하 건설사업도 전쟁 물자를 원활하게 조달하려는 목적이 컸다.

605년 수양제는 불시에 거란족을 공격해 남녀 4만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것도 거란족이 고구려에 붙지 못하게 하려는 전쟁준비의 일환이었다. 또한 고구려와 전쟁 중에 북방에서 돌궐족이 침입해올 수 있다고 보고, 이를 방비하기 위한 예비조치로 100만명의 백성을 강제동원해 유림(섬서성 동북부)에서 자하(내몽고 화림격이현)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았다.

608년에 이르러 고구려와의 전쟁 준비를 더욱 노골적으로 벌여 나갔다. 수양제는 이 해에 북방 장성지대를 순찰하고 200만명을 동원해 유곡(유림의 서쪽) 동쪽에 장성을 쌓게 했다.

610년에 이르러 고구려 침공준비는 절정에 달했다. 수양제는 전국의 부자들에게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돈을 내 군마를 사서 바치게 했고, 병장기를 마련하게 했는데 정교롭게 만든 것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참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산동지방에는 따로 말을 키우는 전문 기구를 설치했다. 또한 유주총관 원홍사를 동래(산동반도)로 보내 300척의 배를 건조케 했다. 원홍사는 기술자들과 주민들을 강제로 내몰아 밤낮없이 배 건조 사업을 밀어붙였다.

611년이 왔다. 수양제는 이 해에 전국의 군사들을 탁군에 모이게 했으며, 군량을 탁군으로, 다음에는 노하진, 회원진(수나라 때 새로 설치한 요서군의 소속현들인데 그 위치는 조양부근으로 알려짐)으로 운반케 했고, 자신은 탁군의 임삭궁으로 나와 총지휘를 진행했다. 또한 강회(장강, 회수 사이)이남의 뱃사공 1만명, 노수 3만명, 영남(오늘의 호남, 광동, 광서)지방의 배찬수(작은 창으로 무장한 군사) 3만명을 징발했다. 하남, 회남, 강남지방에서는 융차(군사용수레) 5만대를 만들어 고양(베이징 남방)으로 보내게 했다. 이밖에도 녹차(사슴 한 마리를 실을 수 있는 작은 수레) 30만대를 만들어 두 사람당 양곡 3섬씩 싣고 회원진, 노하진까지 운반케 했다. 수양제는 612년 2월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하고, 612년 1월까지 수백만 대군을 탁군에 집결시키도록 지시했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전쟁 개시

612년 1월 2일 수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선전포고문(조서)을 발표하고, 2차 고구려 침공을 개시했다. 수양제는 탁군에 집결시킨 113만 8000명의 전투부대를 좌우 각각 12개군(군단) 합계 24개 군으로 편성해 여러 길로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지시했다. 24개 군단의 매개 군단에는 대장 1명, 아장 1명이 있고, 기병은 40대(1대는 100명)인데, 10대가 1단을 이루고 편장 1명을 두었다. 보병은 80대(약 4만명)인데 4단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밖에도 고취악대를 비롯한 보조 부대들과 치중부대가 단마다 따라가고 대장 직속, 아장 직속 군사들이 따로 있었다. 즉 기병 4000명에 보병 약 4만명으로 한 개 군단이 구성돼 있었다.

113만 3800명으로 이루어진 24개 군단은 612년 1월 3일부터 매일 한 개 군단씩 출발해 서로 40리 사이를 두고 행군했다. 그렇게 되니 군대의 깃발이 960리에 걸쳐 늘어졌다. 여기에 수양제 직속 6개 군단이 더 있어 그 대열이 길이가 80리나 되었다. 결국 30개 군단의 총길이는 1040리에 달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침략군의 총수는 전투부대와 후방부대까지 도합 300만명을 훨씬 넘었다. 그 밖에도 수나라 수군은 우익위대장군 내호아, 주법상의 지휘 아래 10만명 이상이 수백 척의 함선에 갈라 타고 서로 꼬리를 물고 수백리나 늘어서서 항행했다.

