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6)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사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좌익 척결은 실제 1950년 8월이면 모두 마친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만으로도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다. 그럼에도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다시 처단 대상 55만 명을 만들어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실상을 추적해 본다.[편집자]

한국전쟁 전후시기 학살당한 인사들 중에는 항일혁명가들도 많았다. 이들은 일제의 학살과 가혹한 고문, 그리고 감옥살이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다시 포고령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끌고 갔다. 학살을 피한 뒤 재판에 넘겨진 경우에는 형무소 재소자가 되었고 경찰서 단계에서 석방된 경우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이들은 전쟁이 벌어진 뒤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살당했으며 특히 형무소로 끌려간 인사들 중 살아남은 사례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보은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벌어질 때 항일운동가 박원근(朴源根, 1912년생)은 1950년 7월10일 후퇴하던 국군 6사단 헌병과 보은경찰서에 의해 100여 명의 지역 주민들과 함께 미륵뱅이 암소바위에서 학살되었다. 적운(赤雲)을 필명으로 썼던 그는 일제시기인 1934년 삼인회 사건, 1941년 신인구락부 사건과 관련되어 옥살이했다.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다

▲ 서대문형무소는 삼인회 사건으로 연행된 박원근 선생을 1932년(소화 7년) 11월12일

촬영했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였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박원근은 1912년 보은면 교사리 405번지에서 박치호와 이영자 사이에 태어났다.

양쪽 집안 모두 대단했다고 한다. 박치호(朴治鎬, 1895~1970)는 항일운동가로서 해방 후 신진당 창립시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중도파로서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했다고 한다. 그의 사위였던 이기영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육영수를 배출한 충북지역의 갑부 육씨 집안에서 혼사를 위해 매파를 보내왔는데 집안이 비교되지 않는다며 단번에 거절할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박치호의 항일활동은 언론자료 등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1924년 일본에서 대학교육을 마친 뒤 돌아 와 보은지방의 민족교육 발전을 위해 당시 10원을 야학설립에 기증했으며 집 일부를 야학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대동공론>의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7년에는 보은청년회를 설립한 뒤 회관 건축비 마련을 위해 기금을 모았으나 일제는 도지사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며 기부금품모집 위반으로 구류 10일의 즉결처분 탄압을 가했다. 정식 재판을 청구한 뒤 복심법원까지 상고하여 무죄판결을 받아냈다.(동아일보, 1927. 5. 28) 1931년에는 <무산자 강화(無産者 講話) 권1>을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 1931. 4. 29) 오늘날로 보면 ‘노동자 이야기’ 정도의 제목이 아닐까 싶다. 일제 사찰자료에는 1927년 5월16일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 참석한 사실이 확인된다. 대회는 의제를 작성할 위원 7인 중 한 사람으로 박치호를 선출했다.

외가 쪽으로는 모친 이영자의 동생 이영근(1919년생)이 잘 알려진 인사이다. 그는 전쟁 전 조봉암의 비서로 활동하다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서 반이승만 활동을 하면서 <통일조선신문>을 창간했으며 조용수의 <민족일보>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형으로 생을 마감한 조봉암과 조용수가 간첩혐의를 받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인데다 이후 친정부 활동으로 전환하여 의문의 인물로 주목 받기도 한다.

10남매 중 장손으로 태어난 박원근은 1927년 보은 삼산보통학교를 14회로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1930년 퇴학당했다. 1929년 11월3일 일제시기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광주학생운동이 시작되었고 학생들의 저항은 1930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박원근이 다니던 중앙고보는 1929년 12월9일 조회시간에 ‘광주진상보고’를 들은 7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경찰이 정문을 봉쇄하자 후문으로 나와 “조선학생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으며 경찰에 의해 다시 막히자 흩어져 경무대 앞에 모여 해산당할 때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이 날의 시위는 중앙고보를 포함해 경신학교, 보성고보, 휘문고보, 남대문 상업학교 등이 참여한 대규모 연합시위였다. 학생들의 요구는 ‘검거학생 석방’이었다. 일제는 경찰만 2천여 명을 동원해 1200여 명의 학생들을 검거했다.

