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56)

1) 자유의지의 발전 

앞에서 실천적 의지 속에는 욕망과 자유의지가 대립한다고 했다. 욕망이 결과를 강조한다면 자유의지는 그 행위를 하는 과정, 행위 자체를 강조한다.

이런 자유의지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개념과 구분된다. 여기서 자유란 욕망에 몸을 맡기는 자유일 뿐이다. 부르주아적 자유 개념은 말로만 자유의지일 뿐 실제로는 욕망을 추구하는 중도반단의 자유의지일 뿐이다.

인간에게 실천적으로 욕망의 힘 외에 이런 자유의지가 정말로 존재하는가? 이런 의문 앞에 철학자들은 아직도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복잡다단한 철학적 논쟁은 철학자들에게 맡기고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철학적 논증이 어떻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주성 개념이다. 도덕적 자주성의 개념은 넓게 본다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유의지 중의 하나이다. 자유의지가 유개념이라면 자주성은 종개념이다. 자유의지라는 유개념에서 자주성이라는 종개념이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보자.

2) 자율성 

자유의지는 유개념이다. 그 종개념으로서는 흔히 들어보았겠지만 자율성, 자발성, 자주성 등의 개념이 있다. 이 개념에는 논리적 발전 순서가 있다.

자유의지의 최초 형태는 자율성이다. 흔히 도덕적 강제라고 말할 때, 이게 자율성이다. 이것은 자유의지가 욕망을 억압적으로 규정하는 경우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이런 도덕 교육을 받아 왔다.

그 방식은 주로 매 타작이다. 물론 잘하면 사탕을 받기도 한다. 매든 사탕이든 차이는 없다. 욕망을 매개로 한다. 자율성은 도덕적인 자유의지를 욕망의 힘에 의존해 실현하려 한다.

이런 자율성은 자기 모순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도덕을 실현하기 위해 욕망을 억압하는데, 그 욕망을 억압하기 위해 다시 욕망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매든 사탕이든 결과적으로 욕망을 강화하니 이런 자율성은 도덕을 부정하는 역효과를 자아낸다.

이런 자율성을 강조하는 철학이 많다. 서양철학에서는 칸트의 의무론이나 미국의 실용주의가 대표적이다. 한때 일제식 매 타작 교육을 반대하고 미국식 사탕 교육을 마치 인도적 교육인 냥 들여왔다. 둘 다 욕망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점은 동일하다. 동양철학에서는 유교 성리학이 도덕을 억압적으로 강화한다.

3) 자발성 

자율성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자발성이다. 자발성은 가치 있는 것을 실행하는데 그 자체로 고유한 즐거움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도덕적 행위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 이런 자발성에 대표적인 예가 양심이다. 양심은 도덕적 가치를 수행한다. 그것을 수행하면서 양심은 즐거움을 느낀다.

자율성은 도덕적 강제이다. 이것은 자유의지이기는 하지만 고유한 즐거움을 지닌 자주성에 이르지는 못했다. 양심 또는 자발성에 이르게 되면, 도덕적 행위를 즐겁게 수행하니 여기서 자주성의 개념이 원초적으로 출현한다.

이런 자발성은 개인적인 자주성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자주 양심적인 사람이 오만에 빠진다. 자기만이 올바르고 선하다고 믿는다. 그는 타인이 자기를 인정하는 한에서만 타인도 양심적이라 믿는다. 만일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타인이 양심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양심의 오만은 문학예술에서 자주 지적되어 왔다. 서양 철학적으로 낭만주의 철학이 대개 여기에 속한다. 많은 무정부주의자의 기본 개념이 이런 개인적인 자발성이다. 최근 서구철학의 주요 흐름인 들뢰즈 등의 철학은 이런 자발성 개념을 기초로 한다.

동양철학에서는 양명학이 여기에 속한다. 양심이라는 말 자체가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양능(良知良能: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의지)에서 나온 말이다. 근대 초기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가, 즉 신민회 또는 국민회가 자주, 자강, 자립, 자력 등의 말을 잘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사진 :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홈페이지

4) 공동체적 자주성 

양심과 같은 개인적인 자주성을 넘어서 공동체적 자주성이 등장한다. 이 공동체적 자주성의 대표적인(또는 이상적인) 예가 기독교적 사랑 개념일 것이다.

사랑은 양심처럼 스스로 실행하면서 그 속에서 고유한 즐거움을 얻는다. 사랑은 대가를 조건으로 하지 않으며 사랑하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즐겁다. 그러므로 사랑은 자주성에 속한다. 그런데 사랑은 타인에 관계한다. 양심이 오만한 개인주의에 머무른다면 사랑은 타인과 관계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룬다. 사랑은 공동체적인 자주적 의지라 할 수 있다.

사랑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단계가 낮아서 상당한 정도 감정에 종속하며, 대개 일정한 대가를 조건으로 한다. 부모의 사랑은 대가 없으니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 순수한 사랑 개념에 가깝지만 자연적인 가족의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마침내 동지애라든가 계급애, 민족애에 이르게 되면 공동체적 자주적 정신의 핵심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사랑, 즉 공동체적 자주성은 자유의지의 최고 단계이며, 많은 종교적인 개념들이 이로부터 유래했다. 기독교적 인류애적 사랑의 개념, 유교에서 타인에 공감하는 인(仁)의 개념, 동학에서 타인을 하늘로 받드는 인내천 사상이 이런 자주적 공동체 정신의 최고단계를 보여준다. 헤겔은 이런 공동체 자주 정신을 절대정신이라 규정했다.

5) 결론 

지금까지 주체철학에서 전개한 자주성의 개념을 살펴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두 차원이 있다. 사회적 요구로서 자주성(계급해방과 민족독립)과 도덕적 차원에서 자기 실행의 즐거움으로서 자주성이다.

자주 사람들은 이 두 차원을 간과한다. 그래서 사회적 요구로서 자주성만 주장하면 자주적 인간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자주적 요구를 주장하면서도 비자주적인 삶,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다음번에 지금까지 전개해온 도덕론 또는 심성론에 기초해서 마르크스주의가 60년대 이후 타락하게 된 이유와 마르크스의 혁명성을 살리는 길을 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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