이처럼 수백만명의 군대를 동원한 전쟁은 전무후무했다. 이렇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전쟁을 치르려 했을 때 제기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당연히 후방 수송문제다. 수백 만 명의 병력을 몇 달씩 먹일 수 있는 수송능력과 수단이 당시 사회발전 단계에서 볼 때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속전속결밖에 없었다. 수양제도 당연히 이것을 알았을 것이며,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적 절대적 우세를 이용해 고구려를 일거에 굴복시키려는 속전속결 전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속전속결전략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고구려의 기본적인 방어 전략은 전통적으로 청야수성전술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이점을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보다 수적우세를 절대적으로 확신했다고 할까! 상대를 골라도 정말 잘못 골랐다.

2차 고구려 – 수 전쟁 전개 양상

수양제는 300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동원한 속전속결 전략과 수륙병진 작전으로 일거에 고구려를 제압해 버릴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612년 수나라의 300만 대군의 침공에 고구려 사람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며, 전선 사령부를 환도성(북평양성)으로 옮기고 주도면밀한 방어 작전 계획을 세웠다. 당시 고구려의 영양왕은 수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경한 투쟁원칙을 견지했으며, 을지문덕과 같은 뛰어난 명장들이 준비돼 있었다.

수양제의 대병력에 의한 수륙병진작전으로 전쟁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속전속결 전략은 병사들의 훈련부족과 전투능력 부족, 지휘의 통일성과 민활성 보장 불가, 식량을 비롯한 후방 수송물자조달의 어려움 등의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군 지휘부는 수나라 군대의 이러한 약점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전선, 전방 방어를 강화해 시간을 쟁취하고, 그 사이 요하 동쪽에 촘촘히 배치된 성곽들을 보수해 방어력을 강화해 적의 진출을 좌절시키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 즉 속전속결 전략에 지공전략으로 맞받았던 것이다. 고구려 지휘부는 전쟁이 장기화되면 강제로 침략전쟁에 끌려온 수나라 군사들 내에서 동요가 발생해 싸우지 않아도 스스로 붕괴될 것이라고 타산했다. 바로 그 때 총반격으로 나가면 적들을 쉽게 격멸 소탕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봤다.

고구려군은 처음 요서 서쪽에 나가 있었으나, 대규모 부대가 밀어닥치자 2월 초경 대릉하 동쪽 계선으로 전략적 후퇴를 단행해, 3월 초 무려라성을 비롯한 대릉하 동쪽 계선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본격적인 대규모 첫 전투는 무려라성을 비롯한 대릉하 동쪽 계선에서 벌어졌다. 이경이 지휘하는 적의 선봉부대는 무려라성을 함락시키는 데만도 10여일이 걸렸다. 이처럼 수나라 침략군은 의무려산 계선에서 고구려군의 방어에 부딪혀 10여일간이나 진격하지 못하고 있다가 3월 초순경에야 요하 서쪽 신민부근에 도착했고, 3월 중순경에 이르러 기본 부대들이 요하 서쪽에 집결했다. 그 사이 고구려 군은 요하 동쪽 기슭일대의 방어진을 강화했다.

요동성 전투 승리

▲ 요양(요동)박물관에 있는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에서 발견된 요동성총(遼東城塚)의 성곽도(城郭圖)

3월 19일 수나라 군대는 3개의 배다리를 만들어 요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이가 짧아 반대쪽 기슭까지는 한길나마 부족했다. 적장 우둔위 대장군 맥철장은 물속에 뛰어내려 기슭으로 올라갔으나,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거꾸러지고 뒤 따라던 자들도 모두 전멸했다. 적군은 황황히 배다리를 회수해 이틀 동안이나 수리해 길이를 늘려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요하 동쪽 기슭에서 튼튼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군대의 격렬한 반격에 부딪혔다. 고구려 군대는 언덕위에 올라가 활쏘기, 쇠뇌사격으로 도하하려는 수나라 군대를 격살했다. 그리고 강을 건너 상륙하려는 적군들과는 격렬한 창격전과 육박전을 벌여 타격을 가했다. 고구려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수나라 군대의 요하 도하작전은 한 달 가량이나 소요됐다.