1930년 2월18일과 19일은 광주학생운동 관련 학생들의 공판일이었으므로 700명의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검거된 광주학생의 전원 석방”을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퇴교했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 때문에 시위가 어려워지자 투쟁 방법을 동맹휴학으로 전환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월28일 다시 집단 조퇴했으며 3월2일에는 보성전문학교 등과 함께 동맹휴업을 단행했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 중에는 하숙이나 기숙생활을 하던 지방 출신의 고학년 중등학생이 많았다고 하는데 박원근도 그런 조건을 갖춘 학생이었다. 박원근은 이 때문에 퇴학당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부친 박치호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독립과 사회의 평등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삼인회

일제는 삼인회에 대해 1931년 6월22일 ‘착취가 없는 자유·평등의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좌익계열의 조직이라고 했다. 검거 당시 종로경찰서는 ‘공산주의 실행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였다고 보고했다. 김영학이 중심이었으며, 기관지로 <삼인(三仁)>, <신로(新路)>가 있었다.

당시 필운동에 살던 박원근은 삼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31년 12월 하순 경성 본정경찰서에 검거당했지만 바로 석방되었다. 검거당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에도 삼인회의 지하활동을 계속하던 박원근은 1932년 5월 하야사카(早板) 인쇄소 동맹파업에 참여했다.

1932년 9월7일 삼인회 조직이 드러나 박원근을 포함해 김영학 등 모두 6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당했다. 일경의 검거 대상은 모두 9명이었다. 당시 언론은 비밀결사 삼인회가 신문배달부와 인쇄직공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모임이 단순 체육단체로서 공산주의 비밀결사체가 아니라고 부인한 사실을 보도했다.(동아일보, 1934. 11. 13)

일제 검찰은 박원근의 범죄 혐의를 입증한다며 기관지 <신로>에 실린 글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제출했다. 그 중 증 제6호로 제출한 1932년 1월21일 창간호 <레닌의 사망일>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글을 쓸 당시 박원근의 나이 스물 하나였고 원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매형인 이기영 노인의 번역물을 필자가 약간 수정했다.

<레닌의 사망일>

노동자, 농민, 약소민족 등에서 “니콜라이 레닌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념할 날이다. 동지여! 1월21일은 러시아 볼세비키의 심장이고 수령이고 세계혁명의 지도자이신 레닌의 사망일이다. 1924년 이날.

레닌은 역사 이래 초유의 위대하고, 행복과 자유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위대한 싸움의 첫 승리를 가져왔다. 그는 만 번 농민을 일깨운 역사의 거인이었다. 우리는 세계의 서광인 이날 레닌을 따르는 마음으로 한 자락의 노래를 부른다.

“보라 얼마나 장엄한가.

그가 공헌한 운명의 전투는 인민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의 삶, 자유를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받쳤다.

쓸쓸한 감옥에서 받은 고통, 불법 판결, 뒤에서 재촉하는 적병,

그리고 쇠사슬을 끊고 앞으로 나아간다.”

9년 전 그 날 사망한 그 사람은 천만년 불멸의 역사를 남겼다.

…… (중략) ……

레닌주의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고 지도하고 있다.

동지들이여! 각성하라.

레닌주의의 길, 붉은 길을 힘차게 전진하자.

그리고 이 날을 대중의 기념일로 만들자.

노동자여! 단결하여 이날의 손실을 회복하자!

▲ 일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은 박원근 선생이 <신로>에 실은 글을 일어로 번역하여 ‘비밀결사 삼인회에 관한 치안유지법위반 피의사건 검거에 관한 건’ 85쪽에서 보고하고 있다. 연극대본으로 보인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박원근은 1934년 11월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김영학, 박원근, 김용진, 장만복 등 4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일제의 감시대상 인물카드는 박원근에 대하여 직업은 인쇄업이고, 사는 곳은 경성부 필운동 73번지, 검거기관은 종로경찰서라고 밝히고 있다. 아들 박 씨는 서울에 살던 집이 있던 곳은 경복궁과 삼청동 사이에 있었다고 했다.

