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55)

1) 관료냐 자치냐?

앞에서 민주사회와 자치사회를 비교했다. 자본주의는 민주사회이다. 목적만 인민이 정하고 실행은 관료(또는 전문가)가 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자치사회이다. 인민이 목적을 정하는 동시에 직접 실행하는 체제이다.

관료체제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과연 그런지는 의심스럽다. 관료가 민주적으로 합의된 목적을 배반하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위험이 가장 크다. 더구나 관료에게 맡길수록 인민의 실행 능력은 떨어지니 더욱 관료에게 의존하게 된다. 결국 민주는 껍데기가 되고 관료정치(테크노크라시)가 등장한다.

이렇게 관료, 전문가 체제의 효율성이 의심스럽지만 그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가 자치를 택하는 것만은 아니다. 효율성을 따지는 생각 자체가 아직 부족하다. 사회주의 사회가 자치를 택하는 것은 효율성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을 자기 스스로 실행하고 싶어 한다.

욕망이 만족되면 그 결과 쾌락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쾌락과 전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 이런 고유한 즐거움은 실행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것은 어떤 경우 욕망 만족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준다.

2) 본래적 목적으로서 자주성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자주성에는 자기의 실행이라는 개념과 동시에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자기 실행의 고유한 즐거움, 그것이 자주성이다.

고유한 즐거움,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것을 우리는 인간의 본래적 목적, 즉 본성이라 한다. 건강은 그 자체 목적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삶은 인간의 본래적 성질이다. 돈은 다른 것의 실현수단이다. 본래적 목적은 아니다. 돈 버는 능력이 인간의 본성은 아니다.

자기 실행은 이렇게 본래적 목적이므로 주체철학은 자기 실행, 자주성을 인간 본성의 차원으로 고양한다. 이런 본성은 가치론적 차원에서의 본성(사회적 요구로서 자주성, 즉 계급해방, 민족 독립)과 구분되는 것이다. 자기 실행의 고유한 즐거움,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차원에서의 본성이다.

자주성이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 하나가 폭로된다. 조미 회담이 전개될 때, 미국은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초청해 뉴욕 스카이라인을 보여준다느니, 핵 폐기만 이루어진다면 베트남처럼 잘 살 수 있다든지 하면서, 트럼프 빌딩을 짓는다, 맥도널드가 들어간다 하고 설레발쳤다.

김영철 부장이나 북조선 사람들이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그들은 경제성장을 원하겠지만 그런 성장은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성장이어야 할 것이다. 그게 성장하는 방식으로 느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그쪽 사회 사람들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그게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니 말이다.

3) 나와 축구광의 차이 

앞에서 가치론을 다루었다. 이는 무엇을 욕망하며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다룬다. 이제 도덕론은 실천, 의지를 다룬다. 도덕론의 원리는 욕망과 가치를 어떻게 실현하는가를 다룬다. 실천 의지의 원리에는 단순하게 말해 두 가지 원리가 있다. 하나는 욕망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의 원리이다.(자주성은 넓게 본다면 자유의지 속의 한 가지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자유의지에는 자율성, 자발성이 있고, 자주성으로서 사랑 등의 개념이 있다.)

욕망은 흔히 기계적인 힘으로 강요된다. 이 욕망의 힘은 자주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부과된다. 욕망은 결과를 향해 직진(충동적)한다. 욕망은 그 결과 때문에 쾌락을 얻는다. 욕망은 굳이 자기가 하지 않아도 결과만 얻으면 충분하다.

그런데 자유의지는 욕망과 다르다. 자유의지는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실행한다. 그 때문에 자유의지라 한다. 이런 자유의지는 그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때문에 즐거움을 얻는다. 자유의지는 남이 결과를 해다 바치는 것보다는 자기 스스로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두 가지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축구 구경하는 두 방식을 보자. 나는 대개 뉴스 시간에 골 들어가는 장면만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솔직히 두 시간 동안 일진일퇴 지루하게 공이 오가는 것을 눈이 빠지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멍청하거나 이상하게 본다.

그러나 축구광은 나와 다르다. 그들은 골을 넣기 위해 일진일퇴하는 장면, 하나하나를 놓칠까 두려워 화장실도 가지 않고 바라본다. 많은 축구광은 시원한 집에서 TV로 보기보다 뙤약볕 밑에 축구장에서 구경하고자 한다. 더구나 그것도 성이 안차서 내가 보기에 조잡한 동네 축구를 한 시간 뛰고 나서는 마치 자기가 월드컵에 나간 것처럼 좋아한다.

나 같은 사람이 축구를 욕망하는 것이라면, 축구광은 축구에 대한 자주적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자유의지와 부르주아적 자유 

일반적으로 말해 자유의지와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가 구분된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하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욕망의 힘에 몸을 맡기는 것에 불과하다. 다만 어떤 욕망의 힘이 작용할 때 아무 제약 없이 몸을 맡기자고 주장할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욕망에 대한 방임주의가 부르주아 자유주의이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도덕적으로 욕망론자이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여러 욕망 가운데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말은 한다. 하지만 그는 말만 그렇게 할 뿐 실상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없다. 그저 몸이 기계적으로 강요하는 욕망에 몸을 맡길 뿐이다. 그는 욕망이 시키는 일을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고 우기는 사기꾼이다.

진정한 자유의지는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스스로 실행하는 것이니, 이는 욕망의 힘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예를 들어 그는 몸으로는 술을 먹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강력한 의지를 통해 그 순간에 뜨거운 차를 먹는, 이때 그에게 자유의지가 출현한 것이다.

욕망과 자유의지의 차이, 자유의지와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차이에 관해서 여기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고 말자. 좀 더 상세한 논의는 내가 이미 지은 저서 <자주성의 공동체>나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제 여기서 철학적으로 더욱 어려운 문제가 등장한다. 과연 욕망의 힘을 지배하는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철학에는 소위 자유의지론이라는 분과가 존재할 정도로 이 문제는 수많은 철학자들을 괴롭혔다. 여기서는 그 모든 얘기는 생략한다. 다만 독일 고전철학에서 마침내 자유의지 가운데 자주성 개념이 출현한 과정만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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