고구려군의 격렬한 반격에 부딪혀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4월 16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요하를 건널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 역사책들에서는 이를 다르게 써놓았다. 〈자치통감〉에는 3월 21일 이후 곧 바로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포위한 것처럼 써놓았고, 〈수서〉본기에는 수 양제가 ‘갑오일(3월 16일)’에 요수의 다리까지 도착한 것으로 해 놓았고, ‘4월 갑오일’에 요수를 건넌 것처럼 써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들은 사실과 다르다. 수양제는 4월 27일까지도 요서군 유성현 임해둔(산해관부근)에 머물러 있었으며(〈수서〉권 76 우작전), 4월에는 갑오일이 없다. 3월 15일 갑오일 이후 처음 있게 되는 갑오일은 5월 16일이었다. 실제 고구려군은 한 달 가까이 요하동쪽 계선을 사수했다. 요하 동쪽 계선을 사수하면서 도하하려는 수나라 군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4월 16일에 철수했다. 그리고 신성,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건안성 등 견고한 방어요새로 들어갔다. 수나라 군대는 4월 16일에야 요하를 건넜다. 이것은 수양제가 612년 5월 17일에 내린 대사령 조서 (〈문관사림〉권 669 사유 제5기사)에서 4월 16일 새벽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통해 입증된다. 요하도하가 전쟁의 중요한 전환적 계기로 되었기 때문에 이 날을 기준으로 사면령을 내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나라의 요동성 포위 공격 전투는 대략 4월 말에서 5월 초에 시작됐다. 적군은 여러 가지 공성무기들을 동원해 밤낮없이 요동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고구려군민들은 견인불발의 의지로 완강하게 성을 지켰다. 당시 요동성은 평지성이었지만, 성벽을 높이 쌓았고, 성의 서쪽 남쪽에 큰 해자를 파고 태자하를 끌어들여 흐르게 했다. 또 주변에는 가까운 곳에 2개 이상의 보조성들이 배치돼 있어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꾸며져 있었다. 수나라군대의 완강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이 끄덕하지 않자, 5월 16일에 요하를 건너왔던 수양제는 초조해졌다. 수양제는 6월 11일에 직접 요동성 남쪽에 가서 성을 바라보며, 여러 장수를 모아놓고 “내가 수도에 있을 때 공들이 다 내가 직접 오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것은 공들이 전투에서 패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였겠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짓을 보아 공들을 참형에 처하기 위함이다. 지금 공들은 죽음이 두려워 힘을 다해 싸우지 않고 있으니, 내가 공들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인가?” 라고 으름장을 놓으니, 여러 장수들이 무서워서 사시나무 떨 듯 했다고 한다. 수양제는 요동성 서쪽 5~6리 되는 곳에 육합성을 쌓고 여기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전투는 요동성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요하계선 전투 이후 고구려군은 요동성 외에도 요하동쪽 산간지대의 서쪽에 건설된 최진보산성(철령시에서 남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최진보향 범하 북안의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청룡산산성(철령현 최진보향 장루자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위치의 범하강 남쪽 기슭에 자리한 고구려 옛 성), 석태자산성(심양시 동릉구 만당향 석대자촌에 위치한 고구려 산성), 신성(요녕성 무순시에 있는 고구려 산성으로 현재 고이산성으로 불려지고 있다), 개모성(요녕성 심양시 소가둔구에 위치한 고구려 산성으로 현재 탑산산성으로도 불린다), 영안대고성(무순), 마총둔산성(요녕성 심양시 소재), 백암성(요양시 등탑현 동남쪽 대요향 소재, 현재 연주산성으로 불림), 석성(요양동쪽 위치), 고려채(요녕성 안산시 소재), 안시성(요녕성 해성현 영성자촌 소재, 현재 영성자산성), 건안성(개주에서 동북방으로 7.5km 지점에 있는 요녕성 청석령향 고려성산촌에 위치) 등 견고한 방어성들로 철수해 장기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무력이 많았던 수나라 침략군은 이러한 여러 성들도 요동성과 같이 공격했다. 하지만 고구려 군사들은 용감히 싸웠으며, 각기 성들을 사수했다. 요동성 방위자들은 몇 달 동안 수십만 대군의 포위공격을 물리치는 격전을 거듭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나라 군대에 떼죽음을 선사해주었다.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 방위자들의 영웅적 투쟁에 의기소침했을 뿐 아니라 겁을 먹고 궁지에서 허둥거렸다. 수양제는 자신도 언제 고구려군의 기습을 당할지 몰라 육합성을 해체하고 요동성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으로 철수하는 추태를 연출했다. 요동성 방위자들의 투쟁은 6월 중순 이후에도 의연히 계속됐다. 그들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달려드는 침략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적들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전반적 정황은 고구려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됐다. 요동성 방어전투의 승리로 수양제의 속전속결 전략은 파탄났다. 요동성 방어전투는 612년 전쟁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