매형 이씨는 당시 재판을 방청한 장인 박치호로부터 아들이 “조선인이 일본놈한테 재판을 안 받겠다”라며 판사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법정이 떠나가게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일제 경성지방법원 검사는 박원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피고인 박원근은 소화 6년(1931년) 12월 초순 삼인회가 기술한 바와 같은 목적(사유재산제도 부인, 착취가 없는 자유·평등한 신사회 건설, 즉 공산주의 사회제도의 실현)으로 결사된 내용을 인식하고 가담하였다. 그는 주로 공산주의 선전에 관한 글을 투고하면서 한편으로 그 선전을 위해 직접 회원들에게 공산주의를 지도·교양하였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해 온 자이다.

박원근은 1935년 1월4일 만기출소했다. 징역 1년6개월에 미결구금된 500일이 계산되었기 때문에 선고 한 달 반 만에 출소한 것이었지만 실제 감금당한 기간은 2년4개월이었다. 조사과정의 고문·학살에서 살아남은 항일운동가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신인구락부

석방된 후에도 박원근은 1936년 5월부터 6월까지 경성 관훈동 산해여관에서 지내면서 이건호 등과 함께 항일운동 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후 금산으로 내려온 박원근은 1939년 5월9일 신인구락부 사건으로 다시 금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40년 2월26일 전주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고, 1941년 10월1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번에도 본형에 산입된 미결일수는 530일에 달했다.

이때 일제 총독부는 박원근에 대해 “1937년 7월 발발한 지나사변이 반드시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고 공산주의 운동을 실현할 날이 다가왔다고 하면서 조선의 적화운동을 결의한 자이다”로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중일전쟁에 이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열망이 결국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 일본의 패망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측했음을 서술한 것이리라.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인구락부에 대해 “박원근이 박래수를 지도하여 이석태, 이동우 등과 함께 당시의 전라북도 금산지역 청년들에게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하였고, 중일전쟁을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보고 일본군, 중일전쟁과 이 전쟁에 따른 징병제 등에 반대”했다고 적었다. 대부분의 학계 연구에 따르면 항일운동가들 상당수가 일제의 탄압으로 지하화된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건은 역시 그 시대의 젊은 혁명가들은 당시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강제징병 문제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박원근은 여러 차례 형무소와 경찰서 유치장을 드나들었지만 전주형무소에서 출소하면서 섭섭하다는 듯이 “또 언제 여기에 들어오려나!” 했다고 한다. 출소 후 1942년경 결혼하여 슬하에 1녀 3남을 두었다. 증언을 해준 보은유족회장인 박용현씨는 둘째이고, 셋째는 한국전쟁 중 부친을 잃은 뒤 피란길에서 얻은 병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해방

위 이 노인은 해방 뒤 박원근이 보은 마차 임금조합에서 일하면서 때로 ‘적기가’를 부르거나 동료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이 외에 남로당 등 좌익계열의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딸은 보은 삼산국민학교에 입학하던 날 학교까지 따라왔던 자상한 아빠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항일운동과 감옥생활로 늦게 결혼했으므로 박원근은 특히 큰딸에 대한 감정이 애틋했다고 한다.

대전 생활에 대해 아들 박씨는 서울 사간동뿐 아니라 대전 은행동에도 집이 한 채 더 있어 그곳에서 세발자전거를 탔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매형 이씨 증언에 따르면, 해방 후 희생자의 부친 박치호 선생은 공산당 정치학교에서 변증법 강의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예상치 못하고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호가 눌언. 눌언 박치호. 그전에 공산당에 정치학교가 있습니다. 이 양반이 정치학교에서 변증법 강의를 했어요. 나는 들었어요.……이 양반이 해방됨과 동시에 경성방송국에서 변증법에 입각해 오행설을 부정하는 방송을 한 거야. 그러니 성균관에서 일어났을 것 아니야. 어떻게 공산당 이론을 갖다가 오행설에 붙이느냐고.

이씨는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때 박치호 선생이 신진당 당수로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신진당에서 8명이 여기에 참석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박치호 선생이 일행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원들과 희생되다

전쟁이 나던 해 박원근은 보은에 내려와 있었다. 대지주 집안이었으므로 토지개혁이 진행되면서 지역주민들과 생긴 갈등을 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모내기 전이었다. 다섯 살 아들 박씨는 마을 사람들과 모여 있던 아버지에게 수건을 가져다 줬던 기억을 하고 있다.

전쟁이 나자 보은지역에 6사단 정보담당(G2) 군인 10여 명이 수리조합 사무실에 주둔하면서 보은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희생자 명단을 만들었다. 명부에 따라 끌려간 주민들은 내북면 서지리, 길상리 미륵뱅이, 마로면 관기리, 하장리 줄밭골 등에서 희생되었다.

토지문제로 보은에 와 있던 박원근은 경찰서로 끌려가 1950년 7월10일 보은면 길상리 뒷산 미륵뱅이에서 학살당했다. 생활과 활동의 대부분을 서울과 대전에서 했으므로 보은의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지만 일제 때부터 요시찰인이었으므로 끌려갔을 것으로 보인다. 유족들은 보은에서 사는 동안 경찰서로 끌려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인민군의 진입과 함께 피난했던 유족들이 8월 보은으로 돌아온 뒤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여러 날 동안 방치되었던 시신들을 겉모습으로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금니 등을 보고 신원을 확인하고 보은중학교 뒤 공동묘지에 임시로 안장했다.

학살 후 시신을 수습하면서 또 다른 희생자 강현중의 아들 강호영씨(당시 12세)가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길게 판 반원형 구덩이에는 시신들이 두 겹, 세 겹으로 쌓여 있었다. 희생자들은 손을 앞으로 묶인 채 정면에서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당시 하늘에는 학살을 감독하는 듯 정찰기가 떠 다녔다.

국군 수복 후 박치호 선생은 월북하여 평양 순안비행장까지 갔으나 미군 낙하산 부대에게 막혀 되돌아왔다. 온양온천에 있는 온정각 호텔에 숨어 있다가 마을로 돌아왔으나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1957년경에 출옥했다고 한다. 출옥 후 신진당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손자 박용현씨는 1960년 4·19혁명과 1965년 6·3한일협정 반대투쟁 때 청년들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선생은 1970년 타계했다.

수복 후 보은지역의 1사단 토벌작전 피해

보은지역 주민들의 피해는 국군 1사단(사단장 백선엽)이 수복한 직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1950년 9월24일 국군 1사단이 낙동강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지만 속리산 부근에서 멈추었다. 미 1군단의 예비사단으로서 인민군 패잔병 소탕이 임무였기 때문이었다.

1사단 소속 3개 연대 중 15연대가 보은지역의 토벌작전을 담당했다. 이들은 9월28일 보은에 진입했는데, 회북면에 진입한 국군은 신대리와 죽암리에 3일 동안 주둔하면서 마을의 부역자를 색출해 인근에서 총살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희생자들은 죽암리와 늘곡리 등 주민 40여 명이었다. 이를 마지막으로 보은지역의 대량 학살은 끝이 났지만 죽은 자는 마땅히 죽을 자가 되어 버렸고, 남은 자는 연좌제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보은지역에서도 전쟁범죄자들의 만행은 중단 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진실규명과 남은 과제

▲ 박원근 선생이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미륵뱅이 현장. 아들 박용현 보은유족회장이 둘러보고 있다.

희생자의 매형 이씨에 따르면, 전쟁 직후 박원근을 잡아간 사람, 국군 수복 후 박치호 선생을 잡아간 사람은 보은경찰서 김○용 형사였다고 한다. 두 사람을 전담했던 그는 일제강점기 보은경찰서의 형사로서 항일활동을 위해 서울로 오가는 박치호 선생과 아들을 밀착해 감시하던 민족반역자였다. 당시 15세였던 이씨는 일제강점기 박치호 선생의 행방을 말하지 않는다며 그에게 다섯 시간 동안 고문을 당했으므로 그를 잊을 수 없었는데, 해방 후 김 형사에게 다시 잡혀가는 참상을 겪었다고 했다. 식민지에서 독립했다는 대한민국은 다시 친일매국노를 고용하여 항일운동가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희생자의 아들 박씨는 이 사실을 무슨 일이 있어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박원근의 항일운동에 대하여 2008년 2월12일,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사실에 대하여 2009년 11월3일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항일운동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2010년 3월 건국훈장 애족장의 서훈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의 부친 박치호 선생의 서훈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한 것이 없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좌익계열의 항일운동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남아 있다. 특히 한국전쟁 전후 학살당한 항일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좌익계열의 항일운동을 인정하기 힘든 것이라기보다 민간인 학살 범죄를 부인하려는 국가의 회피 경향이 더 심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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